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호의 짧은 글, 긴 생각] 일흔 아홉 번째

시간이 지날수록 제주다움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제주출신의 공학자, 이문호 전북대학교 초빙교수가 '제주의소리' 독자들과 만난다. 제주다움과 고향에 대한 깊은 성찰까지 필자의 제언을 ‘짧은 글, 긴 생각’ 코너를 통해 만나본다. / 편집자 주

윤석열 당선인은 집무실을 청와대로 안가고 용산으로 간다고 한다. 그의 말 중에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했다. 세간에는 ‘풍수가 윤의 의식을 지배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계룡산(鷄龍山) 자락에 논산은 파평 윤 씨의 본향, 한양의 용산(龍山)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현 엄중한 시국보다 더 중한 게 용산인가? 우선, 풍수 이야기를 해보자.

1. KBS 주말 사극 ‘이방원’에 나온 2차 왕자의 난 주역 이방간 이야기, 회안대군 묘맥(墓脈)에 뜸(灸穴)

순천완주고속도로에서 전주에서 남원방향으로 가는 고속도로 입구(금상동)에 회안대군의 묘가 있다. 전주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보면, 회안대군(懷安大君)[1364~1421]의 무덤을 보면 묘가 있는 산은 쥐(鼠)의 형상이고, 그 산 앞에는 고양이(猫) 형상의 바위가 있어 쥐가 내려오지 못하는데 그곳이 대대로 왕이 나올 명당(明堂)자리였다. 회안대군이 죽자 지관을 불러 무덤 쓸 자리를 택했는데 이곳에 무덤을 쓰게 되었다. 태종 이방원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라 두려워하던 신하들에게 지관(地官)은 화약을 사용해 산맥의 모습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그곳의 뒷동산, 철봉대 등을 화약으로 다 무너뜨려 지금 지형으로 바뀌었다. 「산맥(山脈)을 뜬 회안대군(懷安大君) 묘」다.

조금 더 들어가 보자.
이성계와 신의왕후 안변한씨 사이에는 진안대군 방우, 영안대군 방과, 익안대군 방의, 회안대군 방간, 정안대군 방원, 덕안대군 방연 등 여섯 아들이 있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을 통해 방원은 이복동생 방번·방석과 정도전 등 정적들을 제거하였다. 태조는 아들들의 골육상쟁에 몹시 상심하여 왕위를 방과(정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정종은 경복궁의 풍수가 좋지 않아 골육상쟁이 일어났다는 신하들의 말을 믿고 개경으로 천도하였다. 한편 방원 못지않은 야심을 가졌던 방간은 동생에 대해서 시기심과 불만을 가졌다.

마침 1차 왕자의 난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가진 박포가 방원이 장차 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 밀고하였다. 이 말을 믿은 방간은 곧 사병을 동원하여 방원을 공격하였다. 개성시내에서 두 형제간에 시가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방간은 방원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방간과 박포는 체포되어, 박포는 처형하고 방간은 유배되었다. 방원은 이를 계기로 제3대 태종에 올랐고, 한양으로 재천도하였다.

방간이 처음 유배되어 안치 된 곳은 황해도 토산. 태종 이방원은 형을 석방하려 했지만 신하들은 오히려 사형을 청하였다. 태종은 동복형까지 죽이고 싶지 않았다. 대신 유배지를 바꾸었다. 경기도 안산, 전라도 익산과 순천 등 계속 유배지를 전전하였다. 태종은 방간을 다시 한양으로 소환하려 했지만 신료들의 반대하였다. 이에 방간은 스스로 본관지인 전주로 내려갈 것을 청하여 허락받았다. 그리고 동용진면(현 전주 전북대 인근 덕진구 금상동)에서 20년을 살았다. 이씨조선 시조이한(李翰) 왕능과는 지척지간(咫尺之間)이다.

