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민의 제주 생활사] (4) 두모악

‘두모악’의 등장

‘두모악’을 논문으로 맨 처음 발표한 사람은 한영국(韓榮國)이다. 한영국(韓榮國)은 1981년 『한우흔 박사 정년기념 사학논총』(韓㳓欣博士停年紀念私學論叢)에서 「‘두모악’고」(‘頭毛岳’考)를 발표하였다. 그 내용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조선 시대 때 ‘두모악’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두모악’(頭毛岳)은 ‘두무악’(頭無岳, 頭無惡), ‘두독야지’(豆禿也只)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두모악’은 제주도를 떠난 이들이다. 원래 거주지였던 제주도를 불법적으로 이탈하여 전라도나 경상도 해안에 거주하던 제주도민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두모악’들이 ‘불법적’으로 제주도를 이탈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2016년, 울산대곡박물관은 ‘두모악’을 주제로 『울산 역사 속의 제주민』 특별전을 열었다. 부제는 「두모악·해녀 울산에 오다」이다. 특별전 도록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시대 울산지역에는 제주도 사람들이 거주했다. 이들은 왜 울산에 왔던 것일까? 울산의 여러 자료에 이들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어 매우 흥미롭다. 두모악은 조선 시대 제주도를 떠나 육지로 와서 살았던 사람들을 일컬었다. 『경상도 울산부 호적대장』 가운데 두모악이 등장하고 있어 주목된다. 두모악은 1609년(광해군1), 1672년(현종13), 1684년(숙종31), 1708년(숙종34) 호적대장에 기록되어 있다. (중략) 1705년에는 부내면 제23 성황리(城隍里)에 192호가 거주하고 있었다. 1708년 호적대장에는 부내면 제22 성황당리(城隍堂里)에 185호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 사진=고광민
울산 무자식 호적대장(蔚山 戊子式 戶籍臺帳).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규14985) 소장.
1708년, 울산 부내면 제22 성황당리(城隍堂里)에 ‘두모악’(頭毛岳) 사람들 185호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 사진=고광민

울산부 호적대장을 통해 두모악은 18세기까지 육지인과 격리된 가운데 그들 나름의 특수 부락을 이루어 생활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두모악은 대체로 천인(賤人)으로 대우를 받았다. 이들은 그 나름의 부락을 형성하고 그들끼리 혼인을 했다. 두모악은 육지인이 꺼리는 존재였고, 관청으로부터 특정한 역을 부과받았고, 그 주거와 출입도 통제되었다. 

‘두모악’(頭毛岳) 또는 ‘두무악’(頭無岳)은 제주도 산과 오름의 생긴 모양에서 온 말이다. 제주도 한라산과 여러 오름은 용암이 분출하면서 생겼으니, 산과 오름 꼭대기에는 분화구가 있기 마련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분화구를 ‘굼부리’라고 한다. ‘굼부리’는 산과 오름에 화산 폭발로 움푹 파진 분화구나 분지라는 말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굼부리’가 있는 산과 오름을 ‘암메’라고 한다. 제주도 이외 육지부 어촌으로 이주하여 살았던 제주도 사람을 두고 제주도 이외 육지부 사람들은 ‘두모악’ 또는 ‘두무악’이라고 일컬었다. ‘두모악’ 또는 ‘두무악’은 머리가 없는 산이라는 말에서 비롯하였다. 그리고 ‘두모악’ 또는 ‘두무악’은 머리가 없는 ‘암메’ 천국인 제주도 출신의 사람이라는 말이다. 

조선 시대, 제주도 사람 ‘두모악’들은 천한 대접을 받으면서 왜 울산에서 살았을까. 울산과 그 주변 지역 어촌마을 사람들과 제주도를 떠나 울산과 그 주변 지역 어촌에서 사는 해녀들의 관계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러면 조선 시대 제주도 사람들이 울산과 그 주변 지역에 이주하여 살게 된 필연적 배경이 드러난다. 이것이 ‘두모악’ 또는 ‘두무악’ 탄생의 배경이 될 것이다. 2016년 10월, 나는 ‘두모악’ 또는 ‘두무악’의 탄생 배경을 찾아 동해안 어촌을 찾아다녔다.   

주전동의 ‘미역돌’과 미역 따기 

울산광역시 동구 주전동 바다는 북쪽 ‘선골’부터 남쪽 ‘보밑’까지이다. 그 사이에 미역밭은 9개가 있다. 미역밭마다 이름이 있다. ‘노랑돌’, ‘선돌’, ‘끝돌’, ‘큰불’, ‘생이돌’, ‘물목’, ‘돔방’, ‘지경’이다. 울산광역시 동구 주전동 사람들의 미역 따기는 장만조(1939년생, 남) 씨에게 가르침 받았다. 

