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서 온 가을편지] "사랑 하나만은 느끼며 살자"
비바람이 폭풍으로 몰아치던 날
충남 보령..
한 빨치산 노인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내려오던 길 만경 부근이었을까?
먼 산 위로 아릿한 무지개를 보았다.
가까이 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다...
잠시 시퍼런 하늘도 보여 주었다.
한 참 후에야 난
그 무지개와 시퍼런 하늘이 그 노인이 쫓았던
꿈과 세상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밤에 세찬 바람과 함께 많은 비가 내렸다.
왜가리일까?
-외롭니?
-나도 외롭다.
안도현의 새 시집 <너에게 가려고 나는 강을 만들었다>을 보았다.
[ 강 ]
너에게 가려고
나는 강을 만들었다
강은 물소리를 들려주었고
물소리는 흰 새떼를 날려 보냈고
흰 새떼는 눈발을 몰고 왔고
눈발은 울음을 터뜨렸고
울음은 강을 만들었다
너에게로 가려고
화개에서 구례로 가는 섬진강 길엔 붉은 배롱나무가 한창이다.
늘 이 길을 다니지만 한 번도 걸어 본적은 없었다.
가을 날..
이 길을 걸으며 배롱나무와 만났다.
배롱나무는 여름 내내 장마와 무더위를 이겨내면서 꽃을 피워낸다.
꽃백일홍과 구분지어 목백일홍(木百日紅)이라고도 부른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하여 열흘 가는 꽃이 없다지만
배롱나무는 백일 동안이나 꽃을 피운다.
하지만 배롱나무의 꽃은 한 송이가 피어 오랫동안 버티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꽃들이 원추상의 꽃차례를 이루어 차례로 피어나는데 그 기간이 100일을 지난다.
昨夕一花衰(작석일화쇠) 어제 저녁 꽃 한 송이 지고
今朝一花開(금조일화개) 오늘 아침 꽃 한 송이 피어
相看一百日(상간일백일) 서로 일 백일을 바라보니
對爾好銜杯(대이호함배) 내 너를 대하며 좋이 한 잔 하리라
꽃잎은 꽃받침과 더불어 6개로 갈라지고 주름이 많다.
수술은 30∼40개로서 가장자리의 6개가 길고 암술은 1개이다.
매끄러운 줄기를 긁어주면 모든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간지럼을 타기 때문에
충청도에서는 ‘간지럼나무’라 하고 제주도에서는 ‘저금 타는 낭’이라고 부른다.
배롱나무는 사람이 일부러 심지 않으면 스스로 번식할 수 없는 나무다.
흰꽃이 피는 배롱나무도 있는데 나무를 심은 사람이 죽으면 3년 동안 꽃이 하얗게 핀다는 속설이 있다.
꽃말은 ‘떠나간 벗을 그리워함’이다.
....
나무로 치면 고목이 되어버린 나도
이 8월의 폭염 아래 그처럼
열렬히 꽃을 피우고 불붙을 수는 없을까
-목백일홍 중에서
그래도 난 아직 고목은 아니다...
배롱나무 옆 철없는 장미 한 송이....
또 다른 비바람이 지나간 날 새벽
길을 나섰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안개속이다.
비 온 뒤 일교차가 심한 지리산자락은 안개 속 섬처럼 보인다.
봄날을 자랑하던 화개십리 벚꽃 길에도
이젠 낙엽이 진다.
어느 봄날엔 이런 모습이었다...
“그는 이 사막에서 너무 외로워,
이따금 뒤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기 위하여.“
세상을 믿고 싶을 땐
뒤로 걸어본다
등 뒤로, 보이지 않는 세상 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면
두근거리는 뒤꿈치마다
두려움과 기쁨이 밟힌다
이렇게 세상을 등지고 걷는 것은
등 뒤에 있는 세상을
끝끝내 믿고 싶기 때문이다.
손나희...
강둑을 지나 악양으로...
평사리 들판
박경리선생님도 오시려나..
멋진 허수아비도 그래서 서 있는 거란다.
농약땜에 참새가 없단다...참새가 보고 싶어...ㅠㅠㅠ.
누굴 기다리나?
아름답고 풍요로운 평사리에서
이들은 행복할까?
지리산에 온지 일 년 반이 지났다.
요즘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랑 하나만은 느끼며 살자
분노 하나만은 지니고 살자
거침없이 살자.
#이 글(과 사진)을 보내온 조성봉님은, 제주 4.3 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레드헌트'를 만든 감독으로 현재 지리산 자락에서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