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택의 탐나는 올레] (22) 애월읍 고내리~애월읍 광령리

길을 걷는다는 것은 한권의 인문학 서적을 읽는 재미와 닮았다. 역시 걷기를 좋아하는 것은 그 속도가 느리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속도가 너무 빠르니 삶의 속도를 늦추는 걷기야 말로 우리를 치유하고 성찰하게 한다. 유년시절 불가의 출가자로, 환속해 문화재 전문 공직자로, 세 권의 시집을 낸 시인으로, 공직 퇴임 후에는 다시 명상 간경하는 불가의 시자로 돌아가 끊임없는 자기 수행의 길을 걷고 있는 윤봉택 시인이 제주올레 1~26코스를 따라 그 길과 마을에 깃든 흥미로운 제주(탐라) 이야기를 격주로 집필한다. 탐라에서 제주에 이르는 설화와 전설, 신화와 역사를 넘나 드는 시인의 해박하고 담백한 언어를 올레길에서 듣는 재미에 빠져 보시라. / 편집자 글


예로부터 탐라국의 뱃길 목은 크게 두 갈래였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조천진의 조천포구, 또는 애월진 애월포구로 입출항하였다.

421년 전, 길운절이 일으킨 반란 사건을 안무하기 위해, 서른두 살의 청년 청음 김상헌이 안무어사가 되어, 1601년 9월 22일 제주해협의 모진 풍파를 뚫고 닻을 내린 곳은 애월포구였다.

청음은 이 해안 올레를 따라 고내포구를 지나 구엄포구를 거쳐 이호해안선을 넘어 관덕정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그 길 일부가 제주올레 16코스이다.

제주올레 16코스는 이처럼 지난날 제주에 부임하였던 목사나 유배왔던 유배객들이 왕래했던 유서 깊은 올레의 목이었다. 그들은 탐라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절해고도의 낯선 황량함과 이국적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매우 힘들어했다. 

제주올레 16코스는 2010년 3월 27일 열렸다. 고내포구에서 남또리·남두연대·신엄리·중엄리·구엄리·모감동·수산리·당동·본동·예원동·상귀리·항파두리·고성리·광령1리마을회관까지 15.8km 40리 길이다. 

16코스는 같은 읍내에서 갈무리되지만, 해안에서부터 중산간 지역을 아우른다. 마치 우마를 물 먹이러 ‘몰질’ 따라 해변까지 내려왔다가, 다시 말을 몰면서 상잣으로 돌아가는 ‘테우리’ 여정 같은 느낌이다.

남또리포구.
남또리포구.

‘성창’이라고 부르는 고내포구 제주올레 16코스 안내센터에서 ‘남당동산’을 오르면, 고내포구와 애월항을 한 눈으로 담을 수 있다. ‘남당’은 고내포구를 터전으로 삼아 삶을 살아가는 어부와 좀녜를 보호하여 주는 신(남당 칠머리 개로육서)을 모신 신당이다. 포구 동쪽 집 우잣담을 의지하여 신위를 모셔 두었는데, 찾는 이가 많지 않은 것 같다. 

언덕 따라 ’다락쉼터‘에 이르면, 바로 ‘오지알’ 벼랑이다. 이 동산에 앉아 잠시 검불리다 보면, 내가 올레를 걷는 것인지, 올레가 나를 따라 걷는 것인지 모를 상념의 바다에 잠긴다. ‘갈매기 동산’을 지나면, 저 멀리 새엄쟁이/신엄리 남또리 해안선이 또렷하게 열린다.

벼락이 떨어져 바위에 구멍 두 개가 생겨 불린 ‘베락고망’ 다한 곳에서, 새엄쟁이(신엄) 바다를 안은 남또리포구/남두포는 바람이 불면 닻을 내릴 수 없을 만큼 너설이 많은 포구이다.

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처음 김상헌이 보았던 두세 채의 어촌 가옥이 혹 이곳은 아니었을까. 그날에도 남두연대가 있어 해안으로 접근하는 황당선을 살피며 바람에 연기를 지폈으리니, ‘검은빌레’ 지나면 3km 지점이다. 

신엄리 돈물원.
신엄리 돈물원.
중엄 새물.
중엄 새물.

신엄리 ‘돈물원’을 지나면, 한라산에서 발원하여 노꼬메를 지나 이곳 신엄 해안가에서 솟아난다고 하여 ‘녹고물’이라 부르는 샘이 있는데, 수량이 풍부하다. 그 해안 바위에 붙어 테우 하나 겨우 닻 내릴만한 ‘녹고물개’가 있고, 비석 1기가 바위에 세워져 있고, 건너에는 해안에 숨은 좀녜불턱이 가려져 있다.

대썹동산을 의지하여 중엄쟁이 마을을 처음 이룰 때, 중요 식수원인 ‘중엄새물’을 지나면, 도내에서는 비교적 늦게 1992년에 설립된 애월전분공장 유산이 있고, 바로 동쪽이 구엄리이다.

