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대한민국연극제 제주 유치 기념 토론회...“내년을 제주연극 발전 기회로”

21일 열린 ‘2023 대한민국연극제 제주 유치기념 토론회’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제주의소리
21일 열린 ‘2023 대한민국연극제 제주 유치기념 토론회’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제주의소리

“제주공립극단에 매년 2억을 지원할테니, 2억을 벌어올 수 있겠느냐.”

20년 가까이 지났지만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당시 제주도지사의 반문. 마이크 앞에 선 원로 연극인은 예술을 그저 경제 활동의 도구로 취급한 지도자의 참담한 예술관을 꼬집으며, 내년 제주에서 열릴 전국 연극 행사 '대한민국연극제 본선 대회'를 마중물 삼아 도립극단의 출범과 제주 연극의 도약을 당부했다.  

제주연극협회는 21일 오후 3시 30분부터 제주문학관 대강당에서 ‘2023 대한민국연극제 제주 유치기념 학술 토론회-대한민국연극제, 예술 창작의 마중물이 되다’를 개최했다.

토론회는 내년 제주에서 대한민국연극제 본선 행사가 개최될 예정인 가운데, 이를 계기로 현재 제주 연극의 현주소를 짚고 제주도립극단 설립을 포함한 발전 방안을 모색하는 취지로 마련됐다. 손정우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김경익 사무총장을 비롯한 협회 이사진들도 참석했다.

대한민국연극제는 (사)한국연극협회가 매해 진행하는 전국 경연대회다. 16개 시·도 예선 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은 연극 작품들을 한 지역에 모은다. 동시에 다양한 연극 작품과 부대행사들을 병행하는 국내에서 가장 큰 연극 행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40회를 맞는 올해는 경남 밀양에서 열리며, 내년 41회는 제주에서 열린다. 1992년, 2001년 이후 세 번째다.

토론회에서 발제자 강용준 극작가는 냉정하게 제주 연극의 현실을 살폈고 발전 과제를 조언했다. 송시경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본부장은 대한민국연극제 개선 방안을 발표했다.

토론자 김석범 제주축제산업진흥원장은 제주도립극단에 대한 의견을 전했고, 황헌중 강원도립극단 공연부장은 강원도립극단 창단 배경과 운영 사례를 발표했다.

#  같은 자리 맴도는 제주연극

강용준 극작가. ⓒ제주의소리
강용준 극작가. ⓒ제주의소리

강용준 극작가는 평소처럼 거침없이 직언을 쏟아냈다.

강용준 극작가는 “제주에 극단은 많지만 연기자는 많이 부족하다. 지원금을 받는 행사에만 일 년에 한두 편 공연하거나 아예 공연을 오래 하지 못한 극단도 있다”며 “재능이 있는 학생도 서울이나 타 시도로 전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연극 전문 학원이 있어도 결국 서울로 빠진다. 지역에서는 그만큼 무대에 설 기회가 적다”고 밝혔다.

특히 “오래된 극단은 연기자들이 고참이라고 붙박이로 공연에 참가해 공연 수준이 나아지지 않는다”면서 “또한, 기본이 안 된 작품에 늘 같은 연출과 작업을 하니 관객들에게 외면을 당하면서, 지원금이 나오기 때문에 덜 익는 작품도 무대에 올린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공연 올리기에 급급하니 변화가 있을 리 없고 발전이 없다”고 꼬집었다.

여기에 “해외 유명작이나 국내 유명 작가의 작품을 찾아낼 여유도 능력도 갖추지 못하고 매너리즘에 빠진다. 신진 극작가의 작품이 무대에 오를 기회도, 신인 연출가의 출현 기회도 그만큼 적어진다”며 “결국 전문성이 부족한 사람들끼리 평가 받을 기회도 없으니 제주 연극은 늘 제자리걸음”이라고 악순환을 지적했다.

# 냉정한 평가, 보다 넓은 행정 지원  

강용준 극작가는 제주 연극을 위한 제도적 발전 방안으로 ▲고등학교에 연극과 개설 ▲중장기 연극 아카데미 개설 ▲지원 방법 개선 ▲지원 확대 등을 꼽았다.

특히 지원 방법 개선에 대해서는 “도내 극단의 지원이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데, 기회의 형평성 측면이 간과되고 있다. 매년 여러 경로로 지원받는 극단은 경력이 축적되면서 모든 지원사업에서 우위를 점한다. 지원을 받지 못해 일 년에 한편도 공연을 못하는 극단은 활동 이력이 부족해 매번 기준에 못 미쳐 탈락하는 경우도 있다”고 상세히 소개했다.

강용준 극작가는 “제주문화예술재단은 지원하는데 그치지 말고, 사후 공연에 대한 평가를 냉정하고 차후 지원에 반영해야 한다. 지속적인 지원의 횟수를 제한해서 많은 극단들이 혜택을 볼 수 있게 해야 하다”고 개선을 촉구했다.

