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호의 짧은 글, 긴 생각] 일흔 아홉 번째

시간이 지날수록 제주다움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제주출신의 공학자, 이문호 전북대학교 초빙교수가 '제주의소리' 독자들과 만난다. 제주다움과 고향에 대한 깊은 성찰까지 필자의 제언을 ‘짧은 글, 긴 생각’ 코너를 통해 만나본다. / 편집자 주

웃드르 서광, 옛 이름 광챙이는 조선 말 민란의 중심지였다. 강제검(1862)은 민중 1만여 명 제주시성안으로 몰려가 부패관리 처단을 주장했고, 방성칠(1898)은 당시 제주 지역은 서울에서 파견된 세리(稅吏)의 지나친 조세 수탈로 대단히 고단했던 농민들의 삶을 못 참고 민란을 주도했다. 지금은 녹차밭과 신화공원, 영어교육 도시 마을 광챙이가 있다. 서광에는 넙게(246m, 廣蟹, Crab 모양)오름과 남송이 오름(비취, 飛鷲, 남소로기. Flying Eagle, 날아가는 독수리 형태)이 있는데, 1890년대까지는 넙게 오름의 기(氣)를 받아 관전밭(구 안덕면 소재지)과 넙게물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넙게 오름 정상과 오름 줄기에 큰물통은 주민들이 식용수로 충분했고 오름 발 토지가 비옥해서 당시에 주민들이 주거지였다. 또한 제주목사와 대정 인성리에 대정현을 잇는 길목이기도 했으며 6.25때인 1951년도에는 육군하사관학교(학교장 대위 김기석 전북 군산출신)가 있었던 터이다.

1890년 이후 관전(官田)밭에서 닭텅애(금계포란, 金鷄抱卵形, 금닭이 알을 품는 형국) 형태의 서광마을로 옮긴 주민들은 남소로기 오름(339m)의 기(氣)를 받아 이름도 광청(廣靑)리, 광청리는 신화공원, 오설록, 영어교육도시(구억리와 인접)를 품고 있다.

사진=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 포스터. ⓒ쇼박스

1. 제주의 임술민란(강제검난)-지배층 수탈에 ‘민중 봉기’ 주도…농민들 평등사상 일깨워

1862년 9월 12일 대정현 화전민이 과다한 화전세 시정을 요구하며 농민들의 저항운동이 시작됐다. 강제검, 현재득 등의 주동으로 10월 6일부터 며칠간 제주 삼읍의 민중 1만여 명은 패랭이를 쓰고 성안으로 몰려 들어가 평소에 증오의 대상이던 ‘부패관리 5인’의 처단을 주장했다.

강제검[姜悌儉:?~1863(철종14), 철종 때 제주 민란의 주모자. 안덕면 서광(옛 光淸) 사람.] 1862년(철종13) 가을부터 세 차례에 걸쳐 농민들의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안으로 섬 특유의 경제적 수탈과 밖으로 임술민란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사건이다. 강제검이 주도한 임술봉기壬戌蜂起는 진주 농민투쟁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이로써 농민들의 평등사상에 눈을 뜨게 하였다. 앞서 지배계층이 수탈에 저항하여 학정虐政에 반기反旗를 들었다는 의미에서 역사적이 의의가 크다. 같은 해 9월 12일 제1차 봉기는 대정현 화전민이 과다한 화전세를 시정하는 데 있었고 주동자는 대정현 자단自丹(현 德修)리의 조만송趙萬松이었다. 같은 날에 화전민이 감색監色의 처소로 몰려가 뇌물로 받아둔 재물과 화전세 납부 문서를 불태우고 색리를 구타하였다. 또 9월 13일에는 답험감관踏驗監官의 집을 때려 부수었다. 9월 15일 아침에 성문이 열리자 색리色吏(말단 향리)와 이방(吏房)의 집을 부수고 재물을 꺼내어 짓밟았다.

