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85) 토미야마 카즈미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우산혁명으로 알려진 홍콩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 네 지역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의 평화예술운동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네 나라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 국적에 따른 언어가 제각각 달라 영어 일어 중국어 번역 원고도 함께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오키나와 복귀 50주년 기념식」이 열린 행사장 인근 도로에서  ‘기시다(수상)는 돌아가라’는 문구가 적힌 손피켓을 들고 항의하는 오키나와 시민들. 2022년 5월 15일, 오키나와 기노완시.
「오키나와 복귀 50주년 기념식」이 열린 행사장 인근 도로에서 ‘기시다(수상)는 돌아가라’는 문구가 적힌 손피켓을 들고 항의하는 오키나와 시민들. 2022년 5월 15일, 오키나와 기노완시.

1972년 5월 15일 미국은 1945년 이래 27년간 점령해 온 오키나와의 시정권을 일본에 반환했다. 이날은 일본 측에서 보면 패전으로 잃은 섬들을 전쟁의 승자로부터 평화롭게 되돌려 자국으로 복귀시키는 데 성공한 반가운 기념일인 셈이다. 2022년 5월 15일, 일본 정부와 오키나와현은 공동으로 「오키나와 복귀 50주년 기념식」을 오키나와와 도쿄에서 동시 개최했는데, 기시다 수상은 오키나와 기념식장에 참석했다.

그러나 식장 정면 앞 교차로에서는 기시다 총리에게 항의하는 사람들이 집결해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키나와현경찰 외에 규슈 각지에서 동원된 경찰관과 기동대원들이 그 앞을 가로막고 경비를 서고 있었다. 상당수는 20, 30대의 비교적 젊은 경찰관이다. 그들이 오키나와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는지 모르지만 오키나와 주민들이 항의하는 모습은 아마도 묘해 보였을 것이다. 오키나와 스스로 미국 지배에서 벗어나 '조국'인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강력히 바라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50년 뒤인 지금 그것을 축하하는 행사에 이렇게 반대 시위를 하느냐고. 일본 정부는 미국과 끈질기게 교섭해 오키나와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느냐고.

미국이 오키나와 지배자로 등장한 것은 1945년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일 최후의 결전장이 된 오키나와에서 주민 12만명 이상이 사망하고 살아남은 자는 미군정 아래로 들어갔다. 일본 본토도 패전 후 연합국이 점령에 나섰지만, 전쟁 책임자로서 재판을 받지 않은 천황 히로히토는 1947년 미일 양국의 이익을 위해 미국의 오키나와 점령 지속을 연합국 측에 제안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일본은 강화조약 발효로 1952년에 주권을 회복했는데, 그것은 오키나와의 시정권을 미국에 양도하는 것과 한 세트였던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동서 냉전 체제에서 ‘오키나와라고 하는 극동의 거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더욱이 오키나와를 시정권 하에 두더라도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국 국민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인권이나 민주적인 절차를 고려하지 않아도 됐다. 사유지의 강제 접수는 물론 주민들은 기지를 지탱하는 노동력으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소비재로서, 미국의 마음대로 오키나와의 기지 기능을 강화할 수 있는 이런 땅은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다. 미일 안전보장조약에 근거해 일본 본토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도 속속 오키나와로 이주했다.

오키나와 주민들이 일본 복귀운동을 시작한 것은 미국의 가혹한 군사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면서였다. 오키나와에 있어서 전후 일본은 동경하는 땅이 되고 있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과거 군국주의 일본이 깊은 반성을 바탕으로 전쟁 포기, 군비 및 교전권 부인 일체의 전쟁을 포기하는 새 헌법을 가진 평화국가로 재생했다고 믿었다. 더욱이 기적의 경제 부흥을 이룬 선진국이기도 했다. 그래서 오키나와를 구하는 것은 일본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전후 일본의 발전은 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하는 것, 특히 오키나와를 내놓음으로써 안전보장 비용을 최소화하고 경제발전에 주력한 결과이기도 했다. 평화국가 일본은 오키나와의 군사화로 이뤄진 모순에 찬 것이었다.

