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언론학회-4.3평화재단-4.3연구소, 다랑쉬굴 성찰-과제 세미나

26일 오후 2시 제주4.3평화교육센터에서 열린 '다랑쉬굴 발굴 30년 성찰과 과제' 특별세미나 ⓒ제주의소리
26일 오후 2시 제주4.3평화교육센터에서 열린 '다랑쉬굴 발굴 30년 성찰과 과제' 특별세미나 ⓒ제주의소리

제주 4.3 당시 참극이 선명하게 드러난 다랑쉬굴 발굴이 올해로 30년을 맞았다. 40여년 세월동안 금기시돼온 4.3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1992년 다랑쉬굴의 유해는 마치 4.3학살 피해의 쇠망치와도 같았다.

1992년 다랑쉬오름 동남쪽 해발 170m 지대의 다랑쉬굴에서 4.3당시 학살 당한 민간인 유해가 발견됐고, 그 생생한 모습이 신문지면과 전파를 통해 제주사회에 전해졌다. 굴 속에서 질식사를 당한 주민들의 유해와 피난생활 당시의 유물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현장은 민간인 학살의 참혹함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다랑쉬굴 발굴은 곧 제주지역 4.3진상규명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그동안 증언으로만 알려졌던 집단학살이 구체적인 사례로 드러나자, 공안정국 속에서 수세적으로 다뤄지던 4.3운동은 공동체의 기억을 소환해 냈고, 이내 제도권의 호응을 불러왔다.

그러나, 엄혹한 시대와 싸워온 이들은 여전히 커다란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 다랑쉬굴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채 이뤄지기도 전에 당국의 공작에 의해 유골이 화장되고 바다에 뿌려지는 것을 지켜보며 죄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고 토로했다. 이는 다랑쉬굴 사건의 진상조사가 더이상 늦춰져선 안된다는 목소리로 연결됐다.

제주언론학회와 제주4.3평화재단, 제주4.3연구소는 26일 오후 2시 제주4.3평화교육센터 다목적홀에서 '제주4.3과 언론-다랑쉬굴 발굴 30년, 성찰과 과제'를 주제로 한 특별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세미나에는 30년 전 다랑쉬굴 발굴과정과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취재했던 전 제민일보 4.3특별취재반 김종민 4.3위원회 중앙위원을 비롯해 7년후 봉쇄된 다랑쉬굴을 다시 열고 들어가 특집프로그램을 제작했던 전 제주MBC 보도국장 송창우 제주교통방송사장 등이 주제발표에 나섰다.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책자를 발간하는 등 다랑쉬굴 기념사업을 전개해 온 박경훈 4.3평화공원 운영관리 자문위원장도 발제자에 이름을 올렸지만, 갑작스런 개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발표는 당시 제주4.연구소의 연구원으로 다랑쉬굴 발굴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김동만 제주한라대 교수(제주언론학회 회장)이 대신했다.

김종민 제주4.3위원회 중앙위원. ⓒ제주의소리
김종민 제주4.3위원회 중앙위원. ⓒ제주의소리

◇ 김종민 "화장된 유해 짙은 회한...침체됐던 4.3진상규명 가속화 의미"

당시 제민일보 4.3특별취재반으로 활동한 김종민 위원은 발표를 통해 다랑쉬굴 유해 발굴 취재와 보도과정, 시대적 의미를 낱낱이 전했다.

김 위원에 따르면 1992년 3월 22일 4.3특별취재반은 4.3연구소로부터 '4.3때로 추정되는 유해 10여구와 생활 도구가 있는 작은 굴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달 29일 합동조사를 벌인다. 굴의 크기와 모습을 실측해 약도를 그리고, 유해와 생활도구가 놓였던 곳을 표기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2차 합동조사는 4.3 제44주기를 이틀 앞둔 4월 1일 진행됐다. 정형외과 의사와 변호사, 제주대박물관장을 비롯해 전국적인 여론 확산을 위해 제주MBC, 한겨레신문, 동아일보 취재진이 대동했고, 다랑쉬굴 사건을 최초 증언한 채정옥씨가 직접 참석했다.

김 위원은 당시 다랑쉬굴이 '겨우 사람 한 명이 뒷걸음질치며 기어들어갈 만한 좁은 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갔다'고 묘사했다. 10구의 시신들은 몸을 맞댄 채 비교적 가지런히 누워있었고, 안경, 단추, 혁대, 버클, 고무신 등의 유품은 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주변에 총알이나 탄피가 없는 것으로 봐서 사망 원인은 질식사로 추정됐다. 실제 4.3취재반은 다랑쉬굴에 숨어있던 주민들이 토벌대에 발각됐고,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질러 굴 속의 사람들을 질식 몰사케 했다는 풍문을 기반으로 진상조사를 벌이던 때였다.

