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30) 손봉호, 고통받는 인간,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1995.

손봉호, 고통받는 인간,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1995. 사진=알라딘
손봉호, 고통받는 인간,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1995. 사진=알라딘

<오징어 게임>의 세계적인 대흥행 이후 K-드라마는 이제 세계 순위권에 오르는 일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기대작이 넷플릭스 세계 순위의 상위권에 들지 못하면, 아쉬워하고 심지어는 비난까지 할 만큼 높은 위상을 갖게 되었다. 연상호 감독의 드라마 <지옥> 역시 넷플릭스에서 세계 1위를 기록했던 인기 시리즈다.

이 드라마엔 사람들에게 지옥의 천사(天使)가 나타나 지옥에 갈 시간을 고지하는 기이한 일들이 계속 벌어진다. 이 혼란에 대응해 정진수 의장이 이끄는 ‘새진리회’라는 신흥 종교가 나타난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선(善)과 정의를 실천할 것을 설파한다. 낯선 괴물들에게 지옥을 시연 당하며 불에 타 죽게 되는 이들은 죄를 저질렀다는 논리다. 그러나 기이한 사태들에 대한 이 해석은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죄인의 낙인을 찍는다. 그 낙인은 어쩌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일 수 있다. 새진리회에 반대하는 이들은 이 사태들은 ‘천벌’이 아닌 단지 재앙이라고 항변한다.

<지옥>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지옥 시연 사태들은 코스믹 호러(cosmic horror)나 사변 장르(speculative fiction)의 서사적 특징의 하나다. 신적인 존재, 혹은 우주적 존재의 막강한 힘에 비해 인간은 철저히 무력하게 짓이겨진다. 말 그대로, 이야기 속의 인간들은 우주적 공포를 경험해야 한다. 그렇다 해도 이 사태들은 다소 개연성에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왜 저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든 기술과 군사력을 동원해 지옥 시연을 막을 생각을 하지 않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드라마의 장르적 즐거움을 위해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물론, 이 드라마를 옹호하고 즐기기 위한 또 다른 방법도 있다. 이 지옥 시연을 삶의 고통에 대한 은유로 해석해보는 것이다.

지옥의 시연이 자연재해나 우연한 사고에 가깝다고 항변하는 비밀결사 ‘소도’ 사람들의 목소리를 떠올려 보자. 우리는 삶의 끔찍한 고통을 ‘지옥’이라고 비유하고는 한다. 물론, 지옥이란 본래 신학적 개념이므로 ‘죄와 벌’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드라마에서 사자들이 ‘지옥’이라는 단어를 정확하게 사용하는 것은 확실히 ‘지옥 고지’의 해석을 두고 벌어지는 ‘새진리회’와 ‘소도’의 서사적 경합에서 개연성을 떨어뜨리는 요소이다.) 하지만, 그런 의미를 떨구어 내면, 삶의 여러 고통에 대해 우리는 지옥행 시연에 대해 그런 것처럼 철저히 무력하다. 드라마와 달리, 우리는 다만 언제 죽을지 알지 못할 뿐, 필멸의 존재인 것은 같다.

드라마에서 많은 사람들은 ‘지옥’의 의미를 헤아려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 지옥행 그 자체의 고통보다 지옥행의 이유에 대해서 사람들은 알지 못해 고통스러워 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Why me?) 우리 역시 삶에서 마주하는 숱한 고통보다 그 고통의 의미를 알지 못해 고통스러워한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이 삶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면, 고통에 대한 사유를 놓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떠한가?

