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54) 남원읍 의귀리 김현순 어르신 이야기 ②

김현순 어르신은 스물두 살 혼인 이후에야 시어머니의 어깨 너머로 농사를 배우기 시작한다. 보통 어르신 세대의 아이들이라면 농사짓는 것을 보며 자라는 것이 일상인 경우가 많지만, 어르신께 농사는 익숙하지 않았다. 하필 뱃속에 첫 아이도 임신하고 있었던 때였다. 입덧도 심했던 터라 내 몸이 내 몸 같지도 않았다.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울렁거림 속에서 난생처음 마주한 농사는 낯설었다.

“시집오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딸을 임신했는데 시어머니가 과수원이랑 보리농사를 엄청나게 크게 하셨던 거라. 애들 아빠가 교사라서 남원초 발령받았을 때는 주중은 남원에 있지. 그러다 일요일이 되면 애들 아빠랑 같이 아침 일찍 오끼(의귀)로 같이 넘어가. 오끼 가면 아침밥은 내가 준비하지. 아침 치우고 멍석 11개~12개 정도 너는 것도 내 몫이야. 멍석 널면서 또 내가 슬슬 어머니 눈치를 보지. 난 밭에 가기 싫은데 우리 어머니 보리랑 조 갈러 가야겠다고 꼭 내 앞에 와서 이야기해. 그럼 어떡해. 임신했어도 우리 때는 그게 이유가 되나서? 우리 부모님들도 다 임신해도 일은 똑같이 했지. 그렇게 시어머니 따라가. 밭에 들어가면 고스락은 꽉꽉 찌르지. 몰래 울면서 시어머니 따라 보리가마니에 넣고 했지. 보리 말릴 때도 고스락에 얼마나 찔리는 줄 알아? 손에 피 엄청나. 그래도 다들 그렇게 하는 거라 아무 대꾸 없이 그냥 하는 거지.”

농사로 한평생 사신 시어머니의 며느리로 들어간 이상. 김현순 어르신도 농사를 등지며 살 수는 없었단다. 그래도 매일 밭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일주일에 한 번뿐이니 볼멘소리를 하는 것은 생각도 해 보지 않았다. 시어머니 따라 밭에 따라다닐수록 생각보다 농사가 쉽지 않다는 것도, 늘 사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도 농사는 정직했고 내가 노력한 만큼 돌아온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대충하거나 요령을 피우면 반드시 그 결과대로 돌아왔고 성실하고 부지런함은 중년 이후 어르신의 삶의 기조가 되었고 그 바탕은 바로 농사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교사였던 남편은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다른 사람들한테 무언가를 받는 것을 싫어했어. 인색해도 너무 인색했어. 내가 성실히 일한 만큼만 받는 것이 당연하고 무언가를 받으면 그 순간만 달콤할 뿐이지 언젠가는 나에게 독이 된다고 절대 사양했어.”

어르신은 그런 남편이 가끔은 답답해 보이기도 했었지만. 돌이켜보니 그런 남편의 성품은 농사를 어르신 손으로 짓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이해가 되었단다.

남편이 남원초에서 서귀포초, 의귀초로 발령이 나면서 서귀포시 내에 이사를 했다가 다시 시집이었던 의귀로 들어오게 되었고 시어머니와 더 가까이 살게 된 후로는 본격적으로 어르신도 농사일에 뛰어들게 되었다.