4.3취재반은 첫 보도를 시작으로 연일 다랑쉬굴에 대한 보도를 이어갔다. 4월 3일 추념일 당일에는 정계, 종교계, 학계 대표 인사들의 인터뷰를 실어 희생자의 유해를 양지바른 곳에 안장시켜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했고, 이튿날에는 유해를 수습했던 채정옥씨의 증언을, 6일과 7일에는 희생자를 수습하지 못해 시신이 없는 무덤을 조성하고 있다는 희생자 유족의 사연과 인터뷰를 보도했다.

그러나, 처음엔 '양지바른 곳에 안장하는게 도리'라는 여론에 동의하던 제주도당국의 태도가 미묘하게 변화되기 시작했고, 다랑쉬굴 입구는 행정당국에 의해 시멘트 콘크리트로 밀봉됐다. 다랑쉬굴의 유해는 유족들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화장(火葬) 후 바다에 뿌려져야 했다. 다랑쉬굴 묘역이 자칫 광주5.18의 성지인 망월동 묘역처럼 되는 것을 막으려 한 군사정권이 말단 행정조직을 통해 모양새를 꾸미면서다. 

최근에야 화장 문화가 보편화됐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화장은 불가피한 경우에만 한정되던 시절이었다. 다랑쉬굴 희생자의 고향인 종달리와 하도리의 상부 행정기관인 구좌읍은 유해 처리 방향에 대해 유족 대표들과 논의하는 형식을 취했는데, 당시 회의에는 희생자의 직계비속은 없이 집안 항렬 상 조카뻘이 되는 인물만이 참석했다. 회의는 마치 유족측이 화장을 요청하는 것처럼 쫓기듯 결론 내려졌다.

김 위원은 "다랑쉬굴의 유해가 양지바른 곳에 안장되지 못한 채 정권의 강요로 화장돼 바다에 뿌려진 점은 당시 취재기자로서 깊은 회한과 짙은 아쉬움으로 남아있다"며 "만일 민주정부 때에 그 사실이 공개됐다면 4.3평화공원 내 어느 한 곳에 예를 갖춰 안장됐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라고 되돌아봤다.

다만, 김 의원은 "다랑쉬굴 발견과 보도는 비록 '희생자의 유해를 양지바른 곳에 안장시켜 드리자'는 목적에는 실패했지만, 4.3진상규명운동사에서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며 "정치사회적 환경으로 인해 4.3추모제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되고 추모제 장소에는 최루탄이 난무하던 때였다. 다랑쉬굴 발견과 보도는 침체됐던 진상규명 운동을 가속화했고, 전국적으로 4.3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송창우 제주교통방송사장. ⓒ제주의소리
송창우 제주교통방송사장. ⓒ제주의소리

 

◇ 송창우 "억압된 집단기억 사실로 입증된 사건, 4.3교육 지속돼야"

1999년 MBC특집다큐 다랑쉬굴의 침묵을 제작한 송창우 사장은 '다랑쉬굴 발굴과 언론'을 주제로 두번째 발제에 나섰다.

송 사장은 "1945년 이후 4.3은 '겪은사람, 들은 사람, 굳이 믿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살았다. 1960년 4.19로 4.3을 소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잠깐이었고, 군사 쿠데타로 다시 침묵을 강요당했다. 이념으로 바라보는 시대 상황은 이들의 경험을 압도했다"고 제주사의 비극을 되새겼다.

이어 "4.3이후에도 경험은 기억으로 남아 말과 글로 후손에서 후손으로 이어졌지만, 수많은 증거들이 감춰지고 사라졌다. 오히려 비난의 대상으로 변해갔다"며 "'굳이 믿고 싶지 않은 사람'의 이념으로 무장되는 사회분위기는 피해자들의 경험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고, 거짓이 참이 되는 이상한 상황으로 흘러갔다"고 당시 시대상을 정의내렸다.