손봉호는 “고통문제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고통받는 인간에서 철학은 삶과 거리가 먼 것에 대해 주로 사유해 왔다고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실제로 고통에 대한 철학적 저술은 생각보다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1995년에 나온 이 책이 여전히 고통의 철학적 논의에서 대표적인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지금까지 고통은 철학의 진지한 사유 대상이 되기보다는 주로 의학, 종교, 문학, 심리학의 탐구 영역에 있었다. 그럼에도 고통은 모든 사람이 겪고 있는 삶의 가장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중요한 사색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고통을 논의하기 어려운 점은 고통이 철저히 주관적인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고통은 의학적이고도 생물학적인 진단을 통해서 파악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객관적 지표가 고통을 온전히 다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고통(苦痛)이 마음의 괴로움과 몸의 아픔을 모두 일러 의미하는 것이지만, 우리말의 실제 쓰임에서처럼 그 두 가지는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신체적 고통과 사회적 고통이 동일한 뇌 영역을 활성화한다는 실험 결과가 있었으나, 현재는 반박된 상태라고 한다. 관련 기사=‘뇌는 정말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구별하지 못할까?’) 동일한 신체적 상해나 질병을 경험한다 해도 고통의 주관적 체험은 실제로는 개인마다 다르다. 심지어는 문화와 상황에 따라 고통을 경험하는 방식의 차이도 생겨난다. 

이러한 여러 이유로 고통을 논의하는 일은 쉽지 않은 철학적 과업이 된다. 저자는 특히 고통이 주관적이고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고통을 타인과 나눌 수 없다는 논리는 엄밀하게 말해 타당한 것이지만, 최근의 지식 담론과는 어쩔 수 없는 시차(時差)가 느껴진다. 근래 들어 사회 신경과학이나 사회 인지과학, 진화 심리학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인간의 사회성을 중시하는 담론은 인간이 감정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 최근의 과학과 사회과학 이론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과 별개의 존재가 아님을 알게 한다. 

독일의 대입자격시험의 한 문제가 ‘인간에게 고통이 없다면?’ 하는 사유실험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 질문을 여러 번 언급한다. 실제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에 신체적 상해에 민감하지 못하고 결국 오래 살지 못하고 죽는다고 한다. 생물학적으로 고통은 삶을 위한 경고 장치인 것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고통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고통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종교적 해석은 고통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한 의미 부여는 삶의 고통으로부터 위안을 제공하고, 고통을 의미 있는 삶과 공동체를 위한 출발로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고통은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니체와 같은 철학자가 존재한다. 

인간 사회에 고통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지금과 같은 문화와 문명은 없었을 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 점에서 인간의 문화는 고통 위에 창조된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지식과 문화는 인간의 고통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발달된 의학 기술은 실제로 인간의 신체적 고통을 많이 줄여 놓았다. 인간이 느끼는 고통의 대표적 사례인 산고(産苦) 또한 제왕절개나 무통분만과 같은 의학기술로 상당히 줄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저자는 오늘날 현대인들의 고통을 줄이려는 노력이 다시금 새로운 고통을, 또는 더 큰 고통을 불러온 현실을 지적한다. 편리한 삶을 위해서 환경을 오염시키는 현실은 그 사례가 된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지적한 이러한 사례들은 책이 출간된 지 30여년이 지난 지금, 더욱 깊이 있는 사유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고통을 줄이기 위해 첨단의 과학기술에 의존하는 현대인은 신적인 존재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몽주의적 이상은 실제로는 지구 행성 자체를 인간과 다른 종이 살 수도 없는 곳으로 만든 파괴적 힘이 되기도 했다. 

고통에 대한 사유는 인간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 한 끝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라기보다는 차라리 호모 파티엔스(homo patiens), 즉 고통을 겪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사유 또한 늘 새로워져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저자가 “전통사회에서 사용했던 채찍질을 도덕교육에 재도입하는 것을 고려해 볼 만하다.”(137쪽)고 한 말은 당혹스럽다. 이미 30여년 전의 발언이지만, 적어도 이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저자 자신이 폭력의 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 사회가 제국주의의 침탈, 한국 전쟁, 군사 독재를 거치며 국가 폭력, 남성 폭력을 비롯한 온갖 폭력에 노출된 사회라는 점을 생각해 보라. 이 책은 신체적 고통과 고통의 역사철학적 이해, 노동의 고통까지 다룸에도 폭력에 의한 고통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 철학이 멀리 떨어진 것만을 다루었다는 저자의 반성은 일정 부분 스스로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 노대원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신문방송학 전공, 동대학원 국문학 박사과정 졸업. 대산대학문학상(평론 부문) 수상.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제주대학교 국어교육과 부교수 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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