주전동 사람들은 미역밭을 ‘미역돌’이라고 한다. 해마다 마을 사람들은 추석 무렵에 모여 제비뽑기로 ‘미역돌’ 소유를 결정하였다. ‘미역돌’마다 가호 수가 정해진다. 주전동 책임자는 종이에 ‘미역돌’ 이름을 적고 마당에 던져 놓으면, 가호 대표자는 하나의 제비를 집었다. 이렇게 ‘미역돌’ 제비뽑기를 ‘돌제비’라고 한다. ‘돌제비’로 ‘미역돌’을 소유한 사람들 스스로 ‘곽주’(藿主)라고 하였다. ‘곽주’는 ‘미역돌’의 주인이라는 말이다. ‘돌제비’가 끝나자마자 다시 ‘돌제비’로 하나의 ‘미역돌’을 가호 숫자만큼 나누어 차지하였다. 그러면 울산광역시 동구 주전동 사람들은 가호마다 1년 주기로 정해진 ‘미역돌’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음력 9월부터 10월 사이, 주로 남정네들이 배를 타고 자기네 소유 ‘미역돌’로 가서 ‘씰게’라는 도구로 수심 2m까지 ‘미역돌’의 잡초를 제거하였다.

/ 사진=고광민
돌매기(2016년 10월 17일, 경북 울진군 매화면 오산리).
이 마을 박선동(1935년생, 남) 씨는 ‘씰게’를 양손에 잡고 ‘미역돌’에 붙은 잡초를 제거하고 있다. 이런 일을 ‘돌맨다’고 한다. / 사진=고광민

‘씰게’는 괭이를 편 모양의 쇠붙이를 자루에 박아 만든 것이다.

/ 사진=고광민
씰게(길이 268.5㎝, 날의 길이 23.3㎝, 날의 폭 6.5㎝).
‘씰게’는 ‘미역돌’에 붙은 잡초를 제거하는 도구이다. 울산광역시 북구 구유동 제전마을 김명출(1941년생, 남) 씨 집에서 쓰던 것이다. ‘씰게’ 자루는 외국산 ‘아비통나무’를 다듬어 만들었다. / 사진=고광민

이를 ‘돌맨다’고 한다. 그리고 수심 3∼10m의 ‘미역돌’ 잡초는 제주도 출신 해녀들을 고용하여 맸다. 해녀들의 제초 도구는 ‘기세호멩이’이라고 한다. ‘씰게’가 수심 2m까지 ‘미역돌’에 붙은 잡초를 제거하는 울산지역 본토박이들의 도구라면, ‘기세호멩이’는 수심 2m부터 10m까지 ‘미역돌’에 붙은 잡초를 제거하는 제주도 출신 해녀들의 도구이다. 당시 제주도 출신 해녀들의 하루 ‘돌매기’ 품삯은 15만 원이었다. 

음력 2월 중에 미역을 땄다. ‘미역돌’ 꼭대기의 것은 여자들이 낫으로 땄고, 수심 2m까지는 남자들이 ‘설낫’으로 땄다.

설낫(길이 298.2㎝, 날의 길이 22.5㎝, 날의 폭 1.4㎝).
‘설낫’은 ‘미역돌’에 붙은 수심 2m까지의 미역을 베어내는 도구이다. 이것은 울산광역시 북구 구유동 제전마을 김명출(1941년생, 남) 씨 집에서 쓰던 것이다. ‘설낫’ 자루는 왕대나무로 만들었다. / 사진=고광민

그리고 수심 2m 이하 미역은 제주도 출신 해녀들이 잠수하여 제주도에서 전승되는 ‘종게호미’라는 낫으로 땄다. ‘설낫’이 울산지역 본토박이들이 수심 2m까지 ‘미역돌’에 붙어 자라는 미역 채취 도구라면, ‘종게호미’라는 제주도 출신 해녀들이 낮은 수심 2m부터 10m까지 ‘미역돌’에 붙어 자라는 미역 채취 도구이다. 제주도 해녀들은 그날 따낸 미역 중에서 10분의 1을 품삯으로 받았다. 미역은 수심이 깊어갈수록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수도 있었다. 