「오키나와 복귀 50주년 기념식」이 열린 행사장 인근 도로에 기념식 항의집회 참석자들을 제지하기 위한 임시 가드레일이 세워졌다. 2022년 5월 15일, 오키나와 기노완시.
「오키나와 복귀 50주년 기념식」이 열린 행사장 인근 도로에 기념식 항의집회 참석자들을 제지하기 위한 임시 가드레일이 세워졌다. 2022년 5월 15일, 오키나와 기노완시.

당초 미국은 기지 기능의 유지와 시정권의 유지는 분리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민들의 일본 복귀 운동을 탄압했다. 하지만 베트남전이 상황을 바꿨다. 베트남 출격 거점이 된 오키나와는 현지에서 악마의 섬으로 불렸다. 오키나와전에서 그토록 유린당한 자신들이 미군기지를 유지함으로써 전쟁의 악에 가담하고 있다는 인식은 오키나와 민중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을 반대하고 비관하는 세계적인 흐름은 오키나와의 반기지, 반미 감정을 활기차게 만들었고, 그것은 미군에 있어서 기지 운용에 지장을 초래할 리스크가 되었다. 더욱이 미국은 오키나와 기지 유지 비용을 고민할 정도로 재정적으로 곤궁했고 일본 정부도 오키나와 반환에 대한 본토 여론을 무시할 수 없게 됐던 것이다. 결국 미일은 미국의 오키나와 기지 자유 사용을 전제로 오키나와의 시정권을 일본에 반환한다는 방침으로 걸음을 옮긴다. 1972년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는 군사지배로부터의 오키나와 주민 해방이 아니라 미일동맹 재편 강화를 위해 성취된 것이다. 기지 없는 평화로운 섬이라는 주민들의 바람이 짓밟힌 이날이 어찌 축하의 날일 수 있겠는가.

플래카드에 적힌 문구, '왜 축하?', 2022년 5월 15일, 오키나와 기노완시.

50년 전인 5월 15일에도 복귀 기념식장과 인접한 공원에서 폭우 속에서 1만 명이 모인 가운데 현민대회(도민대회)가 개최됐다. 우리 현민은 지난 오키나와전에서 전쟁의 잔학성과 비참한 체험으로부터 전쟁을 부정하고 핵도 기지도 없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오키나와현 실현을 목표로 삼아 미일 정부에 강력히 요구해왔다. 일본 군국주의가 오키나와를 거점으로 침략체제를 굳히기 위한 굴욕적, 반국민적인 오키나와 반환 내용을 규탄하고 항의하는 동시에 일체의 군사기지를 철거하고 안보폐기를 통한 완전 복귀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결의했다.

일체의 군사기지 철거 등 꿈같은 이야기라고 비웃을까. 사실 오키나와 반환이 극동에서 미군의 위상 감소와 일본의 재무장화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아시아 국가들은 많았다. 미군의 오키나와 주둔은 이들 국가의 안전보장에도 역시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군대는 주민을 지키기는커녕 죽이는 것에 불과하다는 명제는 오키나와 주민이 오키나와전의 처참한 체험을 통해 그야말로 피로 속죄해 얻은 것이다.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오키나와에 자기희생을 강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지금 대만 위기와 한반도 긴장을 명목으로 미일에 의한 오키나와의 군사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여기서 보듯 동아시아에 평화가 오지 않는 한 오키나와의 해방 또한 이뤄질 수 없다. 해방이란 평화의 다른 이름이다. 위기에 처한 현재이기에 동아시아 친구들에게 평화연대를 당부하고 싶다.

# 토미야마 카즈미

토미야마 카즈미(豊見山和美 TOMIYAMA Kazumi) 씨는 도쿄 소재 추오대학교와 류큐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영국 런던대학교 아카이브연구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오키나와현립공문서관의 아키비스트로 일하면서, 오키나와 전후사를 중심으로 문화평론을 하고 있습니다.


