가을 통째로 마시는 욕망의 채움

▲ 가을이 익어가는 산책로 제주 한라산 아흔아홉 골 시작은 골머리부터. 산책로는 가을이 익어간다 ⓒ 김강임
 사람들은 저마다 높고 깊은 것을 좋아한다. 높은 산, 높은 아파트, 높은 지위와 명성, 높은 연봉. 그래서일까? 높은 산은 도전하는 사람들의 대상이 되고, 높은 아파트는 프리미엄이 붙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높은 지위와 명성을 따기 위해 아귀다툼을 한다.

그런데 깊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바다, 어머니의 마음. 하지만 이 가을에 깊은 것은 꼽으라면 한라산의 아흔아홉 골 계곡이 아닐까.

▲ 산책로 계단 암좌로 가는 계단은 백팔번뇌를 생각나게 한다. ⓒ 김강임
아흔아홉 골 산책로를 따라서

입동을 며칠 앞둔 지난 4일, 제주시 해안동 한라산 아흔아홉 골은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수많은 골짜기가 차곡차곡 쌓인 아흔아홉 골. 아흔아홉 골의 시작은 골머리에서부터 시작된다.

골머리는 한라산 중턱에 자리 잡은 절집 천왕사 일대를 일컫는다. 그래서 이곳은 골짜기의 머리로 골머리라 부른다. 아흔아홉 골의 시작인 셈이다.

언제부턴가 이 골머리에는 입구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골머리 오름과 그 위쪽에 위치한 금봉곡 주변에 산책로가 있기 때문이다. 이 산책로 끄트머리에는 석굴암이라는 암자가 하나 있다. 하지만 이 산책로가 등산객들을 유혹하는 이유는 골짜기가 깊다는 것이다.

▲ 봉우리와 기암, 단풍 봉우리와 어우러진 기암절벽에는 단풍이 물들어 있다. ⓒ 김강임
왜 아흔아홉 골인가?

아흔아홉 골에 대한 유래는 참 흥미롭다. 아주 먼 옛날에 한라산에는 100개의 골짜기가 있었다 한다. 이곳에서 사자와 호랑이 등 맹수들이 백성들을 괴롭혔다 한다. 그런데 중국의 한 스님이 그 맹수들을 한군데 몰아넣고 골짜기 하나를 없앴다 한다, 그 후로 제주도에는 맹수가 없어지고 큰 인물도 나지 않는다는 전설. 그래서 100개의 골짜기는 아흔아홉 개가 되었다 한다.

아침 8시, 제주시 해안동 천왕사 입구 주차장은 벌써 북새통이다. 등산객들을 맞이하는 까마귀들도 오는 손님을 맞이하느라 바쁘다. 살아 있는 생명들의 숨소리가 골짜기에 울려 퍼진다.

산책로는 계단이 놓여 있다. '계단' 하면 떠오르는 것은 백팔번뇌. 계단이 몇 개인지는 세어 보지 않았지만, 염주 알을 세는 기분으로 계단을 밟았다.

산행의 초보에게 금봉곡 가는 길이 조금은 힘겨울 수도 있다. 하지만 산책로가 가파른 만큼 계곡도 깊다. 그 깊은 계곡 속으로 들어가노라면 마음도 깊어진다. 마치 수행하는 기분이랄까.

▲ 하늘 덮은 단풍 계곡마다 단풍이 하늘을 수놓아 ⓒ 김강임
▲ 산책로 마중온 열매 산책로에는 가을 마중을 온 열매들이 소곤대고 ⓒ 김강임
계곡에 어우러진 단풍 절정

계곡에 서 있는 기암괴석이 가을 단풍 사이로 희끗희끗하게 보인다. 한라산 아흔아홉 골의 묘미는 계곡과 어우러진 기암괴석의 절경. 도심에서 찌든 사람들이 왜 이곳에 모이는지를 알겠다.

상수리나무, 적송, 단풍나무, 조릿대. 한라산에 자생하는 습지식물 이파리에 이슬이 맺혀있다. 적송의 뿌리는 등산객들의 버팀목이 되어준다. 가파른 산책로에서 손잡이가 되기도 하고 안전하게 발을 디딜 수 있는 혜택을 주니 말이다.

▲ 밧줄을 잡고 오르는 산책로 산책로는 급경사로 이뤄져 밧줄을 잡고 올라야 ⓒ 김강임
20분쯤 걸었을까? 가장 가파른 산책로에 도달할 때쯤. 지나가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거칠다. 땀을 닦는 사람, 바람소리를 듣는 사람, 계곡에 물든 단풍을 즐기는 사람. 사람마다 보고 느끼는 것은 다르다. 자신의 삶의 가치를 느끼는 순간이다.

계곡을 바라보았다. 기암괴석을 붙잡고 있는 나무 이파리들이 형형색색이다. 깊은 골짜기는 가을을 어떻게 알았을까.

▲ 금봉곡 주변 낙엽 금봉곡으로 가는 주변은 온통 낙엽이 무덤 이뤄 ⓒ 김강임 아흔아홉골
가을 통째로 마시는 욕망의 채움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수놓은 것도 역시 가을단풍이다. 지나가던 바람이 이파리를 흔든다.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 지는 소리가 마치 소낙비 내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사법고시, 행정고시, 백일기도’, 안내판이 산책로 모퉁이에 우두커니 서 있다. 깊은 산속 계곡은 마음을 비우러 가는 줄 알았는데, 욕망을 채우러 가는 이도 있나 보다.
 

▲ 암자(석굴암)의 풍경 아흔아홉골 산책로 끄트머리에는 조그만 암좌가 있다. ⓒ 김강임
▲ 계곡물에 비친 단풍 암자 계곡물을 떠다 커피를 끊여 마셨다. 계곡물에 비친 단풍 ⓒ 김강임
호젓하게 자리 잡은 암자(석굴암)에 도착한 것은 출발 40분 후. 가파른 내리막길 계단을 딛고 깊고 심오한 계곡 속으로 들어갔다. 암자 주변에는 어느새 낙엽이 쌓였다.

계곡물을 떠다 암자 평상에서 커피를 한잔을 끓여 마셨다. 한라산 아흔아홉 골의 깊은 계곡의 가을 소리까지 통째로 들이마시는 기분. 하늘에서는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더라.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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