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70) 먹어 볼 것 없는 제사에 절한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려 지금을 말한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 또한 없지 않은가. 옛 선조들의 차고술금의 지혜를 제주어와 제주속담에서 찾는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들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지혜가 담겼다. 교육자 출신의 문필가 동보 김길웅 선생의 글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 깃든 차고술금과 촌철살인을 제주어로 함께 느껴보시기 바란다. [편집자 글]

머거볼 거 엇인 식깨에 절ᄒᆞᆫ다(먹어 볼 것 없는 제사에 절한다)

* 엇인 : 없는
* 식깨 : 제사(祭祀)

제사가 파제(罷祭)하면 제사 음식을, 곧 반기를 나눠 먹는데 그것을 ‘음복(飮福)’이라 한다. 신위 전에 올렸던 음식을 먹으면 복이 된다는 의미다. 조상의 덕을 기리며 제주도 곁들인다. 분향으로 시작한 제 의식이 끝나려면 파제를 해야만 한다. 

파제를 한자로 ‘罷祭’라고 마칠 파 자를 쓰는 것은 절차상 그런 뜻을 지닌다. 마칠 파 자, ‘학교가 파하고 하굣길에 섰다.’처럼 끝나다 혹은 마치다는 뜻을 지닌다. 제사를 마친다고 할 만큼 파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한데 제사상에 별반 음식을 올리지 않고 제사를 지냈다면 말이 영 다르다. 파제 시간이 자정을 넘었는데 그 시간까지 기다려 먹어볼 게 아무것도 없다니. 이럴 수가 있는가. 그게 어떻게 보면 사람 사는 세상의 한 풍경일 수도 있다. 누가 제사 음식을 만들어 조상 전에 올릴 줄 모르나. 하도 궁핍해 제주를 장만하지 못해 그런 것이지. “조상 앞이 물 ᄒᆞᆫ 긱 거려놓을 돈이 잇어사주기(조상 앞에 물 한 모금 떠 놓을 돈이 있어야지.)”라 한 푸념이 그냥 해본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잘 사는 집 제사야 넉넉하게 떡이며 산적(散炙)이며 생선이며 과일에 이르기까지 제사상 다리가 부러지게 올려 잔칫집을 방불케 하기도 한다. 그런 집 제삿날엔 동네방네 사람들이 소위 ‘제사를 먹는다.’ 고 했다.

물만 떠놓는 제사가 있으랴만 그럴 수도 있는 게 세상살이라고 생각하는 여유도 덕행이라고 여길 수 있다면, 참으로 대인다운 풍모 아닐까.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물만 떠놓는 제사가 있으랴만 그럴 수도 있는 게 세상살이라고 생각하는 여유도 덕행이라고 여길 수 있다면, 참으로 대인다운 풍모 아닐까.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하지만 없는 집에선 꿈같은 얘기일 뿐, 그게 가능한 일인가. 아주 못 살던 시절엔 떡은 고사하고 뫼하고 갱 그릇이나 올렸던 집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돈 없는 집 설움이 그에 이르렀으니 고르지 못한 게 세상이다.

한 집안에 극빈해 끼를 잇기가 어려웠던 할아버지뻘 되는 어른이 있었다. 남의 밭을 세 내어 근근이 입에 풀칠을 했다. 일고여덟 분의 제관이 제사에 가 파제했다. 그 집 형편을 잘 아는 친척 제관들이 자리를 뜨려 하자 팔을 벌리며 “안된다. 그냥들 자리에 앉아 있어라.” 하더니, 밤과 국을 차려 놓는 게 아닌가. 

가만 보니, 밥이 곤밥(산도쌀밥)이 아니었다. ‘피밥’이었다. 옛날 아주 먼 산전(山田)을 일궈 재배하던 좁쌀 같은 색깔이 흰 서속인 피. 이제 그런 곡식은 찾아볼 수조차 없다. 메말라 풀기가 없고 거칠던 것. 파제하며 피밥을 음복히던 장면이 떠올라 혼자 씁쓰레 웃는다.

살다 보면 풍성한 것만을 대할까. ‘머거볼 거 어신 식께에 가 절해야 하는’ 경우도 당하는 게 세상사 아닌가. 이익만 얻으려면 욕심이 지나쳐 무리가 생긴다. 가득 채워지지 않더라도 그러려니 해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도 아무나 행할 수 없는 미덕일 것이다.

‘먹어볼 거 어신 식깨에 절ᄒᆞᆫ다’

물만 떠놓는 제사가 있으랴만 그럴 수도 있는 게 세상살이라고 생각하는 여유도 덕행이라고 여길 수 있다면, 참으로 대인다운 풍모 아닐까.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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