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49) 무릉리 이응춘 어르신 이야기 ②

제주에서 낳은 딸 둘과 부산에서 낳은 딸 둘, 결혼 전 혼자였던 이응춘 어르신은 그렇게 딸부잣집의 가장이 되어 무릉으로 내려온다. 무릉1리에 내려와 터를 잡은 집은 조그마한 초가집이었다. 당장 먹고 살 문제가 가장 시급했지만 마음만은 오히려 편안했다. 

“그렇게 제주로 내려온 이후엔 배만 쭉 탔지. 아이들이 있으니까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할 겨를이 있겠어. 모슬포 육촌네가 배 해나서 또 다시 남의 배를 타게 됐어. 집에 당장 내가 책임져야 할 아이들이 있으니까.”

그렇게 성실하게 배를 타면서 제주로 내려와서는 막내아들도 태어났다. 식구가 늘고 어르신의 바다와 함께 살아온 삶이 중첩될수록 바다는 이응춘 어르신에게 마음을 열었다. 다섯 아이들을 먹이며 키우면서도 조금씩 돈이 모여졌다. 돈이 조금씩 모이니 어르신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았던 갈망이 바다수면 위로 떠오르듯 올라왔다.

“내 배를 가져야겠다.”

작은 처남이 도쿄에서 공장장으로 일을 하고 있어 가족들을 두고 다시 타지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으로 가는 바다 위에서 어르신이 결심한 시간은 3년이었다. 도쿄에서 정말 이 악물고 3년만 공장에서 일하고 번 돈으로 내 배를 마련하고 부인도 더 이상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일본에 도착해서 바로 공장으로 들어가 일부러 야간작업을 선택했다. 주간 작업보다는 훨씬 임금을 많이 쳐줬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일본에 돈을 벌기 위해 간 제주 사람들은 어르신과 같이 야간작업을 선택했다고 한다. 

배를 살 돈을 넉넉하게 마련하려 했던 어르신의 조급함 때문이었을까. 일본에 간 지 6개월, 허리가 너무 아파 병원에 가야했다. 그리고 더 이상 공장 일을 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일본 생활을 포기해야 했다. 일본에서 6개월 동안 부지런히 일하며 제주로 보낸 돈은 원하던 배를 사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수소문 해 보니 금능에 목선 하나를 팔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단 목선이라도 필요했다. 뭍에서 일할 때 무리가 갔던 허리는 바다에서는 이상하게도 이상이 없었다. 어르신의 삶은 오히려 바다에서 자유롭고 편안했다. 

어느 날 무릉리의 황덕윤 님이 찾아왔다. 어르신이 배를 워낙 잘 탄다고 소문이 나 있던 터라 배를 사서 같이 해 보자는 제의를 하셨단다. 당연히 목선이 아니었다. 어르신이 마련하고 싶어 했던 목선이 아닌 FRP(섬유강화플라스틱)배였다. 워낙 고가인 배를 어떻게 마련 할 지 고민하던 찰나 배를 살 돈이 다 마련되지 않아도 수협에서 융자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황덕윤 님은 어르신에게 융자를 받으려면 자부담이 40%니 우리가 같이 자부담을 나눠서 마련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어르신은 꿈에 그리던 내 배를 가질 수 있는데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부산에서 내려와 터전으로 잡았던 초가집을 담보로 잡았다. 형님도 선뜻 밭을 담보로 내어주었다. 그렇게 자부담을 마련하고 모슬포수협에 융자를 받았다. 기적처럼 배를 마련할 수 있는 돈이 통장에 모였다.

전라남도 완도 조선소에서 어르신의 배가 뚝딱뚝딱 만들어졌다. 배가 다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받고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겨우 잡고 완도로 올라갔다. 저 멀리서 봐도 나의 배가 어떤 배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이응춘 어르신의 첫 번째 배, 흥남호. 사진=김진경.
이응춘 어르신의 첫 번째 배, 흥남호. 사진=김진경.
이응춘 어르신의 첫 번째 배, 흥남호. 사진=김진경.
이응춘 어르신의 첫 번째 배, 흥남호. 사진=김진경.

‘흥남호’

어르신이 꿈꿔왔던 배였다. 

