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52) 송당리 이월선 어르신 이야기

송당의 85세 이월선 어르신(1938년 생)이 입을 여셨다.

“나 어렸을 때, 일본병정들 우리 송당리에도 있었지. 우리집에 동박낭(동백나무)이 100평(330.5㎡) 정도 있었는데 밖거리에 집 한 채 놔 주니까 중대장이 살았던 기억이 나. 그때 밖거리에서 밥 하면서 먹고 살고 하멍 살았던 거라. 그때 우리 송당사람들은 일본사람들을 ‘송본이’라고 했었지.” 

아마도 어르신께서 말씀하셨던 “송본이”는 일본 혼슈 나가노현 중부에 있는 도시인 마쓰모토 시(Matsumoto, 松本市, 송본시)를 의미하는 듯 보였다. 어르신의 회고에 따르면 유년시절 일본인들에 대한 기억은 무서운 존재였기 보다는 송당에서 같이 살았던 젊은 청년들의 이미지가 더 강하신 듯 했다. 아이들은 마을을 거리낌 없이 돌아다녔고 일본군들은 아이들에게 건빵을 튀겨 주기도 했단다. 구루마에 말 두 마리씩 묶고 마을을 다니면 아이들과 거리낌 없이 대화도 했다.

이월선 어르신, 손님이 온다고 고운 옷을 입고 기다리고 계셨다. / 사진=김진경
이월선 어르신, 손님이 온다고 고운 옷을 입고 기다리고 계셨다. / 사진=김진경

“내가 어렸을 때는 우리집에 밭이 막 많아서 사람들한테 많이 빌려줬지. 그럼 농사 지은 거에 일부를 빌려준 값으로 받아. 농사도 워낙 크게 했고 쇠(소) 몰(말) 많이 키웠지. 집에 몰 많이 키워서 밭 볼렸고 몰 사레(사러) 오면 팔기도 해났지. 우리집은 한 100마리 정도 길렀던 거 닮아. 여름 되민 사람 하나 빌어서 몰 볼리러 다녔고 겨울엔 어디 넓은 디 몰 풀어 놓았지. 타는 용으로도 키워나신디 막 살랑살랑 거시기 한 사람들이 주로 몰 타고 다녔어. 지금도 생각나는데 임도현이라는 사람이 좋은 말 타고 다녔던 것이 생각나. 11살 까지는 그런 기억이었어. 밥도 막 굶지 않고 농사를 크게 했으니까 먹을 것도 풍족하게 먹었지. 그때가 제일 맛좋은 거 많이 먹었어. 고기도 동네에서 팔면 먹었었고 농사지은 보리쌀에 진 쌀, 산듸쌀 허여서(해서) 그런걸로 밥을 먹었으니까. 나 어렸을 땐 맨보리밥만 먹어본 적도 없었어.”

유년시절 기억을 들어보니 어르신은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나 먹을 것 모자람 없이 크셨던 것 같았다. 집이 워낙에 부농이었던 탓에 소도 많이 키웠고 말은 약 백 마리 정도 기르기도 하셨다. 제주의 서쪽보다 화산회토의 비율이 높은 동쪽 지역에서는 농사를 잘 짓기 위해 소나 말이 땅을 밟아주는 어르신이 말씀하셨던 “몰 볼리는” 행위가 반드시 필요했단다. 즉, 소나 말이 땅을 밟아주면 토질이 그나마 비옥해졌다.

말이나 소의 체중을 담아 누르는 무게의 압력으로 땅이 다져지는 효과도 있지만 동물의 분뇨가 흙의 천연비료 역할을 하기도 했다. 소나 말을 몰고 다니면서 마을의 땅을 밟아주는 역할을 하는 테우리는 마을 사람을 빌어서 했단다. 어르신의 기억으로는 송당본토 사람은 아니고 외지사람 중에 송당으로 들어와 살았던 사람 중 한 명이 테우리를 했었다고 했다.