나사리 사람들의 미역 따기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나사리 미역밭은 북쪽 ‘납닥돌’부터 남쪽 ‘안섭잘’까지, 모두 다섯 개의 ‘미역돌’이 있다. ‘독바우’, ‘솔안’, ‘여담네밭밑에’, ‘대장끝’, ‘앞바당’이다. 울주군 서생면 나사리 사람들의 미역 따기는 최정숙(1947년생, 여) 씨에게 가르침 받았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음력 8월 중에 ‘미역돌’을 나누고 1년 동안 차지하였다. 이를 ‘제비 뽑는다’고 하였다. 제비뽑기로 ‘미역돌’을 1년 동안 차지한 사람들은 스스로 ‘곽주’(藿主)라고 하였다. ‘곽주’는 대부분 여성이었다. ‘곽주’들은 사공 한 사람을 선임하였다. 사공은 배를 소유하고 있는 남자였다. ‘곽주’들은 사공의 배를 타고 다니면서 잡초도 제거하고 미역도 땄다. 

음력 9, 10월 중에 ‘미역돌’에 붙은 잡초를 제거하였다. 이를 ‘몰일’이라고 하였다. ‘몰’은 모자반과의 해조류, ‘몰일’은 몰을 제거하는 일이라는 말이다. 여성 ‘곽주’들이 수심 2m까지 ‘미역돌’에 붙은 잡초를 ‘씨레’라는 도구로 제거하였다. ‘씨레’는 울산광역시 동구 주전동 사람들의 ‘미역돌’ 제초 도구 ‘씰게’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수심 2m부터 10m까지 ‘몰일’은 제주도 출신 해녀들이 일정한 값을 받고 이루어냈다. 잡초를 제거한 ‘미역돌’에는 미역이 그만큼 많이 붙어 자랐다. 

정월과 음력 2월에 미역을 땄다. 보통 ‘곽주’들은 ‘미역돌’ 꼭대기에 붙어 자라는 미역을 낫으로 채취하였고, ‘설낫꾼’들은 물속의 미역을 채취하였다. ‘설낫꾼’은 물미역을 따는 여성 기능인이라는 말이다. ‘설낫’을 물속에 드리우고 한쪽 발로 ‘설낫’을 걸어 휘돌리며 물미역을 땄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나사리 최정숙(1947년생, 여) 씨의 ‘설낫’(2016. 10) / 사진=고광민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나사리 최정숙(1947년생, 여) 씨의 ‘설낫’(2016. 10) / 사진=고광민

따낸 물미역을 여러 개를 묶어서 배 가까운 곳으로 던졌다. 사공은 갈퀴 따위로 물미역 더미를 건져 올렸다. 그리고 미역을 나누었다. 

미역을 배에 싣고 와서 여러 개의 미역 더미를 만들어놓고 나누었다. 이를 ‘짓가리’라고 하였다. 사공은 ‘곽주’마다 신발 한 짝씩 모아 바구니에 담았다. 미역 더미마다 신발을 올려놓았다. 자기 신발이 있는 미역 더미를 신발 주인이 차지하였다. 이를 ‘원짓’이라고 하였다. 사공과 배의 몫으로 미역 한 더미를 차지하였다. 이를 ‘사공짓’이라고 하였다. ‘설낫꾼’ 3명의 몫으로 미역 더미 하나를 받았다. 이를 ‘설낫꾼짓’이라고 하였다. ‘설낫꾼’ 기술을 습득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 마을의 바다에서 일하는 여성 중에서 10분의 1 정도가 ‘설낫’ 기능을 보유했다. 

‘설낫꾼’이 따내지 못하는 물속의 미역은 제주도 해녀들이 따냈다. ‘곽주’들과 해녀들은 서로 6 : 4 비율로 나누었다. ‘곽주’들은 6등분의 미역을 가지고 서로 나누었고, 해녀들은 4등분을 가지고 서로 나누었다. 그리고 제주도 해녀들은 이 마을 갯밭에 있는 성게, 해삼, 전복, 소라, 우뭇가사리 따위는 자유롭게 채취하였다.

물질(2016. 10. 14, 경북 경주시 감포읍 오류리).<br>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제주도 출신 해녀들이 물질하고 있다.&nbsp;/ 사진=고광민
물질(2016. 10. 14, 경북 경주시 감포읍 오류리).
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제주도 출신 해녀들이 물질하고 있다. / 사진=고광민