 東アジアの平和と沖縄の解放—沖縄の日本再併合の日に思う
豊見山和美

1972年5月15日、アメリカは1945年以来27年間にわたって占領してきた沖縄の施政権を日本に返還した。この日は、日本側からすれば、敗戦によって失った島々を、戦争の勝者から平和裡に取り返し、自国に「復帰」させることに成功した喜ばしい記念日というわけだ。2022年5月15日、日本政府と沖縄県は共同で「沖縄復帰50周年記念式典」を沖縄と東京の会場で同時開催し、岸田首相は沖縄会場に出席した。

しかし、式典会場の正面ゲート前の交差点では、岸田首相に抗議する人々が集結してその到着を待ち構えていた。沖縄県警の他に、九州各地から動員された警察官や機動隊員がその前に立ちはだかって警備にあたっていた。その多くは20代か30代の比較的若い警察官だ。彼らが沖縄の歴史についてどれほどの知識を持っているかわからないが、沖縄住民の抗議する姿はおそらく奇妙なものに見えたであろう。沖縄自身がアメリカ支配から脱して「祖国」である日本に戻りたいと強く願っていたではないのか、なのになぜ50年後の今、それを祝賀する行事にこれほど反対するのかと。日本政府はアメリカと粘り強く交渉して、沖縄人の願いを叶えてやったではないかと。

アメリカが沖縄の支配者として登場したのは1945年のことだ。第二次世界大戦で日米最後の決戦場となった沖縄で、住民の十二万人以上が死亡し、生き残った者は米軍政下に入った。日本本土も敗戦後は連合国の占領に服したが、戦争責任者として裁かれることのなかった天皇裕仁は、1947年に日米両国の利益のためとしてアメリカの沖縄占領継続を連合国側に提案さえしていた。実際、日本は講和条約発効により1952年に主権を回復したが、それは沖縄の施政権をアメリカに譲り渡すこととワンセットだったのである。

アメリカにとって、東西冷戦体制における沖縄という極東の拠点は絶対的に必要だった。さらに、沖縄を施政権下に置いても、沖縄住民はアメリカ国民ではないから、その人権や民主的な手続きを考慮せずともよかった。私有地の強制接収はもちろんのこと、住民は基地を支える労働力として便利に使用できる消費財として、自由勝手に基地機能を強化することができる、こんな土地は他にどこにもなかっただろう。日米安全保障条約に基づいて日本本土に駐留していた米軍も、続々と沖縄に移駐した。

沖縄住民が日本への復帰運動を始めたのは、アメリカの過酷な軍事支配からの解放を求めてのことだった。沖縄にとって戦後日本は憧れの地となっていた。沖縄住民は、かつての軍国主義日本が、深い反省に基づいて、戦争放棄、軍備及び交戦権の否認一切の戦争を放棄する新しい憲法をもつ平和国家に再生したと信じた。さらに奇跡の経済復興を成し遂げた先進国でもあった。沖縄を救うのは日本しかないと考えたのである。しかし実際のところ、戦後日本の発展は、アメリカに軍事基地を提供すること、特に沖縄を差し出すことで安全保障のコストを最小化し、経済発展に注力した結果でもあった。「平和国家」日本は、沖縄の軍事化によって成り立つという矛盾に満ちたものだった。

当初、アメリカは基地機能の維持と施政権の保持は切り離せないものと考えていたから、住民の日本復帰運動を弾圧した。しかし、ベトナム戦争が状況を変えていく。ベトナムへの出撃拠点となった沖縄は、現地で「悪魔の島」と呼ばれていた。沖縄戦であれほど蹂躙された自分たちが米軍基地を維持することで戦争の悪に加担しているという認識は、沖縄の民衆運動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世界的な反戦・厭戦の潮流は沖縄の「反基地」「反米」感情を活気づけ、それは米軍にとって、基地の運用に支障をもたらすリスクとなった。さらにアメリカは沖縄基地の維持コストに悩むほど財政的に困窮し、日本政府も沖縄返還に対する本土の世論を無視できなくなっていた。日米は、アメリカの沖縄基地自由使用を前提に、沖縄の施政権を日本に返還するという道筋に歩を進める。1972年の沖縄の日本復帰は、軍事支配からの沖縄住民の解放ではなく、日米同盟の再編強化のために成就したものだ。「基地のない平和な島」という住民の願いが踏みにじられたこの日が、どうして祝賀の日でありえるだろう。