“내가 38년생이니까 여덟 살에 일제에서 해방되서 9살에 학교 붙으고 1~2학년까지는 다녔어. 그런데 3학년때 4.3이 4월에 일어났어. 사람들이 와서 집집마다 불 붙여부난 학교도 문 닫고 해서 다니지 못했지. 10월에 볕 나는 아침에 조반 먹고 오빠랑 엄마랑 나랑, 세살 아래 동생이 집에 있었는데 산폭도들이 와서 아버지를 총살해 죽여 버렸어. 죽은 아버지를 불 붙였어. 할아버지 할머니 다 살고 할 때니까 아버지 그추룩 되니까 다들 벌벌 떨었지. 그날 저녁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이 꼼짝하지 않으면 너희도 죽여버린다 하면서 구루마영 쇠(소)영 살림살이들이영 다 가져가서. 그때 우리집이 송당에서 두 번째 가는 부잣집이었는데 뭐든 다 가져갔어. 가져가면서 하는 말이 뒷날 되면 송당마을 다 불 붙일거니까 마을에서 나가라고. 그래서 바로 아는 집 세화리에 피난 갔다가 그때 어머니가 병나서 돌아가버리셨지. 할아버지, 할머니, 동생이랑 살았어. 겅 행 살다가 송당으로 다시 올라 와 결혼해서 산거라.”

이월선 어르신의 유복했던 유년시절은 1948년 11살이 되던 해에 뒤바뀌게 된다. 4.3사건으로 인해 아버지를 잃었고, 집은 불이 붙어 뭐 하나 남지 않았고 키우던 소와 말도 뿔뿔이 흩어졌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가족들은 급하게 해안가로 피신을 갔다. 조부모님과 어머니와 함께 아는 집을 빌어서 세화, 김녕, 평대 등을 다니며 죽은 듯 살다가 다음해 3월 즈음 다시 송당으로 올라오셨단다. 집터에 돌을 쌓고 새(지붕에 일 띠)로 덮어서 임시로 살다 나중에야 집을 제대로 만들었다. 

“그땐 우리 육지도 다닐 거래도 없었지. 나라에서 알량미(안남미의 제주말) 쌀 주고 밀가루도 주고 그런 거 먹었지. 아침저녁은 알량미 먹고 점심은 밀가루로 수제비 많이 먹었어. 그나마 이녁(자기의 제주말)밭 있으니까 농사 지어서 콩이랑 좀 해서 먹었지. 그때 우리 먹었던 알량미는 수랑수랑하고 내(냄새) 나는 쌀. 아니 먹으면 배고플 거라 맛 생각하지 않고 막 먹었어.”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이 쌀을 수탈하여 쌀 부족이 심각해지자 이를 해결하려고 수입했던 베트남쌀인 안남미를 먹었던 어르신의 4.3 후 마을은 처참했다. 다시 돌아온 송당은 부모님이 모두 안 계셨던 터라 다시 학교를 다닐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단다. 지금 돌이켜보니 국민학교라도 다녔으면 하는 후회를 하신단다. 

송당의 밭들은 그나마 남아 있어 조부모님과 그래도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었다. 아홉 형제 중 여덟 번째 딸이었고 위로 오빠 언니들이 나이터울도 좀 있어 부모처럼 의지하며 자랄 수 있었던 것은 큰 위안이었다.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먹고사는 것이 가장 컸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혼인 전까지는 농사만 하며 살았단다. 

산디(밭벼), 모물(메밀), 좁쌀 농사 지으면서 수확한 곡식으로 겨우 내내 먹고 살았기 때문에 송당에 돌아와서도 먹을 일 걱정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고 했다. 다만 부모님을 잃은 마음은 쉽게 치유되지가 않았다. 그럭저럭 먹고 살다 21살에 송당마을 사람과 중매로 혼인을 했다.