이때 1000여 명이나 되는 봉기 민중은 제주목사 임헌대(任憲大)가 모든 폐단을 제거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해산하였다. 제2차 봉기는 강제검(姜悌儉), 현재득(玄才得서귀) 등의 주동으로 10월 6일부터 며칠간 계속됐다. 제주 삼읍의 민중 1만여 명은 패랭이를 쓰고 성안으로 몰려 들어가 부패관리의 죄를 들추어내는가 하면 평소에 증오의 대상이던 부호의 집을 부수거나 불태우고, 혹은 그 재물을 빼앗기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하였다. 한편, 제주항과 서귀포에 정박 중이던 내륙 상인의 교역 선박을 습격하여 그 재물을 빼앗고 불태웠다. 그러나 도민을 괴롭혀 오던 대표급 부패관리 5인을 직접 타살하려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목사가 대신 그들을 법에 따라 처형하겠다는 확답을 받은 뒤 흩어져 돌아갔다. 제3차 봉기는 11월 15일부터 12월 9일까지 계속되었다. 강제검, 김흥채(金興彩봉개리), 박흥열(朴興悅소길리), 조만송 등을 주동자로 한 군중의 수는 제2차 봉기 때의 2배를 넘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 이들 군중은 15, 16일 성 밖에서 부호의 집을 부수거나 불태우면서, 목사의 회유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17일 오후에는 남쪽 성안으로 밀고 들어가 아직까지 다섯 죄인(부패 관리 5인)을 처형하지 않았음을 성토하면서 관아를 점거하니, 목사는 겁에 질려 화북포로 피신하였다가 이 달 25일에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봉기군은 12월 9일까지 모든 행정을 마음대로 처결하였다. 이때 군중이 부패관리 5인을 처단했으며, 집을 부수거나 불태운 것이 141호, 재물의 손실이 수만 냥에 이르러 임술민란의 대표 급에 속하는 농민 운동이었다. 이 봉기는 안핵사 이건필(李建弼)에 의해 다음해 4월에 완전히 수습되었는데, 처리 상황은 관리측이 제주목사 임헌대의 함경도 귀양을 비롯한 17인이 벌을 받고, 민중측이 강제검, 김흥채의 효수를 비롯한 22인이었다.1863년(철종14) 2월 29일 제주방어사 정기원(鄭岐源)은 난민의 최고 주모자 강제검을 효수하여 이를 보고하였다. 또 조만송(趙萬松덕수리)도 피살되었다. 

서광서리(전 광챙이). 사진=이정우 선생 제공.

2. 1898년 제주민란, 일명 ‘방성칠의 난’ : 세리(稅吏)의 조세 수탈, 농민들의 핍박

1898년 제주민란은 일명 ‘방성칠의 난’. 제주 지역은 서울에서 파견된 세리(稅吏)의 지나친 조세 수탈로 농민들의 삶은 대단히 고단하였다. 세리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1898년 2월 7일 방성칠을 지도자로 하여 광청리 일대 화전민 수백 명이 제주성 내의 관아에 몰려가 화전세·목장세 및 호포의 과다징수와 환곡의 폐단을 바로 잡아 달라는 소장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당시 제주목사이던 이병휘는 민심이 두려워 받아들이는 척 하면서 장두인 방성칠을 잡아들일 궁리만 하였다. 제주목사는 위장된 술수로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며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에 방성칠과 화전민들은 크게 분노하여 각 마을에 통문을 돌려 집집마다 장정 1명씩 모아 일전을 불사하는 대오를 정비하여 3월 1일 주성 안으로 쳐들어가 인부(印符)를 빼앗고, 목사와 대정군수 채구석을 구타하여 성 밖으로 내쫓았다. 이들은 머리에 백건(白巾)과 황전립(黃氈笠)을 쓰고 몽둥이로 무장, “남(南)”이란 글자를 몸에 붙이고 활동하였다. 1898년 3월 2일 민란 지도부는 관청 앞에 “제주·대정·정의 3군수를 내쫓고, 환곡 부담을 절반으로 줄인다”는 방문(方文)을 내걸어 민란의 성공을 알렸다. 그러나 남학당 중심의 민란 지도부와 일반 농민간의 결속력의 약화, 그리고 전 현감이었던 송두옥(宋斗玉) 등이 일으킨 창의군(倡義軍)에 민란군의 좌·우대장이었던 김낙영(金洛榮)이 회유당하여 난은 실패로 끝났다. 조정에서는 이 일로 제주찰리사에 박용원(朴用元)을 파견하여 사건을 수습케 하였다. 이 민란은 3년 후에 발생하는 신축민란 즉 이재수의 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방성칠의 본관은 남양(南陽). 본명은 방진두(房鎭斗), 일명 방갑(房甲)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성칠(聲七)은 자이고, 호는 능헌(菱軒)이다. 방성칠은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에서 살던 남학(南學) 간부였다. 남학은 동학과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후천개벽을 주장하는 신흥종교였는데, 1894년 동학혁명이 발생하자 남학교도들도 호응하였다가, 관군의 탄압을 받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 때 방성칠을 비롯한 일부 남학교도들이 제주도에 들어와 화전지대인 대정현 광청리[현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에 거주하며 화전을 일구고 남학을 포교하며 살았다. 원래 방성칠은 처음에는 소장(訴狀)을 제출하는 대표자로 나섰을 뿐이었지만, 목사가 그를 잡아 가두려 하자, 남학교도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민란을 주도하였다. 목사를 내쫒은 다음에는 아예 중앙정부와 관계를 끊고, 정감록 예언에 따른 국가건설을 추진하였다. 그의 이러한 구상은 제주도를 중앙 정부와 분리시키겠다는 구상이었지만, 또 다른 왕조를 건설하는 복고적인 것이었고, 이 구상에는 일본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농민들과의 거리도 벌어져 민란이 실패하게 되었다. 방성칠은 주성을 점령한지 7일 만에 애월읍 귀일(貴日)리에서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3. 1898년 방성칠의 난 당시 김대욱을 조수리 영군장으로 임명하는 전령

1898년 제주 방성칠(房星七)의 난에 얽힌 문서가 발굴됐다. 제주시 한경면 주민자치위원회는 최근 발간된 '한경면 생활문화지'(2019)를 통해 이를 공개했다. 조수1리 향토관이 소장한 해당 고문서는 민란을 진압하기 위해 만든 제주창의소(濟州倡義所)가 발급한 ‘영군장 임명 전령’이다. 한지에 쓰여진 이 전령에는 "1898년 무술년 2월에 제주창의소에서 조수리 김대욱(金大旭)을 조수리 영군장으로 임명하니 가벼이 여기지 말고 임무를 수행하라"는 내용이 담겼다. 