50年前の五月十五日も、復帰記念式典会場に隣接する公園で抗議の県民大会が開催され、大雨の中を一万人が集まった。「我々県民は、去る沖縄戦で戦争の残虐性と悲惨な体験から、戦争を否定し『核も基地もない平和で豊かな沖縄県』の実現をめざしてたたかい、日米政府に強く要求してきた」「日本軍国主義が沖縄を拠点に侵略体制を固めるための屈辱的、反国民的な沖縄返還の内容を糾弾し、抗議すると共に、一切の軍事基地を撤去し、安保廃棄による完全復帰を要求するものである」との決議を採択した。

「一切の軍事基地を撤去する」ことなど夢物語だと笑われるだろうか。事実、沖縄返還が極東における米軍のプレゼンスの減少や日本の再武装化につながることを懸念したアジア諸国は多かった。米軍の沖縄駐留は、それらの国々の安全保障にとってもまた不可欠だったのだ。しかし、軍隊は住民を守るどころか殺すものでしかないという命題は、沖縄住民が沖縄戦の凄惨な体験を通して、まさに血で贖って得たものである。東アジアの平和のために沖縄に自己犠牲を強いる権利は誰にもない。今、台湾危機や韓半島の緊張を名目に、日米による沖縄の軍事化が加速している。これを見てもわかるように、東アジアに平和が訪れない限り、沖縄の解放もまた実現できない。解放とは平和の別名だ。危機にある現在だからこそ、東アジアの友人たちに平和連帯を呼びかけたい。

写真1  プラカードに「岸田は帰れ」 2022年5月15日 沖縄・宜野湾市
写真2 デモ隊の前に到着した機動隊車両 2022年5月15日 沖縄・宜野湾市
写真3 抗議者が集まれないよう歩道に立てた柵 2022年5月15日 沖縄・宜野湾市
写真4 プラカードに「なぜ祝う」 2022年5月15日 沖縄・宜野湾市


Peace in East Asia and the Liberation of Okinawa - Thoughts on the Day of the Re-annexation of Okinawa to Japan
TOMIYAMA Kazumi

On 15 May 1972, the US returned to Japan the administrative rights over Okinawa, which it had occupied for 27 years since 1945. From the Japanese perspective, this day marks the joyous anniversary of the successful 'reversion' of the islands lost in the war to their country, peacefully reclaimed from the victors of the war. On 15 May 2022, the Japanese Government and Okinawa Prefecture jointly organised a ceremony to commemorate the 50th anniversary of the reversion of Okinawa to Japan, which was held simultaneously in Okinawa and Tokyo. Prime Minister KISHIDA attended the Okinawa venue.

However, at the intersection in front of the main gate of the ceremony site, protesters against Prime Minister Kishida had gathered and were awaiting his arrival. In addition to the Okinawa Prefectural Police, police officers and riot police mobilised from all over Kyushu stood in front of them. Most of them were relatively young police officers in their 20s or 30s. I don't know how much knowledge they have of Okinawa's history, but the protests of the Okinawans probably seemed strange to them. Why, they wondered, fifty years ago, Okinawa itself had a strong desire to escape US rule and return to its 'homeland', Japan, so why is there so much opposition to events celebrating this now?

The US emerged as the ruler of Okinawa in 1945. Okinawa was the site of the last decisive battle between Japan and the US in World War II, in which more than 120,000 of its inhabitants died and those who survived fell under US military rule. The Japanese mainland was also occupied by the Allies after the defeat, but Emperor Hirohito, who was never tried as a war criminal, even suggested to the Allies in 1947 that the US occupation of Okinawa should continue for the benefit of both the US and Japan. In fact, Japan restored its sovereignty in 1952 when the Peace Treaty came into force, but only after handing over the administration of Okinawa to the US.