“제국주의 1~2학년 다녔던 우리 또래들은 거의 학교를 못 갔어. 촌에영 할망들이영 어른들은 특히 여자가 글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못 갔지. 울 아버지 52세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얼마 안 있어 돌아가셨어. 어머니 시름시름 앓으시는데 아프다고 지금처럼 주사 한 대도 없었고 약도 없었던 시절이라 한 일 년 그렇게 누웠다가 돌아가셨지. 그때는 아프면 다 돌아가시는 걸로 알았던 시대지. 죽지 않으니까 살았던 시절이야. 그나마 위로 언니 오빠들 있으니까 셋(두 번째) 오빠 딸이랑 큰오빠 딸도 나랑 동갑이라서 다행히 막 외롭지는 않았어. 형제들이 많아서 우애는 좋았어. 농사지을 땅도 있어 고생은 막 하지 않았으니까. 부모 없으니까 외로웠지 놈 할 만한 고생은 아니해서 살았던 거 닮아.”

21살에 어르신은 가마타고 남편 분은 말 타면서 마을에서 결혼은 했지만 지금 그 흔한 결혼사진 한 장도 없다 하셨다. 3일 잔치를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너무 경황이 없어 기억은 잘 안 나신다고. 그렇게 부부의 연을 맺고 어르신은 농사 지으면서 지금까지 한 평생 사셨다. 오형제를 학교 보내기 위해 드는 돈은 농사로는 형편없이 부족했다. 농협에 빚을 얻어 아이들을 뒷바라지 하다가 송아지가 태어나면 팔면서 갚기도 하셨다. 그나마 어르신 댁의 목장 밭이 국립목장이 되면서 목장을 팔아 아이들 공부를 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아들 다섯을 대학 보낸 것이 어르신이 이제껏 살면서 가장 잘 했던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르신 댁 마당에 널린 수확하신 콩들. 올해는 이상하게 콩 농사도 잘 안되었다고 하셨다. / 사진=김진경
어르신 댁 마당에 널린 수확하신 콩들. 올해는 이상하게 콩 농사도 잘 안되었다고 하셨다. / 사진=김진경
어르신 댁 마당에 널린 수확하신 콩들. 올해는 이상하게 콩 농사도 잘 안되었다고 하셨다. / 사진=김진경
어르신 댁 마당에 널린 수확하신 콩들. 올해는 이상하게 콩 농사도 잘 안되었다고 하셨다. / 사진=김진경

어르신이 29살이 되던 해, 마을에 공동 수도가 들어왔다. 공동 수도라고 해도 매일 물은 나지 않았단다. 그때는 어승생 물을 당겨서 줬니 아니니 라는 말도 마을사람들의 이슈일 정도로 공동수도는 그 시대에는 선물 같은 것이었다. 마을 공동수도에 물이 들어오지 않으면 저기 멀리 대물동산이라고 하는 곳의 대물통까지 걸어가야 했다. 왕복 40분은 걸어야 가는 곳인데 아침에 식구들이 일어나기 전에 몇 번이고 다녀와야 했다. 이월선 어르신에게 물은 너무나도 중요했다.

“그때 수도 나오기 전 죽어분 어른들은 너무 억울해. 고생만 고생만 하다 돌아가셨으니까. 그 후에 수돗물도 나오고 지금 삶은 완전 대통령 삶입주게. 우리 땐 겨울 되면 말똥 주우러 다녀야 굴묵(구들에 불을 지피기 위해 만든 구멍)에 불 지필 수 있었어. 지들커(땔감) 해와야 밥 먹을 수 있었지. 물 질어오는(길어오는) 것도 사람 먹고정 하는 것만 할 수 있던 것도 아니어서. 집에 소들도 물을 먹어야지. 아들 다섯에 소들이랑 먹일 물 하려고 하면 정말 하루 종일 물만 길어왔던 것 닮아. 그때는 그렇게 한 40년 살아신가. 그렇게 살당 집에 수도 들어왔을 때가 80년대였는데, 그땐 진짜 천국이었지.” 

