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동남초총동창회, 12월4일 교정에 고봉조 독립지사 추모비 세워

제주 독립지사 고봉조 선생(1920년 9월 11일~1963년 10월 8일)의 추모비가 모교인 제주동남초등학교 교정에 지난 12월4일 세워졌다.  ⓒ제주의소리
제주 독립지사 고봉조 선생(1920년 9월 11일~1963년 10월 8일)의 추모비가 모교인 제주동남초등학교 교정에 지난 12월4일 세워졌다. ⓒ제주의소리

일제강점기 유학생 신분으로 일본에서 비밀결사 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벌이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고문 후유증으로 타계한 제주 독립지사 고봉조 선생의 추모비가 모교인 제주 동남초등학교에 세워졌다. 

동남초등학교 총동창회(회장 강종호)는 지난 4일 모교 교정에서 고봉조 독립지사의 유족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비 제막식을 개최했다. 

동남초 총동창회가 주최한 이 날 제막식에는 직계 후손이 없는 고봉조 독립지사의 사촌제수인 안금숙 씨와 조카 고광태·공우준 씨 등이 초청된 가운데, 강종호 총동창회장과 임원, 강혜선 광복회 제주특별자치도지부장, 김률근 전 지부장, 현동식 성산읍장, 오정석 동남초등학교장, 곽유주 동남초 어린이회장 등이 함께 제막에 참여했다. 

고봉조 독립지사는 1920년 9월 11일 제주 성산리에서 태어나 1931년 3월 성산서국민학교(현 동남초)를 졸업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졸업 후 당시 부친이 거주하던 일본 오사카로 10대의 어린 나이에도 단신으로 도항해 1935년 3월 심상소학교 고등과 1학년을 수료했다. 같은 해 4월 오사카부의 후세시(布施市) 소재 성동상업학교 야간부 1학년에 입학, 1938년에 3학년을 수료했다. 

제주 독립지사 고봉조 선생(1920년 9월 11일~1963년 10월 8일)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제주의소리
제주 독립지사 고봉조 선생(1920년 9월 11일~1963년 10월 8일)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제주의소리
제주 독립지사 고봉조 선생(1920년 9월 11일~1963년 10월 8일)의 추모비가 모교인 제주동남초등학교 교정에 지난 12월4일 세워졌다.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에 조성되어 있는 고봉조 선생의 묘 . 직계 후손이 없는 고봉조 독립지사의 묘는 현재 사촌제수인 안금숙 씨와 조카 고광태 씨 등이 매년 벌초를 이어어고 있다. ⓒ제주의소리
제주 독립지사 고봉조 선생(1920년 9월 11일~1963년 10월 8일)의 추모비가 모교인 제주동남초등학교 교정에 지난 12월4일 세워졌다.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에 조성되어 있는 고봉조 선생의 묘 . 직계 후손이 없는 고봉조 독립지사의 묘는 현재 사촌제수인 안금숙 씨와 조카 고광태 씨 등이 매년 벌초를 이어어고 있다. ⓒ제주의소리

학비가 어려웠던 그는 1940년 3월 니혼대학 전문부 특과 야간부에 재학하며 주경야독했다. 당시 조선인 학우인 김봉각(金奉珏)의 매형이 경영하는 금성제작소(金城製作所)에서 김병목(金丙穆)과 함께 근무하다 일본인의 모욕적인 처우와 민족적 차별에 격분해 “조선청년의 갈 길은 오직 하나, 민족해방을 위하여 헌신하는 길뿐이다”는 공감대 속에 강금종, 한만숙 등과 함께 1940년 5월 흥아연구회(興亞硏究會)를 조직했다. 

이후 흥아연구회를 조선인 비밀결사체인 계림동지회(鷄林同志會)로 확대 재결성하고, 본격적인 항일민족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1941년 2월 25일 14명의 동지들과 함께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고, 1942년 11월 18일 오사카 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 등 옥고를 치렀다. 8.15 해방 후 고향인 제주 성산포로 돌아왔고 1963년 10월 8일에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고봉조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고봉조 독립지사는 고향에 와서도 고문후유증 등으로 가정을 꾸리거나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해 직계 후손이 없는 상태다. 성산읍 고성리에 조성된 그의 묘는 현재 사촌 제수인 안금숙 씨와 조카 고광태 씨가 벌초와 제사를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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