“우리 시어머니 남편한테 스페아깡(스페어깡, 미군철제휘발유통)주면 우리 남편도 그거 들고 물 받으러 다녔던 것 같아. 그때는 진짜 스페아깡 많이 보였는데 지금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 이 스페아깡을 나한테도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 그렇게 내가 시집간 해에 마을에 공동수도도 들어왔지만, 막상 물 보급이 막 제대로 되지는 않았어. 그러면 귀하게 받아온 물 어떻게 막 써. 함부로 쓰지 못했어. 그 시대에 길어온 물로 세수하면 그 물 버리지 않아. 모아서 다시 썼어. 그렇게 물을 모아두면 모기가 괴잖아? 그럼 기름 한 방울 떨어뜨리면 모기가 안 괴어. 그럼 그 물 또 쓰고 했지. 그렇게 시집 식구들이 뭐 하나 버리는 것도 전혀 없었고 농사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애들 아빠네 집도 양반 집안이었어. 내가 알기로는 의귀리에 1968년도에 귤나무가 처음 들어왔어. 아마 효돈이 2년 전 먼저 심었고 그 후 남원에도 귤을 심었지. 우리 시아버지도 일본 글을 읽을 줄 아셔서 아버지가 일본에서 묘목 처음 가져와서 심어봤는데 곧 돌아가셔서 그때 바로 (귤 재배가) 이어지지 못했다고 들었어. 그래도 우리 시어머니가 남원으로 온주귤 제일 먼저 가지고 왔다 하셨어. 그 당시에 온주귤보다는 벤줄(병귤), 나스미깡(하귤), 마르메르(금감자)도 꽤 많이 보였는데 지금은 뭐 상품으로 쳐 주지를 않으니까 과수원 제일 끝에 몇 그루 있거나 아예 없는 과수원도 많아. 이렇게 시집 오고 나니 농사랑 과수원에 관심이 많이 생겼던 것 같아.”

나스미깡은 나에게도 워낙 익숙한 품종이었지만 한라봉과 비슷하게 생긴 병귤이나 금빛을 띠는 황색의 금감자 품종은 조금 낯선 품종이었다. 병귤은 1990년대 이후 일본에서 들어온 한라봉에게 그 자리를 건네주게 되었고 마르멜로라는 과실과 향이 비슷하게 난다고 붙여진 마르멜로도 천혜향, 황금향, 레드향 등에 상품성에서 밀려 이제는 일부 농가에서만 소수로 재배되고 있는 듯하다. 

농사가 영 익숙하지 않았던 어르신은 웃뜨르 땅인 의귀리는 회색 땅, 즉 뜬 땅이라 다른 건 몰라도 검질 매는 건 그나마 좀 쉬웠다고 하셨다. 또 이쪽 지역이 특히 귤나무도 잘 자랐고 귤 맛도 달았다. 그래서 농사에 재미를 붙일 수 있었다. 시어머니를 따라 깨 농사도 열심히 해 보았다. 뭐니 뭐니 해도 1973년 처음 깨 농사로 수중에 돈 30만 원이 들어왔을 때는 기분이 묘했단다. 일단 내가 일군 결실이니 보람차고 내 정성으로 번 소중한 첫 돈이라 기억에 남는다 했다. 내가 정성을 들이고 거짓되지 않은 마음으로 농사를 지으니 농사도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농사하는 김현순 어르신은 어느덧 시어머니의 삶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어렸을 때 스웨터와 골덴바지를 입고 학교에 다녔던 어린이 김현순은 빳빳하게 들인 갈옷을 입고 농사를 지으며 중년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시집와서 의귀리 집에 와 보니까 감나무가 진짜 많이 있는 거라. 7월 말 8월 초 되면 감 씨를 씹어 먹을 수 있을 정도까지 감이 익을 때, 그 감으로 감물을 들였어. 그때 감물을 바짝 들여야 옷이 빳빳하게 돼. 그런데 왜 빳빳하게 들이는 줄 알아? 그렇게 빳빳하게 들여야 농사지을 때 벌레나 가스락이 옷을 뚫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해. 난 그것도 몰랐었어. 그런데 또 재미있었던 것은 시집와서 의귀리에서 자는데 아침에 해도 안 뜨는데 우리 시어머니 깜깜할 때 깨워서 감을 따라고 해. 아니 어두컴컴한데 왜 감을 따나 싶었는데 동이 트고 감에 열이 들어가면 감물이 빳빳하게 잘 안 든대. 아. 우리 어른들 진짜 지혜롭다. 이런 생각 들었지. 우리 집에 감나무가 많았으니까 그렇게 감을 따 놓으면 자리돔이랑 바꾸러 사람들이 와. 시집 막 왔을 때 내 기억에 자리 1되랑 감 1되랑 서로 바꿨던 것 같아. 그럼 자리로 바꾸면 뭐 했겠어? 반찬도 해 먹고 자리젓도 담그고 했지.”