완도에서 제주로 ‘흥남호’를 타고 오는 날. 어르신은 바다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비록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잃고 외롭게 살았지만 이 바다는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게 해 주었고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주었다. 생각해 보니 바다는 어르신에게 정말 아낌없이 모든 것을 주었던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어르신은 이후 모슬포에 정박한 흥남호를 타며 제주 바다 곳곳을 다녔고 누구보다 바다의 마음과 기분을 잘 알고 있었다. 바다 위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생활하는 것이 뭍에 있는 것보다 더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그리고 바다에서 바라보는 제주는 또 다른 벅참을 주었다. 만선인 배와 함께 모슬포항으로 돌아가면 나의 가족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은 어르신 삶의 이유였고 전부였다.

40대 중반, 이응춘 어르신은 두 번째 배 ‘제2진양호’도 마련했다.

그 배는 따로 선원들을 두지 않았다. 부모도 돈도 아무것도 없었던 어르신에게 시집 온 고마운 아내 분과 단 둘이서만 배를 탔다.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바다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던 어르신에게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고 아이들을 묵묵히 키워 온 부인에게 어르신의 삶을 함께 공유하고 싶었단다. 결혼하고 외로웠을 아내 분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이유도 있었다.

“배가 막 큰 배는 아니었으니까 먼 바당은 못 나가지. 주로 봄에는 우럭, 여름에는 한치, 가을 되면 방어잡이를 했어. 갈치는 큰 배들이 주로 잡는 거고. 옥돔도 먼 바다에 나가야 잘 잡히니까 내 배는 먼 바다는 잘 안 갔지. 큰 배들이 먼 바다에 가지.”

해녀 일을 하다 그만두고 어르신과 함께 부산에 다녀오며 아이들을 낳고 가정을 돌보던 아내 분도 그렇게 다시 바다로 돌아왔다. 아내 분 역시 4살에 부모를 한꺼번에 잃어 누구보다 남편의 외로운 마음을 잘 헤아릴 수 있었다. 두 부부에게 바다는 그들의 부모와도 같았다.

알고 보니 이응춘 어르신은 다금바리를 잘 잡기로 대정지역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다금바리를 잘 잡을 수 있는지 여쭈었다.

“응. 난 다금바리는 정말 잘 잡아. 물때, 그리고 다금바리가 잘 잡히는 동네를 알아야지. 한평생 배를 탔으니 그건 저절로 알아진거고. 주낙*으로 다금바리 잡는 건 선수지 선수.”


*주낙 : 우리나라의 연근해 및 세계 해역에서 사용되는 어로 방식 중의 하나. 하나의 모릿줄(수평으로 길게 뻗친 원줄)에 여러 개의 아릿줄(가짓줄)을 연결하고 그 아래 낚시와 미끼를 달아 어획하는 어업 또는 어구를 말한다. 연승이라고도 한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다금바리는 크면 클수록 좋은 생선인 줄 알았는데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으니 또 그렇지도 않았다고 한다. 37kg까지 잡아봤는데 크기가 크면 생선값이 너무 고가가 되어 오히려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선뜻 나서지 않는다고. 오히려 3~4kg대의 다금바리가 가장 가격을 잘 받았다고 하셨다. 조카 배에서 30kg 정도 나가는 다금바리를 잡은 적도 있었다. 그 다금바리는 故 이건희 회장님이 구입하셔서 모슬포에서 정성으로 아이스박스에 잘 포장해서 공항으로 보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응춘 어르신(오른쪽)과 부인은 단둘이 배를 타며 35년 어부 부부로 사셨다. 사진=김진경.
이응춘 어르신(오른쪽)과 부인은 단둘이 배를 타며 35년 어부 부부로 사셨다. 사진=김진경.
직접 잡은 다금바리 기념 사진. 사진=김진경.
직접 잡은 다금바리 기념 사진. 사진=김진경.

마농지와 김치 정도만 챙겨서 배에 탄다. 그리고 바다 위에서 부부는 새 밥을 짓는다. 갓 잡은 싱싱한 우럭으로 매운탕도 끓인다. 이 맛은 오직 이응춘 어르신 부부 내외만 아는 맛이었다. 배를 타고 나가 있는 동안 6살 정도 되었던 막내아들은 동네 할아버지가 맡아 주셨다. 막내아들은 동네 할아버지를 친할아버지로 알고 있을 정도였다. 부부가 바다에 나가있을 때 마을 사람들이 아이들의 부모가 되어주었다. 이렇게 35년 동안 이응춘 어르신은 부인과 함께 ‘제2진양호’를 탔다.