For the US, a Far Eastern base in Okinawa was absolutely necessary in the Cold War system. Furthermore, even if Okinawa was placed under US control, the residents of Okinawa were not US citizens, so there was no need to take their human rights or democratic procedures into account. As well as the compulsory seizure of private land, the residents were free to enhance the base's functions at will as consumer goods that could be conveniently used as labour to support the base, as there would have been no other such land anywhere else. US forces stationed in mainland Japan under the US-Japan Security Treaty were also relocated to Okinawa one after another.

It was in search of freedom from the harsh military rule of the US that the residents of Okinawa began campaigning for their return to Japan. For Okinawa, post-war Japan had become a place of longing. Okinawans believed that the former militarist Japan had been reborn as a peaceful country with a new constitution based on deep reflection, renouncing war, armaments and the right of belligerency. It was also a developed country that had achieved a miraculous economic recovery. Okinawans believed that Japan was the only country that could save them. In reality, however, Japan's post-war development was also the result of minimising security costs and focusing on economic development by providing military bases to the US, especially by dedicating Okinawa. Japan, the 'peaceful nation', was a contradiction in terms, as it was founded on the militarisation of Okinawa.

Initially, the US suppressed the residents' movement to return to Japan, as it considered the maintenance of base functions and the retention of administrative authority to be inseparable. However, the Vietnam War changed the situation. Okinawa, the base for the sortie to Vietnam, was called by Vietnamese as 'Devil's Island'. The perception that they, who had been so overrun in the Battle of Okinawa, were complicit in the evils of the war by maintaining the US military bases, had a major impact on the people’s movement in Okinawa. The global anti-war and pessimistic trend energised 'anti-base' and 'anti-US' sentiment in Okinawa, which became a risk for the US military, as it interfered with the base's operations. Furthermore, the US was financially strapped with the cost of maintaining bases in Okinawa, and the Japanese Government could no longer ignore public opinion on the mainland in favour of the reversion of Okinawa. Japan and the US are taking steps on the path of returning Okinawa's administrative rights to Japan on the basis of the free use of US bases on Okinawa. The return of Okinawa to Japan in 1972 was not about liberating the Okinawan people from military rule, but about realigning and strengthening the US-Japan alliance. How can this day be a day of celebration when the people's wish for a 'peaceful island without bases' has been trampled upon?

On 15 May, 50 years ago, a protest was held in a park adjacent to the site of the reversion ceremony, where 10,000 people gathered in heavy rain. The resolutions was adopted “We, having experienced the atrocities and tragedy of the war in the Battle of Okinawa, have fought for the realisation of a 'peaceful and prosperous Okinawa Prefecture without nuclear weapons and bases, and have strongly demanded that the Japanese and US governments,” “It denounces and protests the humiliating and hostile return of Okinawa to Japan, which is aimed at consolidating a system of invasion regime by Japanese militarism based in Okinawa, and demands the removal of all military bases and the complete reversion of Okinawa through the abolition of the Security Treaty.” 

Would you laugh at the idea of "getting rid of all military bases" as a pipe dream? In fact, many Asian countries were concerned that the return of Okinawa would lead to a reduced US military presence in the Far East and the re-militarisation of Japan. The presence of US forces in Okinawa was also vital to the security of those countries. However, the proposition that the military does not protect the population, but only kills it, is one that Okinawans have redeemed with their very blood through the horrific experience of the Battle of Okinawa. No one has the right to force Okinawa to sacrifice itself for the sake of peace in East Asia. Now, under the guise of the Taiwan crisis and tensions on the Korean Peninsula, the militarisation of Okinawa by the US and Japan is accelerating. As this shows, unless there is peace in East Asia, the liberation of Okinawa will also not be possible. Liberation is another name for peace. It is precisely because we are in a time of crisis that I would like to call on our friends in East Asia for peace and solidarity.

Photo 1: Placard reads 'Kishida must go home' 15 May 2022, Ginowan, Okinawa, Japan
Photo 2: Riot police vehicles arrive in front of the protesters, Ginowan, Okinawa, 15 May 2022.
Photo 3: A fence erected on the sidewalk to prevent protesters from gathering, Ginowan, Okinawa, 15 May 2022.
Photo 4: Placard reading 'Why celebrate?', Ginowan, Okinawa, 15 May 2022.

※ 중국어 번역본 원고는 추후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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