감을 따는 7월 말부터 9월은 가장 바쁜 농사철이기도 했다. 감을 따서 감물을 빳빳하게 들여 갈옷을 만들어도 그 옛날에는 그 감물도 금방 빠져버려 감물들이기를 자주 해 줘야 했다. 그래야 하는 것이 그 당시에는 농사를 짓기 위해 쇠막(소외양간)에 소들도 많이 키웠을 때라 소에게 먹일 촐(꼴)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했다. 그런데 그 촐이 9월까지가 부드러워서 소에게 부드러운 촐을 먹이려면 농사에 촐 베는 일까지 더해서 정신없이 바빴다고 했다. 그 부드러운 촐이 억세지기 전에 베어다가 바짝 말려야 했다. 너무 세지면 뻑뻑하게 말려져 소들도 싫어했다. 그래서 9월까지 낫 꾼들 빌려서 빳빳한 갈옷 입히고 촐을 마련하기도 했단다. 그렇게 감물을 들여도 검질 다녀오면 촐에 긁히고 찔레꽃에도 긁혀 감물을 자주 들여야 촐을 베는 사람들도 찔리지 않게 작업할 수 있었다.

서귀포에서 1남 2녀를 낳고 쭉 키우다 딸들이 초등학교 입학할 때 즈음 남편을 따라 제주시에 터를 잡게 된다. 마침 아이들을 제주시에서 공부시키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어르신의 학창 시절, 동생들과 제주시에서 보냈던 추억이 생각나기도 했다. 아이들은 심성이 곱고 성실한 아이들로 잘 자라주었다. 특히 큰딸은 공부도 곧 잘했다. 건축을 배우고 싶어 해 서울에 있는 학교를 보내주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큰 목돈이 들어가야 하니 지금까지의 벌이로는 대학 진학 비용 마련이 조금 힘에 부쳤다.

그제야 어르신은 빌려주었던 과수원을 직접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어르신이 50대 초반이었다. 제주시에서 남원까지 왕복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어르신은 오히려 전혀 힘들지 않았단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내가 땀 흘린 만큼 결실은 잘 익은 귤로 돌아오고, 그럼 아이들이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다 생각했다. 어르신은 더 부지런해졌다. 하지만 역시 새내기 50대의 감귤 농부에게 내 손으로 직접 농사를 지어본다는 과정에서 무엇이든 쉽게 얻어지는 것은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몇 해가 흐르니 귤 농사도 혼자서 거뜬히 할 수 있을 정도로 노하우가 생겼지만, 그 노하우는 돈을 주고 살 수도,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융자받아 학비를 먼저 내고 귤 수확 철이 지나야 삼천만 원에서 사천만 원 정도가 돌아왔다. 그렇게 어르신은 아이들 생활비와 학비를 보태면서 대학을 보냈다. 즉 어르신에게 귤나무는 대학 나무나 마찬가지였다.

어르신이 사는 의귀리는 동백나무도 많았다. 어르신 집에 들어오는 올레는 키가 무척 큰 동백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신기하면서도 재미있는 것이 시어머니가 하셨던 그대로 나도 생활한다는 거야. 아침 일찍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뭔 줄 알아? 마당에 떨어진 동백 씨를 줍는 일이야. 주운 동백 씨는 기름으로 뽑았지. 지금 튀김기름이 나오기 전까지는 유채영 동백이영 기름으로 뽑아서 사용해나서. 특히 고구마튀김을 해 보면 두 기름의 차이를 알아져. 유채 기름은 말랑말랑 식감이라면 동백기름은 바싹 튀겨져서 바삭거리는 맛이 있었지. 동백기름은 식용으로는 볶아서 사용하고 볶지 않고 뽑은 기름으로는 화장품이랑 머리에 발라. 그럼 얼마나 좋게. 여기에 녹차 기름까지 더해서 발라주면 알러지와 아토피에 걸릴 일은 거의 없지.”