도내 해안에서는 23개소에서 염전을 만들어 소금을 생산하였는데, 엄쟁이 돌소금밧도 그중 하나다. 평평한 암반을 이용하여 바닷물을 증발시켜 돌소금을 만들어 판매하였다. 

중엄과 구엄이 경계를 이루는 ‘웃여’에서부터 ‘드렁귀. 쉐빌레코지’ 해안선까지를 ‘소금빌레’라고 하는데, 이는 해안 빌레를 이용하여 소금을 생산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엄쟁이에는 소금만이 아니라 예부터 손기술이 발달하여, ᄌᆞᆷ녜들이 작업할 때 쓰는 수경을 제작 판매하였다. 여기에 소의 뿔로 만든 “엄쟁이 쇠뿔눈”은 ‘엄쟁이눈’이라고 하여 도내 ᄌᆞᆷ녜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는데, 큰 눈 고무 수경이 제작되기 이전까지는, 이 눈을 사용하였다.

구엄 돌염전.
구엄 돌염전.
구엄포구 도댓불
구엄포구 도댓불

‘웃여’ 지나 ‘서치강굴, 진도코지, 손다귀, 쉐빌레코지’에 이르는 해안선은 절경 그대로이다.

소금밭을 지나면 바로 성창 구엄리포구이다. 동풍을 막아주는 ‘상코지’와 서풍을 막아주는 ‘쉐빌레코지’를 방파제 삼아 조성된 철무지개/엄쟁이포구는 ‘동개, 안개, 밧개’로 이뤄져 있으며, 상코지 입구에는 등명대가 세워져 있다.

구엄쟁이포구에서 물뫼오름 방향으로 오르면, 큰 왕돌이 있었다는 ‘왕동목, 개뒤’이다. 더 나아가면 원내(수산천)를 이용하여 논농사를 지었던 ‘논곳질’이 있고, ‘진밭’을 지나면 바로 ‘모감동’이다.

모감동은 ‘큰모감, 작은모감’으로 나눠지며, 동네의 본향인 ‘모감빌레 송씨할망당’이 있는데, ‘송씨부인 일뢰중조’를 모시며, 마을에서 포제를 지낸다. 이 모감동에서는 군데군데 물이 솟아 나오는데, ‘모감물’이라고 부른다.

큰길 건너면 바로 예원동, 상동, 당동, 하동으로 이뤄진 물메마을 수산리이다. 한질 대로를 지나 수산봉을 넘으면, 7km 지점에 수산 곰솔과 수산 저수지가 있다. ‘수산본향당 당팟 서목당’이 있어, 당동이라 부르는 ‘당가름’을 지나면, 다리 건너에 수산리 본동 주민의 식수원이었던 ‘큰섬지’가 하천 변 길가에 서 있다.

수산리 곰솔.
수산리 곰솔.
항파두리 토성.
항파두리 토성.

‘동산터’ 지나 ‘뒷가름’을 넘으면, 희망의 다리 건너가 ‘답다니’이다. ‘풍곤이왓’에서 ‘하개동산’ 오르면 예원동이 보인다. 그러면 ‘새가름’ 삼거리 건너 우잣담 아래에 놓인 몰방애 숫돌 웃착이 한가롭다. 예원동 포제동산 지나 ‘물곤밧’으로 내리면, ‘화적잇물’ 건너가 상귀리 항파두리 토성이다.

1273년 고려와 몽고 원나라 연합군이 김통정 장군이 이끄는 삼별초를 토벌할 때, 항파두리성에서 김통정 장군이 바위 위로 뛰어내리자, 바위가 움푹 패면서 맑은 샘물이 솟아났다고 전하는 장수물은 소왕천 변에 있다. 지금은 음용수로 맞지 않지만, 그날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고성리 ‘강세가왓’에 올라 광령리 ‘감낭굴질’을 지나면, ‘작지못’ 옆에 ‘작지왓’이 있고, 청화마을 건너 절동산 아래에 ‘절물’이 있다. ‘강개동산’ 지나 ‘지끈터’에 광령초등학교가 있다. 

초등학교 동쪽 ‘앞동산’ 지나면, 제주올레 16코스 종점, 광령1리마을회관이다. 그곳에서 17코스 성안올레가 시작된다.

항파두리 장수물.
항파두리 장수물.
향림사 절물.
향림사 절물.

* [윤봉택의 탐나는 올레]는 제주의소리와 서귀포신문이 공동기획으로 마련한 코너로 격주로 게재합니다. 


윤봉택.
윤봉택.

# 윤봉택

법호 相民.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 태어나 해인사로 출가하여 1974년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하였다. 1991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제주바람)이 당선되어 등단하였고, 강정마을에서 포교활동하면서 농사 짓다가 서귀포시청 문화재 전임연구원으로 23년 공직 근무를 마치고, 2014년부터 쌍계암 삼소굴에서 명상·간경·수행하면서 시민과 함께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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