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립무용단 정기공연 ‘순력’

3일 공연한 제주도립무용단 정기공연 '순력'의 무대 인사 장면.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3일 공연한 제주도립무용단 정기공연 '순력'의 무대 인사 장면.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제주도립무용단(도립무용단)의 올해 활동을 장식할 공연 ‘순력’이 3일 제주도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열렸다. 도립무용단의 제55회 정기공연 ‘순력’은 보물 ‘탐라순력도’를 소재로 삼은 ‘컨템포러리(contemporary, 현대의·유행하는) 전통무’를 표방한다. 옛 춤사위를 단순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300여년 전 제주를 남긴 옛 그림이 오늘 날 제주와 이어진다는 창작자의 영감을 구현하는 의미에서 ‘컨템포러리 전통무’를 강조한다.

이처럼 ‘순력’은 이음·순환이란 안무자의 확고한 주제를 뒷받침하는 무대 장치 활용, 매 작품마다 진화하는 조명 연출, 질 높은 음악, 그리고 이러한 완성도 높은 무대 안에서 한국무용의 매력을 오롯이 보여준 무용수들의 춤이 더해지면서 빈틈없는 무용극으로 관객들의 박수를 이끌어냈다.

‘순력’은 시작을 알리는 프롤로그와 마무리를 알리는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총 6장으로 구성됐다. 작품 의도를 보면 “탐라순력도 가운데 11면의 그림을 고르고, 다시 춤을 중심으로 재구성해 일곱 장면으로 만들었다”며 “역사와 자연을 순환하는 바람을 타고 화첩 속에 그려진 제주 곳곳을 다시 순력하는 스토리로 진행된다”고 밝힌다.

막이 오르고 무대에는 화공이 커다란 붓을 들고 앉아있다. 붓이 움직이면서 화면은 제주 자연 풍광을 시작으로 탐라순력도 그림들이 움직이며 순력의 시작을 알린다. (프롤로그 바람으로 이어진 기억―탐라순력도 중 ‘한라장촉’) 

흰 배가 무대로 들어온다. 돛에 그려진 용 그림을 통해 용연 뱃놀이임을 알 수 있다. 푸른 옷감으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자 무용수들의 정돈된 춤사위가 배를 아우르고, 이어 해녀들은 보다 역동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1장 푸른 유리의 바다―병담범주)

거대한 원 모양의 장치가 무대 중심으로 내려온다. 고리에 흰 천을 감싼 형태. 이내 일출을 상징하는 조명과 그 색에 어울리는 남자 무용수들이 나선다. 한낮처럼 밝은 푸른 빛깔의 여자 무용수들이 춤선을 뽐내는 무대에 이어, 장치에 부착된 천을 과감하게 걷어내며 이전과는 다른 역동적인 춤으로 전환한다. (2장 다시 염원하는 평안―성산관일) 

짙은 자줏빛 복장의 남자 무용수가 홀로 무대에서 춤사위를 보여준다. 수묵화 배경과 어둠·빛 조명이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다음은 여인들의 검무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3장 풍광에 취한 풍요―산방배작) 

남자 무용수가 무대 한 가운데서 상모를 돌린다. 동시에 무대에는 상모가 움직이는 선에 따라 원형의 백색 조명과 기다란 조명이 펼쳐진다. 그리고 강렬한 타악기와 외침이 더해진 음악 속에 검은 색 의상 차려입은 남자 무용수들이 무대를 장악한다. 말꼬리를 상징하는 소품을 들고 내려침과 회전 속에 역동성을 뽐낸다. (4장 시간의 함성―천연사후, 별방조점, 산장구마) 

바구니에 귤을 담은 안무에 이어 장구춤이 등장한다. 무용수는 검정 상의에 명도를 낮춘 파랑, 초록, 붉은 색 치마를 각각 착용했다. 복장의 색과 질감은 빛을 집중시킨 조명과 어우러져 더욱 도드라진다. 사선과 직선을 오가는 조명과 그 위에서 펼쳐지는 장구춤은 객석을 한껏 들뜨게 만들었다. (5장 싱그러운 생명의 향―귤림풍악) 

노인성을 보며 장수를 기원하는 양로잔치는 거대한 퍼포먼스의 장으로 재현됐다. 30개가 넘는 북을 도립무용단원들이 직접 연주했고, 그 안에서 전통 관악기와 타악기가 흥겨움을 주도했다. (6장 제주 천고, 영원의 울림―정의양로, 제주양로) 

무대 위에 다시 흰 배가 등장했다. 화공과 함께 무용수들이 각각의 복장 그대로 한 명씩 동행한다. 이내 홀로 남은 화공은 배 위에 앉아서 저 먼 곳을 바라본다. 그 모습이 거대한 원 모양의 장치와 겹쳐진다. 이 순간 원을 가운데 두고 한편은 조선의 화공, 반대편은 대한민국의 현대인들이 자리해 있다. 300년 전 예술가가 남긴 기록이 긴 세월이 흘러 또 다른 예술가에 의해 재탄생하는 순간, 그것은 시작과 끝이 하나로 이어지며 순환하는 원으로 형상화된다. 또 다른 대형 원 모양의 조명 장치에 수많은 우주들이 새겨지는 마지막 연출까지 더해지면서 순환의 가치는 더욱 극대화된다. (에필로그 순력, 다시 순환하는 기억―호연금서) 