제주도 출신 해녀들을 만나다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칠암리에서 제주도 출신 해녀 고○○(1942년생, 여) 씨를 찾아갔다. 고씨 해녀는 29세가 되는 해에 이 마을로 와서 해녀 작업으로 생계를 꾸리다가 31세가 되는 해에 이 마을 남자와 혼인(婚姻)하였다. 이 마을 ‘미역돌’은 전통적으로 여러 ‘곽주’들이 1년 주기로 소유하고 있었다. ‘미역돌’에 붙은 수심 2m까지 미역을 ‘설낫미역’, 그 이하의 미역을 ‘물미역’이라고 하였다. ‘설낫미역’의 ‘설낫’은 미역을 베어내는 자루가 기다란 낫이라는 말이다. 고씨 해녀는 해마다 음력 10월 중에 ‘미역돌’ 물미역 밭의 잡초를 ‘기세호멩이’로 맸고,

기세호멩이(길이 25.2㎝, 날의 길이 5.8㎝. 날의 폭 6.4㎝).<br>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칠암리에서 사는 제주도 출신 해녀 고○○(1942년생) 씨가 쓰던 것이다.&nbsp;/ 사진=고광민
기세호멩이(길이 25.2㎝, 날의 길이 5.8㎝. 날의 폭 6.4㎝).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칠암리에서 사는 제주도 출신 해녀 고○○(1942년생) 씨가 쓰던 것이다. / 사진=고광민
기세호멩이(길이 25.2㎝, 날의 길이 5.8㎝. 날의 폭 6.4㎝). / 사진=고광민
기세호멩이(길이 25.2㎝, 날의 길이 5.8㎝. 날의 폭 6.4㎝). / 사진=고광민

그 값으로 품삯을 받았다. 잡초를 매는 일을 ‘돌맨다’, 그리고 그 값을 ‘돌맨값’이라고 하였다. ‘돌맨값’은 그때그때 달랐다. 정월 보름 이전, 고씨 해녀는 ‘미역돌’ 주변에 자라는 ‘참몰’을 땄고, 3분의 1 정도를 품삯으로 받았다. ‘참몰’은 식용 모자반이라는 말이다. 

음력 2월에 ‘곽주’들 중에서 여성 ‘설낫꾼’들이 ‘설낫미역’을 땄고, 물미역은 제주도 출신 해녀들이 땄다. 이때마다 고씨 해녀가 딴 물미역 중 3분의 1 정도를 품삯으로 받았다. ‘미역돌’의 ‘곽주’들은 미역과 ‘참몰’만 소유하였고, 그 이외 해산물은 제주도 출신 해녀들이 자유롭게 딸 수 있었다. 음력 5월부터 8월까지는 우뭇가사리를 땄다. 음력 9월부터 10월까지는 성게와 도박을 땄다. 동짓달과 섣달에는 해삼을 잡았다.  

이 글의 요약은 다음과 같다.

울산광역시 동구 주전동 사람들은 1년 주기로 ‘미역돌’을 개별적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나사리 사람들은 1년 주기로 ‘미역돌’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미역돌’ 수심 2m까지, 소위 ‘설낫미역밭’은 스스로 잡초도 맸고 미역도 땄다. 다만 울산광역시 동구 주전동 사람들은 남성들이 ‘설낫’으로 미역을 땄고,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나사리 사람들은 여성들이 ‘설낫’으로 미역을 땄다.  

‘미역돌’ 수심 2m 이하, 소위 ‘물미역밭’의 잡초 매기와 미역 따기는 제주도 출신 해녀들의 몫이었다. 제주도 출신 해녀들은 그 값으로 일정한 품삯을 받았다. 참몰(식용모자반) 이외의 해산물은 제주도 해녀들이 자유롭게 따면서 생계를 꾸릴 수 있었다. 

조선 시대, 제주 해녀들이 울산과 그 주변 갯마을로 삶터를 옮겨온 배경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조선 시대 때는 제주도 해녀와 그 가족들은 ‘두모악’(頭毛岳) 또는 ‘두무악’(頭無岳)이라고 천대받으며 정해진 마을에서 따로 살았다지만, 오늘날의 제주도 해녀들은 천대받는 일 없이 울산지역 사람들의 마을에서 같이 살고 있다.


[고광민의 제주 생활사]는 제주의 문화와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이니스프리 모음재단’과 함께 합니다.


# 고광민

1952년 제주도 출생. 서민 생활사 연구자.

저서 ▲동의 생활사 ▲고개만당에서 하늘을 보다 ▲마라도의 역사와 민속 ▲제주 생활사 ▲섬사람들의 삶과 도구 ▲흑산군도 사람들의 삶과 도구 ▲조선시대 소금생산방식 ▲돌의 민속지 ▲제주도의 생산기술과 민속 ▲제주도 포구 연구 ▲사진으로 보는 1940년대의 농촌풍경 ▲한국의 바구니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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