여기서 무술년은 제1차 제주민란으로도 불리는 방성칠의 난이 일어났던 해다. ‘방성칠의 난’은 1898년 2월 장두 방성칠과 당시 대정군 중면 광청리(光淸里) 주민 수백여 명이 제주목 관아에 몰려가 가혹한 세제 징수의 시정 등을 요구하는 소장(訴狀)을 제출한 것을 계기로 민란으로 확산됐다. 방성칠이 이끄는 부대는 애월읍 귀일리에서 토벌군에게 궤멸되고 방성칠도 4월 4일에 처단되면서 민란이 평정된다. 

오설록, 항공우주박물관-신화공원과 남소로기 오름, 사진=박성경.

4. 넙게 물의 비밀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웃드르 마을 광챙이(光淸里)를 광청리(廣靑里)로 부르기 시작했다. 못 살던 마을에서 넓게 펼쳐진 곶자왈 속 푸른마을 광청리(廣靑里)로 거듭났다. 광청리에 생기(生氣)동산의 너럭바위에는 옛 동산물이 광챙이 진부동 설촌(設村 약1500년?)역사와 넙게 오름의 정상에 물통 근처에서 기와장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탐라국이나 고려 시대부터 절을 지은 흔적인 절왓으로 추정되어 오랜 세월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고촌(古村)으로 봐진다.

넙게 물의 전설하나는 “흙비 내린다. 장항(醬缸Soybean Paste Pot) 두껑 닫으라”는 말. 넙게물 통 자리에는 토굴이 있었고 깊은 굴 (窟Cave)에는 인도 탐몰라주(耽沒羅洲, ‘몰’ 자와 ‘주’ 자가 탈락되면서 ‘耽羅’. 발타라(跋陀羅, Bhadra)존자가 BC563-483년경에 900명의 제자와 같이 탐라에 온 사람들이 탐라 곳곳에 흩어져살았는데, 넙게토굴에도 인도인들이 살았고 고려 중기경에 넙게물통을 팔 때 인도인들이 했던 말이 아닐까 한다. 근거는 법주기(法住記: 7세기 중엽 당나라의 학승현장이 번역한 팔만대장경) 및 1918년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 보면, 인도 성인들이 인도영취산과 같은 탐라의 오름에 물을 찾았을 터. 넙게 오름도 영취산처럼 비슷하고 넙게 물도 깊다. 

1969년 9월 제주제일고에서 같이 근무한 김찬흡, 『제주사인명사전』(제주문화원, 2002)사전을 참조했다. 감사드린다. 이글은 [이문호, 트래픽 1위 평화로 노형 다랑곶과 서광남송이, 어원은?, 제주의소리 2021. 12. 03.]의 후편이다.

서광리 옛이름은 자단리, 1898년까지 광청(光淸)리, 광무2년 1898년에 동광, 서광, 광평리로 분리되면서, 광청(廣淸)으로 개명됐다. 광청리는 넓고 물이 나고 깨끗한 곳이란 뜻. 본 글에서는 광청을 광청(廣靑)으로 표기했다. 이유는 광청(廣淸)리 하면 넓고 물이 많이 나는 곳인데, 샘물이 안 나는 중산간마을, 그렇지만 푸른 녹차밭과 곶자왈이 우거져 광청(廣靑)으로 표기했다. 

# 이문호

이문호 교수는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출신 전기통신 기술사(1980)로 일본 동경대 전자과(1990), 전남대 전기과(1984)에서 공학박사를 각각 받고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서 포스트닥(1985) 과정을 밟았다. 이후 캐나다 Concordia대학, 호주 울릉공- RMIT대학, 독일 뮌헨,하노버-아흔대학 등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1970년대는 제주 남양 MBC 송신소장을 역임했고 1980년부터 전북대 전자공학부 교수,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며 세계최초 Jacket 행렬을 발견했다. 2007년 이달의 과학자상, 과학기술훈장 도약장, 해동 정보통신 학술대상, 한국통신학회, 대한전자공학회 논문상, 2013년 제주-전북도 문화상(학술)을 수상했고 2015년 국가연구개발 100선선정, 2018년 한국공학교육학회 논문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제주문화의 원형(原型)과 정낭(錠木) 관련 이동통신 DNA코드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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