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홍의 세상사는 이야기] (92)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도보여행을 시작한 장일홍 극작가. 사진 촬영지는 애월읍 하귀2리 가문동 해안.ⓒ제주의소리
도보여행을 시작한 장일홍 극작가. 사진 촬영지는 애월읍 하귀2리 가문동 해안.ⓒ제주의소리

부초처럼 떠도는 삶,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일상, 그것이 지금 나의 생의 일차적 목표이다. 2022년 4월 28일, 바람따라 구름따라 유랑하는 집시처럼 배낭 하나 짊어지고 도일주 도보여행을 떠난다. 용두암에서 출발, 해안선을 따라 제주섬을 한 바퀴 도는 대장정(?)이다. 동행이 없는 순례이지만 당장 가지 않으면 영원히 못 간다는 절박감으로 길을 나선다.

수년 동안 미루고 미루다가 마침내 떠나기로 결심했는데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도보여행이 될 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가지고 출발한다. 오래 전 작성한 버킷리스트(걷기 관련)에는 산티아고 순례길, 히말라야 트레킹, 도일주 도보여행 세 가지가 있지만 히말라야 트레킹은 무리이고 도 일주가 끝나면 산티아고만 남는데 기약할 수 없는 여정이다.

이번 도보여행의 직접적 계기는 최근에 있었던 막내 아들 요한이와 나의 여친 제니(Jenny)의 죽음이다. 요한이는 간경화로 37살에 세상을 떴다. 임종 직전 중환자실로 찾아갔을 때, 손이 꿈틀대는 걸 잡아주지 못하고, 십자가를 목에 걸어주지 못한 게 아직도 한으로 남아 있다.

올해 59세인 제니는 자가면역결핍증으로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할리우드 영화 ‘러브 스토리’와 ‘포레스트 검프’의 여주인공 이름도 제니인데 둘 다 병으로 요절한다. 제니는 40년 전, 같은 직장에서 근무한 인연으로 대화가 통하던 유일한 여친이었다.

제니는 내 마음의 플랫폼이었다. 구제주에 갈 땐 자주 중앙로 지하상가 제니의 가게에 들렀다. 이제 정거장을 잃어버린 외롭고 지친 몸을 어디서 쉬어야 하나? 중앙로에만 가면 이리 두리번 저리 두리번 길 잃은 철새가 된다.

언젠가 제니가 “개마고원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통일이 되면 꼭 나랑 함께 가자고 한 적이 있지만 지금쯤 그녀의 영혼이 새가 되어 훨훨 개마고원의 창공을 누비고 있을 것이다.

사진 제공=제주올레.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사진 제공=제주올레.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두 죽음을 목격하면서, 특히 자식을 앞세운 참척의 슬픔과 상실의 아픔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부모는 땅에,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요한이를 내 가슴 속 깊은 웅덩이에 묻었다. 아들이 생각날 때마다 웅덩이를 헤집고 나직이 속삭인다.

“요한아, 임종 시에 내가 한 말 기억하지? 병상세례를 받았으니 넌 천국에 갈 거야. 먼저 가서 자리 잡아 둬. 아버지도 곧 뒤따라 갈게. 천국에서 만나자.”

산소호흡기를 입에 물린 아들은 대답 대신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 저의 간을 떼어내서 아들을 살려주세요! 제게 남은 영생을 다 넘겨줄 테니 요한이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세요!

간신히 버티던 백열등의 필라멘트가 툭 끊어지듯 생명의 불꽃이 꺼지고 아들은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아들이 떠난 뒤, 얼마 동안은 곡비처럼 시도때도 없이 울었다. 어느 날, 다시 웅덩이를 열었다.

“요한아, 이젠 울지 않을게. 널 보내줄게. 그러니 너도 날 놔 줘. 내 걱정은 하지 마. 외로워도 슬퍼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테니까.”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돕는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에 아들의 이름으로 매달 후원금을 보냈는데, 해지하지 않고 그 후원을 계속하고 있는 건 아들의 영혼이 지상과 연결될 수 있는 끈 하나쯤은 남겨두고 싶기 때문이다. “아들아, 저 하늘에서도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렴.”

나는 이렇게 자위한다. ‘하나님이 요한이와 제니를 사랑했기 때문에 일찍 부르신 것이다.’ ‘상처가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나를 키울 것이다.’ 

이번 도보여행은 이 압도적인 허무와 쓰라린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치유여행’이다. 그리고 자식을 사랑으로 훈육하지 아니한 죄,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치장한 간음죄 등 온갖 죄와 허물을 회개하는 ‘참회여행’이다.

제주도의 해안선 길이는 253km(도 일주 도로는 181km)이니 하루에 10km씩 걸어도 25일이 소요되고 넉넉잡아 한 달이다. 중도에 귀가하지 않고 여행 삼아 끝까지 걷기로 했다.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걷는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자유인이 되어 휘파람 불며 발가락에 피멍이 들 때까지 걷고 또 걸을 것이다.

한숨짓고 눈물지으며 칠십 년 동안 끊임없이 걸어온 고단한 생의 종말을 향하여……. / 장일홍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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