그렇게 다금바리, 우럭, 한치, 방어를 부인과 잡으며 벌어들인 돈으로 아이들 다섯을 모두 대학에 보냈다. 감귤 농사하는 사람들에게 감귤이 대학나무라면 어르신에게 제2진양호가 대학나무나 다름없었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는 무릉리 어촌계장으로도 활동하셨단다. 제주바다가 어르신에게 포용력이 무엇인지 체득하게 했던 탓일까. 생각보다 해야 할 일도 많고 많은 선주들의 이야기도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역할은 책임감 강했던 어르신의 성품에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울렸다. 어르신도 바다와 이웃들에게 받은 것들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셨단다. 최근까지는 선주협회 이사로 활동도 하셨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어르신에게 정말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이응춘 어르신이 무릉 어촌계장을 역임하고 받은 기념패. 사진=김진경.
이응춘 어르신이 무릉 어촌계장을 역임하고 받은 기념패. 사진=김진경.
이응춘 어르신이 받은 상장들. ⓒ김진경
이응춘 어르신이 받은 상장들. ⓒ김진경

“아니, 어르신 그럼 언제까지 부인분과 그렇게 배를 타신 거에요?”
“나? 저 저번 주 까지 탔지.”
“네? 저 저번 주요?”

올해 81세인 어르신은 80세가 넘어서도 여전히 배를 타고 계셨다. 얼마 전 부인분이 몸이 편찮아지게 되어 당분간 배를 함께 탈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어르신도 더 이상 배를 탈 이유가 없어졌다. 아픈 아내 분을 보니 본인 고집으로 배를 태워서 고생하다 저리 된 건 아닌지 라는 생각도 들어 이젠 더 이상 배를 타지 않겠다고 하셨다.

“81살에 나의 배 인생은 마무리 되었어. 내가 태어나서 지금껏 살면서 배가 나를 살렸다고 할 수 있지. 지금은 배를 안 타려고 하고 있어. 아쉽고 시원섭섭하기도 해. 큰 집을 짓고 있다가 그만 둔 것 같아서 허전도 해. 자고 깨면 나도 모르게 배에 가려고 채비를 하는 순간도 있어. 하지만 내가 배에 가는 건 안사람과 함께 여야 돼.”

제주 바다에서의 이응춘 어르신의 인생 후반전. 

어르신 내외분이 35년간 망망대해 위에서 아이들이 있는 뭍을 향해 바라보며 조업했을 그 심정과 감정들은 나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어르신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보면 몇 번이고 까닭 없이 마음이 울컥해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벅차고 소용돌이치는 감정 속에 한평생 제주바다에서 사셨을 어르신과 아내 분 사이에는 부부 이상, 아니 한 핏줄 이상의 끈끈한 연대감이 생기지 않았을까. 그래서 부인 없이 타는 배는 더 이상 이응춘 어르신에게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가 곧 어르신 자체였던 이응춘 어르신의 인생 연장전, 아니 승부차기의 끝은 있을까? 바다는 언제나 한결 같이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어르신의 삶도 부인분과 함께 언제나 바다에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 배는 타고 계시지 않지만 어르신의 한 평생의 삶이 이미 바다에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제주바다는 이응춘 어르신이 더 이상 바다로 오지 않아도 꼬마 이응춘부터 청년 이응춘, 중년 이응춘에 이어 노신사 이응춘까지 품에 안고 있다.

평생을 배 위에서, 바다 위에서 사셨을 어르신에게 가장 큰 버팀목은 부인이셨습니다. 일러스트=色色
평생을 배 위에서, 바다 위에서 사셨을 어르신에게 가장 큰 버팀목은 부인이셨습니다. 일러스트=色色

 


안녕하세요. 필자 김진경입니다.

일년동안 부족한 필력의 [제주댁, 정지에書 시즌2]에 많은 관심과 응원, 조언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열 두 분의 어르신들을 만나며 배운 삶의 지혜와 제주의 음식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어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저희는 그저 어르신들의 삶을 가감없이 독자들에게 글과 그림으로 전달하는 역할만 했습니다. 본인 개인사를 기꺼이 공유 해 주신 어르신들께도 경외와 존경을 담아 감사드립니다.

저와 김윤영 일러스트레이터는 잠시 휴식기간을 갖고 가을에 다시 열 두분의 제주의 역사와 함께 살아오신 어르신들을 한 분 한 분 소개해드릴 예정입니다. 평범한 제주 어른들의 삶과 어르신들의 음식이 모여 제주다움이 무엇인 지 함께 나누고 생각해 보려하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감사합니다. 


#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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