어르신은 이른 아침 풋감을 따고 동백 씨앗을 줍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신다. 동백 씨앗은 기름으로 뽑아 자녀들에게도 주고 이웃들하고 나누어 주신다고 했다. 제주시에서 살 때 부녀회와 생활개선회에서 회장을 맡기도 하셨다. 중년 이후에 다양한 활동으로 본격적으로 장도 집에서 담그시고 천연염색도 시작하셨다.

김현순 어르신이 2001년 전국주부교실 제주도지부 남원읍 분회장으로 활동하며 받은 기념패. / 사진=김진경
김현순 어르신이 2001년 전국주부교실 제주도지부 남원읍 분회장으로 활동하며 받은 기념패. / 사진=김진경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르신 집에서 담근 장은 이상하게 장맛이 좋았다. 미국에 가 있는 둘째 딸도 엄마의 장맛이 그리워 미국에 된장 담그는 재료를 직접 만들어 보내주면 딸이 엄마표 된장으로 그리운 고향의 맛을 달래고 있다고 하셨다. 가까이 사는 손녀딸들도 할머니의 된장만 찾는다고 했다. 어르신의 장맛 좋기는 지인들에게도 그 소문이 퍼져 어르신 가족이 먹는 장독 말고도 지인들이 어르신이 장 담그는 날 지인들과 함께 장을 만들어 둔 장독들이 함께 놓아져 있다. 넓은 마당을 둘러보니 젖은 곡식을 가는 풀고레도 보였고 여기저기 시어머니로부터 이어진 흔적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외국영화에 나올 법한 그림 같은 집이었지만 곳곳 제주 어머니의 맛의 흔적이 묻어져 있는 공간이었다.

어르신 집 마당에 있던 풀고레. / 사진=김진경
어르신 집 마당에 있던 풀고레. / 사진=김진경

김현순 어르신은 생활개선회에서 활동하면서 음식은 물론 본격적으로 염색과 옷을 만들어 입으면서 규방공예까지 배웠다. 배운 것들을 하나하나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재미도 있었고 성취감도 있었다. 나이가 들어도 배우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더 컸다. 뭐든 열정과 즐거움이 있었다. 성실하게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은 삶을 대하는 자세와 그때그때 처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인생 교훈을 얻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불평불만 해 본 적 없으셨다.

김현순 어르신이 제작한 공예품. / 사진=김진경
김현순 어르신이 제작한 공예품. / 사진=김진경
김현순 어르신이 제작한 공예품. / 사진=김진경
김현순 어르신이 제작한 공예품. / 사진=김진경
김현순 어르신이 제작한 공예품. / 사진=김진경
김현순 어르신이 제작한 공예품. / 사진=김진경

돌이켜 생각해보니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로 이어진 두 어르신께 배운 삶의 지혜는 어르신의 큰 자산이었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일찍 돌아가셔서 너무나 그리운, 지금도 사무치게 보고 싶은 친정아버지와의 추억과 기억들이 어르신의 삶의 원동력이 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의 이야기 속 종종 드러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함이 나에게도 그대로 전해졌으니 말이다.

맏딸을 정말 예뻐하셨던 아버지는 주말마다 머리를 잘라주셨습니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기억이셨습니다.&nbsp;/&nbsp;ⓒ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br>
맏딸을 정말 예뻐하셨던 아버지는 주말마다 머리를 잘라주셨습니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기억이셨습니다.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 김윤영(이로이로)

육지것에게 들리는 제주의 진한 사투리는 화가 나신 것도 같고 꽤나 투박하기도 하여 인터뷰 때마다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갔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매번의 인터뷰가 제주어 듣기 평가이기에 삼촌들의 표정과 손짓에 더 집중하며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있다.

하도리에서 이로이로라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관련된 여러 클래스들도 운영 중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제주의 콘텐츠들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있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한지 10년 차,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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