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31) 심광현, 유진화, 그림의 새로운 시작, 희망읽기

심광현, 유진화, 그림의 새로운 시작, 희망읽기.
심광현, 유진화, 그림의 새로운 시작, 희망읽기.

좋은 전시가 좋은 책이 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통념으로는 전시는 전시고 책은 책이다. 전시가 아무리 좋아도 그 전시를 배경으로 책을 만들면 그저 도록일 수밖에 없다. 전시는 책을 본행사의 기록물로 생각하여 도판을 생생하고 소상하게 싣고 이를 텍스트로 해석하는 방식에 익숙해져있다. 그러니 출판 전문가들이나 독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도록은 그저 전시의 부산물일 수밖에 없고, 한 번 쓰윽 넘겨보고 나면 다시 볼 일이 없는 두꺼운 물건으로 남고 만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전시의 도록을 넘어서 좋은 책을 염두에 두고 잘 짜여진 구성을 갖추고 있다. 

이 책 <그림의 새로운 시작: 문명 전환과 다성적, 민중적 리얼리즘의 감각과 서사>는 자연과 사회와 개인을 각각의 구성체로 보고 그 구성체에 대한 예술적 성찰을 둘러싼 창작과 이론과 비평의 관계를 살펴본다. 그것은 같은 제목의 전시와 동행한다. 이 전시 <그림의 새로운 시작 문명 전환과 민중의 다성적 리얼리즘 감각하기>(삼육빌딩, 2022.3.16.-3.29.)는 감성적 리얼리즘과 민중적 리얼리즘의 어긋난 궤적에 대한 회고와 성찰을 바탕으로 문명 전환의 시점에 맞는 새로운 그림의 시작점을 찾아보고자 한 전시이다. 

이 전시는 자연과 사회와 개인이라는 세 주체의 문제를 상호 독자적이면서도 유기적인 관계망으로 설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자연구성체의 위기와 관련하여 최진욱 김경주 류연복 이명복 박진화 이종구 심광현 등의 그림에 주목한다. 그것은 자연생태계 위기의 감각과 교감이다. 사회구성체의 위기를 담아낸 작가로는 김영진 김재홍 주재환 임옥상 김천일 박홍순 김정헌 박불똥 이태호 등이 있다. 그것은 인간생태계 위기 속 몸과 마음의 풍경이다. 개인구성체의 위기를 영역에는 박영균 김지원 박은태 민정기 이윤엽 이선일 김태현 신학철 황세준 정정엽 등이 있다. 그것은 사회생태계 위기의 역사지리적 풍경이다. 

이들 출품 작가들이 출품한 작품들을 통하여 기획자이자 저자인 심광현은 자연과 사회의 관계, 사회와 개인의 관계 그리고 개인과 자연의 관계에 관해 상호 유기적인 성찰을 모색한다. 1980년대부터 활동한 민중미술가이거나 민중미술의 후예들이다. 이들의 작품은 아날로그 그림이다. 미술 분야에서도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한 NFT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메타버스 등으로 디지털 문명과 대면하는 창작과 매개 행위가 활성화하고 있다. 이 전시는 디지털혁신에 밀려나는 아날로그 그림이 문명전환의 이 시점에 인지생태학적 디딤돌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제안을 펼치고 있다. 

심광현은 디지털혁신의 시대에 그림의 새로운 시작을 선언한다. 그의 선언은 이분법을 넘어서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1980년대 민중미술 운동에 몸담았던 그는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미술의 고유성과 삶의 현장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는 일이다. 민중적 리얼리즘과 다중적 리얼리즘의 간극은 당시로터 지금까지 언제나 존재해온 것인데, 지금이야 그 색이 조금 옅어졌다고는 하지만 한때는 진영 논리로까지 번져 팽팽하게 대립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을 넘어서는 21세기의 전략은 그림에 대한 혁신적인 인식의 전환으로부터 출발한다. 

길은 두 갈래이다. 하나는 그림에 대한 코페르니구스적인 인식 전환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상품화와 사물화 전략에 따른 지각의 사물화 과정을 극복하고 그림의 기호학적이고 지각생태학적인 특성에 대한 미학적 해명을 추구하는 일이다. 또 하나는 인간의 몸과 뇌에 잠재한 다중지능 네트워크를 활동화하여 인공지능 자본주의 맞서고, 사회적 뇌를 매개로 다중지능 네트워크를 개발하는 정치사회적 전략이다. 90년대의 감성적 리얼리즘과 80년대의 민중적 리얼리즘의 인식론적 대립을 넘어서 서사와 회화, 그림과 이야기의 새로운 만남을 통하여 다성적-민중적 리얼리즘 미학을 정립하고 나아가 오늘의 문명 전환의 새로운 주체 형성의 마중물로 삼자는 것이다. 

이 전시를 기획하고 책을 쓴 심광현은 1980년대부터 미술평론과 전시기획으로 민중미술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 교수로서 <문화/과학> 편입인으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저서와 논문을 발표했다. 공동저자인 유진화는 심광현과의 협업으로 이미 <인간혁명에서 사회혁명까지>(2020)과 <대중의 철학이 된 영화>(2021) 등의 공동저서를 낸 바 있다. 심광현과 유진화의 전시와 책은 1980년대로부터 2020년대로까지 이어지는 40년의 한국 현대사 맥락 속에서 미학과 문학을 근본으로 출발하여 치열하게 문화와 예술을 탐색해온 이론가이자 실천가의 새로운 도전이자 모험이다. 그들의 정신적 탐색을 담은 이 책은 그래서 더욱 깊은 내공으로 이 시대 예술 지형에 깊은 울림을 준다.  

# 김준기

홍익대학교 예술학 석사, 미술학 박사.
현(現)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한국큐레이터협회 회장, 미술평론가.
전(前) 부산비엔날레 전시기획 팀장,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제주도립미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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