허벅을 지고 물을 길어오지 않으면 생활이 되지 않았던 터였고 집에 식구들이 많아서 어르신은 하루의 많은 시간을 물 길어오는 데에 쓰셨다. 물을 지고 오는 것을 하루에도 몇 번이고 반복해야 하는 터라 아들들이 물지게를 들어줬음 해도 학교도 다니기도 했고  손아이(소나이, 사나이의 제줏말)들이니까 하려고도 안했단다. 늘 농사를 지었으니까 먹는 곡식 걱정은 없었지만 밥을 지으려면 물이 필요했으니까 물이 항상 걱정이었다. 비오면 그 물을 받아서 설거지를 했다. 빨래를 하려면 진순내까지 빨래를 지고 가서 빨아왔다. 인근에 내창들이 꽤 많았는데 수도가 나오고 나서부터 내천을 막아버렸고 더 이상 내창 물을 사용하지 않았던 이유에서인지 물도 자연스레 말라버린 것 같다고 하셨다.

남편분이 마을 이장을 맡게 되었을 때나 농협에서 직책을 맡아 활동할 때에는 송당마을제의 음식도 어르신이 담당하셨다고 한다. 적어도 한 해에 한 번은 꼭 음식을 준비해서 가는데 이장 직에 물러난 후에도 몇 번은 당시 이장 집에서 음식을 마련할 상황이 되지 않아 심방이 어르신을 찾아가 간청해 음식을 마련한 적도 있으셨다고 했다.

보통 송당마을제에는 떡, 메(밥), 생선, 과일, 술, 산 장닭을 준비한다. 여기서 장닭은 액막이 하는 용도로 쓰였단다. 술은 동네 점빵에서 사서 마련했고, 메도 낭푼에 정성을 다해 담았다. 떡은 돌레떡을 한 짐 가득 만드셨단다. 고기도 구웠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어르신이 말씀하시는 고기는 바로 생선, 생선 중에서도 옥돔을 의미한다.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는 생선은 보통 옥돔을 지칭한다고 보면 된다. 과일도 감귤이나 댕유지를 주로 올렸고 정월 큰제사 때는 배도 올려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돼지고기는 절대 안된다고 하셨다. 적어도 마을제가 있기 3일 전부터는 몸과 마음가짐부터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했다. 돼지고기는 부정 타서 절대 안된다고 생각하셨단다. 마을제 날 월경을 하는 여성들도 참석하지 못했다. 

어르신의 85년 삶의 중반부까지 듣고 나는 마음이 숙연해졌다. 수돗물이 집집마다 나오던 그 시기 이후부터 현재의 삶을 대통령 삶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어르신은 오히려 이런 편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돌아가신 사람들에게 미안해 하셨다. 우리는 과연 지금 우리의 삶에 얼마나 감사하며 살고 있을까? 어르신의 조근조근한 말 가운데에 들어있는 강인한 힘은 지금까지 편한 것만 쫓으며 살았던 나의 삶을 돌아보게 했다. 

한 평생 농사만 지으며 살아온 어르신이 건네주신 인생 조언은 과연 무엇일까? 평범한 제주의 어르신들의 삶에서 찾아낸 보석 같은 제주음식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진다.

“지금이 대통령 삶이야. 요즘이 나는 너무 행복해” 힘드셨을 텐데 누구에게도 힘든 내색 한 번도 안 하시고 매일을 성실하게 농부의 삶을 살아오신 어르신의 밝은 미소가 너무 좋았습니다.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지금이 대통령 삶이야. 요즘이 나는 너무 행복해” 힘드셨을 텐데 누구에게도 힘든 내색 한 번도 안 하시고 매일을 성실하게 농부의 삶을 살아오신 어르신의 밝은 미소가 너무 좋았습니다.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 김윤영(이로이로)

육지것에게 들리는 제주의 진한 사투리는 화가 나신 것도 같고 꽤나 투박하기도 하여 인터뷰 때마다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갔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매번의 인터뷰가 제주어 듣기 평가이기에 삼촌들의 표정과 손짓에 더 집중하며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있다.

하도리에서 이로이로라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관련된 여러 클래스들도 운영 중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제주의 콘텐츠들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있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한지 10년 차,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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