현재 3곳(설문대여성문화센터, 서귀포예술의전당, 김정문화회관)에 불과한 상주단체 지원도 제주문예회관, 제주아트센터를 비롯해 가능하면 한라아트홀(운영 주체 : 제주한라대학교), 제주학생문화원(제주도교육청) 등으로 늘려 더 많은 극단들에게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등이 나서서 연습 공간을 확보하고, 시설 소극장에 대한 행·재정적 지원과 전세금 일부 보조 등 환경적 인프라 구축을 당부했다.  

토론회 참석자들. ⓒ제주의소리
토론회 참석자들. ⓒ제주의소리

# 무지한 예술 인식, 이제는 없어야

강용준 극작가는 제주도립극단 설립에 있어 아픈 기억을 끄집어냈다. 

본인이 위원장으로 ‘총대’를 맨 제주시립극단 추진위원회가 1996년 12월 3일 발족됐지만, 도지사 선거 캠프에 있던 제주대학교 모 인사가 오페라단 창단으로 맞불을 놨다. 결국 도지사는 오페라단을 선택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도지사가 바뀌어 제주공립극단 창단을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연 2억을 지원해 줄테니, 2억원을 벌어올 수 있느냐”였다.

강용준 극작가는 “문화 예술에 대한 투자를 경제 논리로 이해하는 도백과는 더 이상 대화가 되지 않았다. 제주에 살면서 이런 도지사를 가졌다는 게 창피해서 타 시·도 연극인들에게는 말도 못했다”고 참담했던 심경을 곱씹었다.

강용준 극작가는 국내 공립 극단 사례를 나열하며 ‘기획단’ 형태의 제주도립극단을 제안했다. 단기 계약 중심으로 꾸준한 내부 평가를 도입하는 것이 골자다.

제주도립극단 설립으로 인한 장점은 ▲우수한 인재 영입 ▲상시 공연 가능 ▲콘텐츠 축적 가능 ▲시간적·경제적 비효율성 개선 ▲안정적인 연극인 수입과 경쟁으로 기량 연마 ▲예술 장르 간 균형 발전 등이다.

강용준 극작가는 “제주도가 문화예술의 섬을 지향하면서 아직까지 공연예술의 총체인 연극을 도외시하고, 도립극단이 설치되지 않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도립극단 창단을 위해 협회는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이 필요하고, 제주도지사의 결심을 얻어내는 일이 급선무”라고 현실적인 조언을 남겼다.

토론회 모습. ⓒ제주의소리
토론회 모습. ⓒ제주의소리

# 도립극단 타당성은 유효, 도정 설득 필요

김석범 원장과 황헌중 부장은 각자의 위치에서 도립극단 문제를 바라봤다.  

김석범 원장은 “2018년 제주도립극단 설립 계획이 제주도 학술용역심의위원회를 통과했다. 그래서 타당성 검토 용역을 진행하고 2020년 창단하는 수순을 밟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코로나가 터져서 타당성 검토 용역이 무산됐다. 학술용역심의위원회 유효 기간이 2년이라 다시 절차를 받아야 하는데, 지금은 학술용역 단계에서 재정 여건상 어렵다고 말한다”고 지난 과정을 설명했다.

김석범 원장은 “제주에 무용단, 합창단, 관악단, 교향악단이 있지만 살아있는 제주어로 표현할 수 있는 예술 단체는 도립극단이 유일하기에 설립 타당성은 여전히 유효하다”면서 “다가올 2023년 제주에서 열릴 대한민국연극제 본선 대회를 밑바탕으로 삼아 도립극단의 동력을 마련해야 한다. 도지사가 설립을 결단할 수 있도록 각종 근거 자료, 수치, 효과 등을 모아서 제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황헌중 부장은 2014년 독립재단법인으로 출범한 강원도립극단의 현황을 소개했다. 뮤지컬 활동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도민 수요조사를 하면 뮤지컬을 가장 많이 선호한다. 2019년 첫 번째 뮤지컬 작품 ‘메밀꽃 필 무렵’을 올렸는데 강원도 출신 배우를 전체 출연진의 20% 밖에 섭외하지 못했다”고 현장에서 느낀 점을 밝혔다.

더불어 “몇 년 간 꾸준히 뮤지컬 작업을 이어오니 단원들이 느끼는 일종의 거부감은 조금씩 없어졌다. 하지만 늘 숙제이고 부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으로 연극 장르만 고집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도립극단이라면 도민이 원하는 것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송시경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본부장은 “향후 대한민국연극제의 나아갈 방향을 재정립하고, 경제·문화적 효과 연구 등을 포함한 중·장기 실행 방안을 수립해야 한다”면서 “그 위에서 돈과 정책 문제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편, 이어진 질의에서는 제주 정착 원로 연극인 최종원이 마이크를 잡고 “제주 연극인들 간에 화합이 안 되는데 과연 도립극단 상임배우라는 철밥통까지 주면 어떻게 되겠냐. 선배된 입장에서 설득할 자신이 없다. 물러날 때는 물러날 줄 아는 선배답게, 선배들을 존경하는 후배답게 행동하면서 우리가 왜 연극을 하는지 본질을 찾자”고 밝혔다.

변종수 문화놀이터 도채비 대표는 “전국에서 한 팀씩 와서 경연하고 끝나는 똑같은 대한민국연극제 본선 대신 제주에서 새로운 연극인 축제를 시도해보자”고 제안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