그 사이 태종은 1418년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가 과거를 회상하니 귀양살이 하는 형이 그리워졌다. 그래서 형에게 한양으로 올라올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회안대군은 거절하고 전주에서 계속 살았다. 태종이 재차 간청하자 와병중임에도 상경하다 홍주군 논산은진에서 사망(57세)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은 슬픔을 금치 못하여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그리고 지관을 보내 명당을 찾아 묘를 쓰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용맥에 뜸을 떴다. 후탈을 막기 위해서다. 이곳의 조종산인 태조산은 호남정맥 상에 있는 만덕산(765.5m)이며, 중조산은 묵방산(527.4m), 소조산은 두리봉(434.9m)이다. 용(龍, 山脈))이 내려오면서 점차 순해지는 것은 물론 그 변화가 활발하다. 혈의 크기는 용의 변화 정도에 따라 정해진다. 변화가 활발한 용에서 대혈을 맺는다. 이곳을 대대로 군왕이 날 자리라고 한 것도 용(龍) 때문이다. 더구나 용이 마지막 힘을 모으기 위해서 끝을 잘록하게 묶었다. 이를 결인속기(結咽束氣)라고 하는데 이곳을 잘라 뜸을 뜬 것이다. 지금은 결인속기처 뒤 현무봉을 순천완주고속도로가 터널로 지나며 맥을 또 끊었다.

청와대 전경과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 앞으로 차량이 지나가는 모습. 사진=오마이뉴스 권우성-유성호.
청와대 전경과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 앞으로 차량이 지나가는 모습. 사진=오마이뉴스 권우성-유성호.

2. 청와대와 용산

언젠가부터 풍수지리상 청와대의 입지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계속 떠돌았다. 풍수상으로 볼 때 청와대·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해발 342m). 북악산 밑(지금의 청와대)에는 고려의 3경 중 하나인 남경의 궁궐이 있었다. 풍수지리와 도참사상이 성행했던 그 당시 북악산 밑은 길지로 평가됐다. 술사 김위제는 “중경(개경)과 서경(평양), 남경(서울)에 도읍지를 세우고 1년에 4개월씩 머물면 36국이 고려에 조회하러 올 것”이라 예언했다.

북악산-경복궁-광화문 라인은 백두산의 정기를 서울에 불어넣는 용의 목과 머리에 해당된다. 그런데 일제는 용의 입에 해당하는 경복궁 근정전 바로 앞에 총독 집무실(구 국립박물관)을 조성했고, 목에 해당되는 회맹단터에 총독관저(청와대)를 지었다는 것. 집무실을 지은 3·5대(1919~1927, 1929~1931)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는 1936년 2·26사건으로 비참하게 피살된다. 1937~39년 사이 지금의 청와대 터에 관사를 지은 7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1936~1942)는 2차대전 후 전범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해방 이후 들어선 대한민국 정부의 대통령들의 뒤끝도 그리 좋지 않았다. 박정희: 총격사망, 전두환, 노태우:감옥행, 김영삼:외환위기 불명예, 김대중:홍3 게이트 구속, 노무현:자살, 이명박:감옥행, 박근혜: 탄핵, 구속, 심지어 청와대 터에다 조선총독 관저를 지었던 일본도 6년 뒤에 패망.

3. 용산은 천하의 길지인가?

풍수학자인 지종학의 <풍수지리(프로방스, 2015)>에서는 용산이 풍수상 엄청난 길지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즉, 주산인 남산(해발 271m)이 용산(해발 79m)을 병풍처럼 둘러주고, 남산에서 둔지산(해발 65m, 48m)까지 용맥이 훌륭하며, 남산에서 시작된 능선이 크게 좌청룡·우백호를 형성하고, 한강~관악산이 어우러져 뛰어난 풍관을 이룬다. 또 지세가 넓고 평탄하며 한강물이 풍부하다고 한다. 북악산이 외면했고, 산의 계곡에 있어 맥이 없으며, 좌청룡(낙산)은 허약하고, 우백호(인왕산)은 끊어졌으며, 물줄기가 원활하지 않은 청와대와는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이다. 용산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하는 것이 천재일우의 기회이므로 이 기회에 청와대를 용산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용산의 역사를 보자.

