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40) 존 스튜어트 밀, 서병훈 역, 공리주의, 책세상, 2018.

사진=알라딘.
사진=알라딘.

이번에 소개할 책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의 ‘공리주의’라는 책이다. 우선 책이 두껍지 않아서 부담이 덜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고전’에 속하는 책들은 대부분 두꺼운 데 반해, 이 책은 좀 만만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과 사상은 그리 가볍지 않다.

‘공리주의’에서 ‘공리’는 ‘고통 제거’와 ‘쾌락 증진’으로 구성된다. 이 때 고통과 쾌락은 다수의 고통과 다수의 쾌락을 말한다.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와 쾌락이야말로 바람직한 목적이 된다는 것이 공리주의의 핵심 명제다. 쾌락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공리주의가 주장하는 쾌락은 다수의 쾌락이며 매우 좋은 의미이다. 

밀은 ‘공리주의’ 책에서 공리주의에 대한 오해와 비판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했다. ‘공리주의’ 제1장 ‘머리말’에 밀이 이 책을 쓴 이유가 나온다. 밀은 사람들이 공리주의의 의미에 대해 잘 모르기에 공리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봤고, 이 책을 통해 공리주의를 둘러싼 오해를 풀고자 했다. 

공리주의에 대한 오해와 해명

밀이 보기에, 공리주의의 비판자들은 ‘공리주의’를 잘 모르면서 공리주의를 흠집 내는 데만 몰두한다. 밀의 해명은 ‘공리주의’ 제2장에 나오는데, 여기서 밀은 공리주의가 ① 쾌락주의라는 비판, ② 이기주의라는 비판, ③ 덕(德)의 중요성을 무시한다는 오해, ④ 무신론(無神論)이라는 오해를 하나씩 해명해 나간다. 

필자가 보기에,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제5장’에 있다. 밀은 제5장 ‘정의는 효용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서 공리주의에 대한 가장 큰 비판점을 다뤘다. ⑤ 공리주의의 비판자들은 효용에다 편의(expediency)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과 원리를 손쉽게 대비함으로써 비도덕적인 이론이라고 부당하게 낙인찍는다. 이에 대해, 밀은 정의와 효용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정의란 사회 전체 차원에서 사회적 효용이 아주 높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강력한 구속력을 지닌다고 보았다.

철학이 시작된 이래, 효용이나 행복이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된다는 이론에 대해 가장 강력한 반대를 제기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정의(justice)에 관한 생각이다. ... 정의와 편의 사이의 차이가 그저 가상의 구분에 불과한 것인가? 정의가 정책(policy)보다 더 신성한 것이며, 후자는 전자가 충족되고 나서야 관심을 기울여 볼 만한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것은 오랜 착각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 나는 효용에 기반을 두지 않은 채 정의에 관한 가상의 기준을 제시하는 모든 이론을 반박하는 한편, 효용에 바탕을 둔 정의가 모든 도덕성의 중요한 부분이 되고, 그 어떤 것보다 더 신성하고 구속력도 강하다고 생각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공리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利’에 초점을 두고 이를 부정적인 의미로 파악했다. 정의를 다룰 때 ‘이익’을 따지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오해는 (밀이 지적하듯이) 옳고 그름에 관한 공리주의적 판단 기준이 행위자 자신뿐 아니라 관련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리주의의 기준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밀에 따르면, (동일한 종류에 대해 적절한 대우를 함으로써) 정도라는 측면에서 평등하다고 상정되는 한 사람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행복과 정확하게 동등한 무게를 지니지 않으면, 이 원리는 아무런 이성적 의미가 없는 단어에 불과하게 된다. 

다수의 행복에 공리의 기준이 있다는 점을 확인한다면,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은 그 초점을 잃는다. 필자는 功利主義보다는 公利主義가 공리주의의 적절한 한자어라고 생각한다. 公利主義에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내용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공리 제도주의

밀은 ‘공리주의’를 저술하기도 했지만, ‘자유론’을 저술하기도 했다. 또한 그 당시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위해 ‘여성의 종속’을 썼다. 흔히들 공리주의는 ‘소수자의 권리 보호’에 미흡하다고 비판하지만, 이는 밀의 공리주의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소수의 문제’가 부각될 때에는 ‘소수의 문제’를 잘 해결하는 이론이 필요한 데 반해, ‘다수의 문제’가 주된 주제일 때에는 ‘다수의 문제’를 적절히 다룰 설명이 필요하다.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지향하고 다수의 公利를 다룬다는 점에서, ‘다수의 문제’를 다루는 최적의 이론이라고 생각된다.  

필자의 생각에 따르면, ‘현대 자본주의’에 의해 ‘다수의 문제’가 부각된다는 점은 공리주의가 현대 정의론에서 각광을 받을 수 있는 주된 배경이 된다. 이는 공리주의가 태동했던 시기와 맥락을 같이 한다. 벤담은 영국 귀족 계급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든 법과 제도를 공리주의를 통해 타파하려 했다.  

오늘날 다수를 지배하는 계급이 귀족계급에서 자본가계급으로 바뀌었을 뿐, 현대 자본주의는 ‘소수 대 다수’의 구조라는 점에서 이전 계급사회와 유사하다. 이 점에서 공리주의는 이 시대에 진보적인 이론으로 다시 부각될 수 있다.

윤리학(도덕학)의 관점에서는 공리주의보다 나은 사상이 엄청 많지만, 제도론의 관점에서는 공리주의가 탁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밀은 (‘공리주의’ 제3장과 제4장에서 주장하듯) 윤리나 도덕의 관점에서도 ‘공리주의’를 옹호하나, 필자는 제도론의 관점에서 ‘공리주의’를 중시하는 편이다. 밀의 ‘제도 공리주의(制度 公利主義)’의 측면은 다음 문장에 잘 나와 있다. 

모든 개인의 행복 또는 (보다 실감나게 현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익이 전체의 이익과 가능하면 최대한 조화를 이루도록 법과 사회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나가며 

19세기 이전의 사상사는 자연법론과 법실증주의의 대립의 역사였던 반면에, 19세기 이후의 사상사는 여러 다양한 가치관들이 대립하는 역사이다. 절대적 정의가 빛을 비춘다고 믿었던 시대는 지났고, 여러 정의론(正義論)이 공존하는 시대가 되었다.

공리주의뿐만 아니라 자유지상주의, 평등지향적 자유주의, 공동체주의, 공화주의 등이 오늘날 무엇이 정의로운가를 다툰다. ‘공리주의’는 여러 가치관(價値觀)으로부터 비판받았는데, 밀의 ‘공리주의’를 살펴보면 그런 비판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최소한 필자의 관점에서는 그렇다. 

밀의 ‘공리주의’와 더불어 밀의 ‘자유론’, ‘여성의 종속’ 등을 함께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래야 ‘자유와 공리의 연합’을 주장하면서 소수자의 권리를 대면하는 밀의 다면적(多面的)인 사상을 알게 된다. 필자는 밀의 사상이 우리 시대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단초가 제공되리라 생각한다. 


# 고봉진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고려대 법학과 졸업,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법학박사.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법철학/법사회학 전공).

블로그: blog.naver.com/gojuraph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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