‘순력’은 전통 부분에서 한국무용의 매력을 한껏 선사했다. “한국 정재와 민속춤의 원형을 바탕으로 해녀, 말테우리 등 제주의 모습을 현대적 관점으로 창작했다”는 작품 의도처럼 전통 재현과 창작을 자유롭게 오간다. 치마폭을 벗어나지 않는 정갈한 발놀림, 그에 반해 옷깃 사이를 차올리는 힘찬 발놀림의 차이는 미묘하지만 남녀 무용수의 동작을 구분 지었다. 뻗어 올라가는 한삼에서는 역동성을, 맨 손으로는 손끝의 선까지 살리는 맵시를 느낄 수 있었다. 정돈된 춤은 정돈된 대로, 화려하고 빠른 춤은 그 느낌대로 오래 전부터 이어 내려오는 전통춤의 아름다움은 무대 위에서 피어올랐다공연 당일 객석은 나이가 지긋한 관객들이 객석을 상당수 채웠다. 추억 속의 민속춤이 화려하게 펼쳐지자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치는 정겨운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용의 시각적 아름다움은 조명 연출에 의해 극대화됐다. 5장 귤림풍악의 장구춤이 대표적이다. 타악기가 선사하는 청각적 요소, 화려한 복식 차림과 그것을 한껏 주목시키는 백색 조명이 결합한 시각적 요소. 무엇보다 무대를 가로지르는 사선·직선의 조명에 따라 무용수들이 움직이는 동선까지 세 가지 요소가 더해지며 놀라움을 가져다줬다. 무용수 홀로 고요하게 시작해 점차 규모를 키우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모든 무용수가 한 줄로 서서 무대 맨 뒤쪽에서부터 점차 앞쪽으로 다가올 때마다 동시에 조명이 단계 별로 비추는 마무리는 관객의 환호성을 일으킬 만큼 멋진 기승전결이었다.

조명 연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장의 푸른 색 조명과 복장, 2장의 붉은 노란 색 조명과 복장, 3장의 영상 수묵화와 자줏빛 복장에 어둠을 강조한 조명, 4장의 상모와 원형의 백색 조명. 그리고 때로는 달처럼 때로는 우주처럼 등장한 대형 원형 조명 장치까지. 조명은 복식과의 알맞은 조화와 함께 매 장면마다 명확한 주제 안에 녹아들었다. 

특히 성산 일출이라는 소재, 그에 따른 색의 활용, 그리고 무대 장치를 찢는 파격적인 행동과 함께 전통에서 현대로 이동하는 과정이 무척 극적인 2장은 뛰어난 완성도로 인상에 남는다.

1장 역시 마찬가지. 무겁고 음울한 분위기에 경고음까지 연상케 하는 음악 속에 해녀들이 격동적인 몸짓을 선보인다. 동시에 한쪽에서는 화공이 등장해 있다. 보통 해녀춤은 밝고 에너지 넘치고 신비한 분위기로 접근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순력’의 해녀춤은 탐라순력도 안의 작은 해녀 그림 안에는 미처 그림으로 담아낼 수 없는 삶과 노동의 무게가 담겨 있다는 인상을 안겨줬다.

다만, 해녀춤에서 고된 노동의 가치까지 녹여낸 만큼, 당대 서민들에게 무거운 공납으로 취급된 감귤 역시 5장에서 비슷한 접근이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단편적인 접근에 분량도 적어 아쉬움을 남겼다. 물론 제주 감귤에 대한 무용적 창작이 지금까지 마땅히 없다는 점에 비춰 볼 때, 창작자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예상해본다. 

작품에서는 별다른 무대 장치가 등장하지 않는다. 흰 배 정도를 제외하고는 고리 형태의 단순하지만 거대한 원형 장치와 비슷한 규모의 원형 조명 장치가 유일하다 시피 하다. 그럼에도 순환이라는 주제 의식을 적절하게 반영하면서, 오히려 화려한 장치 이상의 효과를 냈다. 음악은 마치 연주장에 앉아있는 듯 생생한 고음질로 뒷받침했다.

‘순력’은 과거와 현대, 전통과 최신의 순환을 강조했다. 이것은 작품 안에서만 그치지 않고 작품 밖에서도 나타난다. 정확히 말하면 인연의 연결이다.

이번 공연에서 김정학 전 제주도립무용단 안무자는 협력연출 및 지도 역할로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제주도립무용단을 거쳐 지금은 국립무용단에서 활동하는 김미애가 특별지도 역할을 맡았고, (사)국악연희단 하나아트 예술감독 고석철은 연주지도를 수행했다. 도립무용단 혹은 제주와 인연이 깊은 예술가들과의 이음까지 담아낸 셈이다.

제주신화, 한라산, 제주 무용인, 그리고 탐라순력도까지. 김혜림 도립무용단 안무자가 제주에서 보인 궤적은 가장 기본적인 제주다움에 충실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다만 그것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때로는 과감하게 한 걸음 더 나아가면서 더 큰 놀라움을 안겨준다. 지금까지 그랬지만, 앞으로 보여줄 무대가 계속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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