몽고 침공 시: 일본정벌을 위한병참기지설치
한양 천도 후: 군수를 담당하는 군자감(軍資監)
임진왜란 때: 왜군의 후방 병참기지
병자호란 때: 청나라군대 진영설치
임오군란 때: 청나라군 주둔
청일전쟁 후: 일본군 주둔
6.25후: 미군기지
현재: 대한민국의 품

4. 신수(神手) 윤, 악수(惡手) 조

신평 변호사는 6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조국 사태 때 물러났다면 지금처럼 가족들이 수난을 당하기는커녕, 당선인 신분이 됐을 것이라며 인간적 연민을 나타냈다.

신 변호사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조 교수(전 법무부 장관)는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부인은 지금 영어의 몸이 됐고 금쪽같은 딸이 의전원 입학취소의 날벼락을 맞았다"며 "지금 조 교수는 살아도 살지 않은 것이요,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의 불 한가운데서 몸 전체가 타고 있는 셈이다"고 안타까워 했다. 이어 "변명 같지만 내 생각으로는 조 교수가 그때 내 말에 따라 자숙의 자세를 보이며 장관 후보직에서 물러났더라면 지금 그는 우리 앞에 대통령당선인으로 서 있을 것이라고 본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랬다면) 윤석열 당선인은 성공한 검찰총장으로 마감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재명 경기지사는 막강한 조직력을 갖춘 강성친문의 위세와 협박에 눌려 감히 대통령직 도전을 선언하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그렇게 보는 이유로 들었다. 조국이 법무장관을 맡은 악수(惡手)와, 윤석열이 검찰총장을 중도에서 그만 둔 신수(神手)가 정국을 가르는 분수령인 셈. 승자가 된 윤 당선인이 용산 집무실을 고집하는 이유는 9수 만에 사시를 패스한 끈기와 집념 때문인가. 아니면 계룡산 (鷄龍山)자락에 논산은 파평 윤씨에 본향, 한양의 용산(龍山) 때문인가?

서울대 법대 전경. 사진=서울대학교.
서울대 법대 전경. 사진=서울대학교.

조국(서울대 법대 1986년 입학, 미 버클리대 박사, 사시나 행시 경력 없음)은 "윤석열(서울대  법학과 1980년 입학, 사시 1991년 9수 합격) 검찰은 사모펀드 건으로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잡아넣지 못했지만, 자식의 인턴 체험 활동을 문제 삼아 끌어내렸고 그 배우자를 잡아넣었다. 그 결과 자식의 입학은 취소됐고 그 수사 덕분에 윤석열 검찰총장이 일약 대권주자로 자리 잡은 것"이라며 "제 가족 전체의 도륙을 도모하는 기획과 그에 따른 대단한 정치적 성공"이라고 주장했다.

‘이방원’에 2차 왕자의 난 주역 이방간 회안대군은 죽은 후에 묘맥(墓脈)에 뜸(灸穴)을 당했고, 조국은 부인이 지금 영어의 몸, 금쪽같은 딸 또한 부산대의전원과 고대 입학취소의 날벼락을 맞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권력에 승자와 패자는 천당과 지옥 두 길 만이 있는 셈인가.

그러나, 조국을 윤 당선자의 법무부 장관에 파격적으로 발탁한다면 화합의 정치가 될 것이 아닌가? 통 큰 정치가 필요한 때이다.

# 이문호

이문호 교수는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출신 전기통신 기술사(1980)로 일본 동경대 전자과(1990), 전남대 전기과(1984)에서 공학박사를 각각 받고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서 포스트닥(1985) 과정을 밟았다. 이후 캐나다 Concordia대학, 호주 울릉공- RMIT대학, 독일 뮌헨,하노버-아흔대학 등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1970년대는 제주 남양 MBC 송신소장을 역임했고 1980년부터 전북대 전자공학부 교수,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며 세계최초 Jacket 행렬을 발견했다. 2007년 이달의 과학자상, 과학기술훈장 도약장, 해동 정보통신 학술대상, 한국통신학회, 대한전자공학회 논문상, 2013년 제주-전북도 문화상(학술)을 수상했고 2015년 국가연구개발 100선선정, 2018년 한국공학교육학회 논문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제주문화의 원형(原型)과 정낭(錠木) 관련 이동통신 DNA코드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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