송 사장은 "다랑쉬굴 학살 현장 발굴은 피해자들의 증언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비문명적인 초토화 작전이 거짓이 아니고 사실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였다. 집단기억이 사실이었음을 입증하는 사건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동안 괄시와 따돌림, 은폐와 부당한 권력으로 눌러왔지만, 집단학살이 있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났고, 4.3 50주년 안팎으로 일부 양심적인 세력을 중심으로 진실을 찾으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전국적인 관심을 끌기에는 동력이 부족했던 때 모두의 문제로 확산시켜 시민을 설득할 수 있어야 했다"고 다랑쉬굴을 재소환 해 특집다큐를 제작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송 사장은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제주4.3은 아직도 강력한 포탄의 뇌관과 같다. 이 뇌관이 선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데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라고 전제하며 "국민들이 4.3을 알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더욱 강화돼야 한다. 배상 작업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4.3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김동만 제주언론학회 회장. 김 회장은 박경훈 제주4.3평화공원 운영관리 자문위원장의 불참으로 인해 세번째 발제를 대신했다. ⓒ제주의소리
김동만 제주언론학회 회장. 김 회장은 박경훈 제주4.3평화공원 운영관리 자문위원장의 불참으로 인해 세번째 발제를 대신했다. ⓒ제주의소리

◇ 박경훈 "공안당국의 다랑쉬굴 인위적 은폐, 면밀한 진상규명 필요"

박경훈 위원장은 당시 다랑쉬굴 발굴 사건이 졸속으로 처리됨에 따른 남겨진 과제를 제시했다.

박 위원장은 "다랑쉬굴 유해 발굴은 단순히 발굴 사실이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을 넘어, 당시 당국의 인위적인 사건의 은폐와 공작을 통해 새로운 사건으로 진화했다"며 "당시 당국은 유해의 졸속 처리는 물론, 시급히 동굴을 봉쇄하고 이 사건을 사회적으로 비화하지 않도록 일단락 짓는데 주력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검찰, 경찰, 행정기관 등 당국은 다랑쉬굴 사건이 발표되자 무척이나 당황한 듯 당일 현장에 급파한 후 바로 공식 입장을 밝혔다. '다랑쉬굴 희생자들은 토벌대에 발각되지 집단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곧 관련 증언이 나오면서 근거 없는 허위발표로 밝혀졌다. 다시 입장을 바꿔 다랑쉬굴이 '남로당의 비밀아지트'라고 발표했지만, 발굴 유해 중 9세의 어린아이가 포함돼 있어 설득력을 잃었다.

박 위원장은 "4.3연구소와 사회단체들은 '시신 처리는 유족의 뜻을 최대한 존중해 도민장으로 치러야 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며 정당, 종교계 등이 참여한 '다랑쉬굴 4.3희생자 대책위원회'를 구성했지만, 관계기관의 개입이 본격화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대책위가 유족들을 만나려해도 유족들의 집 입구는 정보기관원들이 지키고 있었다"고 떠올렸다.

또 "4.3당시 무장대에게 피해를 당한 유족들도 동원됐다. '폭도들의 무덤을 만들 수가 있느냐'라는 색깔론이 본격화됐다"며 "결국 당국의 공작으로 인해 유족들 간에도 이견이 생겨 매장파와 화장파로 나뉘었다. 4.3의 트라우마를 일깨워 공포의 공작을 펼친 것"이라고 분개했다.

박 위원장은 "요즘 같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그 당시는 행정의 이름으로 버젓이 공작이 벌어졌다. 끝내 유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행정행위를 강행했으나, 이에 대한 당시의 상황 전개에 대한 정밀조사나 평가도 없이 벌써 30년이 지났다"며 "4.3운동사에서도 어찌보면 다랑쉬굴은 공안정국으로 얼어붙던 4.3운동의 동력으로만 사용하고 버린 것은 아니었는지 냉철히 돌아볼 때가 됐다"고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그는 "다랑쉬 30주년을 맞아 1992년 유해 발굴에 관여하면서 도민사회와 유족들의 염원과는 다르게 졸속과 파행으로 일을 처리한 이 사건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당시 제주사회의 흑역사를 다시 한번 재조명해 4.3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제대로 정립할 필요가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다랑쉬 4.3학살유해발굴 사건 진상조사 △다랑쉬 잔존유해 및 유물 발굴사업 △다랑쉬굴 토지매입 및 성역화 사업 추진 등의 세부과제를 제시했다.

한편, 이날 세미나의 2부 순서로는 허호준 한겨레신문 부국장이 좌장으로 나선 가운데, 박재현 KBS제주 PD, 강철남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 위원장, 강민철 제주도 4.3.지원과장, 양정심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이 토론자로 참석해  다랑쉬굴 발굴에 따른 과제를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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