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61) 문무병, '태손땅', 한그루, 2022.

1.
2023년 새해가 솟아올랐다. 지구별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기가 있는 곳에서 새해맞이의 신열(身熱)을 앓는다. 지난해 곡절 많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새해에는 지난해보다 새털만큼이라도 좋으니 좀 더 행복한 기운 아래 건강히 자신의 꿈이 이뤄졌으면 하는 기원을 앙가슴에 품는다. 새해의 성스럽고 청량한 기운에 최대한 자신을 겸허히 낮추면서 말이다. 아무리 첨단의 기술사회와 경제지상주의가 인간의 일상을 지배한다고 하지만, 새해맞이 우주 삼라만상의 리듬 속 인간의 길흉화복은 인공지능마저 도통 범접할 수 없는 비의적(秘儀的)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2.
문무병의 에세이 《태손땅》은 새해를 맞이하면서 각별히 다가온다. 우리의 삶 특히 제주의 삶과 현실이 제주의 무속이 지닌 비의성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일상의 차원에서 차근차근 풀어낸다. 그리하여 《태손땅》은 제주의 무속문화를 잘 모르고 있는 독자에게는 입문서로서, 어느 정도 낯익은 독자에게는 제주의 무속문화가 지닌 문화인류학적 가치를 상기시키는 인문 교양서로서 손색이 없다. 무엇보다 저자 문무병은 제주의 무속문화 연구자로서 관련 자료의 축적과 연구뿐만 아니라 시인으로서 종래 서구 근대 시문학 장르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무속문화 연구의 토양을 바탕으로 절로 형성된 ‘굿시’라는 새로운 시 양식을 창출한바, 《태손땅》에서는 문무병의 이러한 면들을 두루 만날 수 있다. 

그러면 책의 제목인 ‘태손땅’은 무슨 뜻일까. ‘태손땅’은 어머니와 신생아를 잇는 탯줄을 태운 재를 묻은 땅, 즉 태를 사른 땅을 가리킨다. 저자는 이 ‘태손땅’은 “나의 뿌리를 내린 땅이라는 ‘본향(本鄕)’이라 한다.”(글머리에)고 하여, 하늘과 땅과 인간과 세상을 구분짓는 것과 차원이 다른 신화적 맥락을 띤 장소임을 거듭 강조한다. 엄밀히 말하면, 제주의 무속신화적 장소의 가치를 띤 곳이 바로 ‘태손땅’으로, “본향은 대지의 배꼽이다. 어머니와 아이를 이어주는 새끼줄, 하늘과 땅과 어머니와 아이를 이어주는 대지의 탯줄이며, 속화된 인간의 땅에 마련된 하나님과 영적인 교류가 가능한 거룩한 장소(聖所)인 것이다.”(21쪽)

3.
이와 관련하여, 제주의 창세신화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지역에서도 신화가 존재하되, 우주 창조와 관련한 창세신화를 만나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것도 해당 지역의 유구한 구연적(口演的) 문화의 양식을 지닌 채 현재까지 지역민의 일상 속에서 전승‧보존‧향유되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문무병이 제주를 ‘태손땅’으로서 제주 신화적 맥락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데 주시하는 것은 제주의 큰굿이다. 

제주 큰굿은 한류의 고대사이며, 탐라사를 재미있게 이야기로 들려주는 장편 서사시다. 큰굿의 초감제는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말해주는 창세신화이며, 제주 사람들이 고양부 삼신인을 탐라왕으로 세워 어떻게 나라를 세웠는가를 글이 아닌 말로 들려주는 탐라국 건국시조신화다. 낮도 이레 밤도 이레 두 이레 열나흘 동안 연행되는 큰굿은 10년에 한 번 볼 수 있는 우리가 가진 정말 굉장한 구전의 역사다.(30쪽)

이쯤되면, 제주 큰굿이 어떠한 문화인류학적‧문학적‧역사적 가치를 지닌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아직도 굿에 대한 무지와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다. 굿을 미개한 토착문화의 전형으로서 인간을 억압하는 마술적 제의로 매도한 가운데 근대(이후) 사회에서 철저히 추방시켜야 할 폐습과 악습으로 재단짓고자 한다. 하지만 굿 본연의 역할과 가치에 대한 이러한 몰이해야말로 인간과 우주를 얼마나 낮은 차원에서 오만하게 대하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해보아야 한다. 이것은 제주의 굿에서 ‘영게울림’과 ‘미여지벵뒤’를 눈여겨보아야 하는 이유다. 

4.
문무병은 제주의 굿과 관련한 그의 다른 글에서도 곧잘 언급하듯, ‘영게울림’의 수행성에 대해 주목한다. ‘영게울림’은 죽은 자와 산 자가 이야기하는 것인데, 굿을 주관하는 심방은 아직 저승으로 편히 떠나지 못한 망자에 빙의돼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어혈진 상처와 아픔을 눈물로 풀어낸다고 한다. 이 과정은 표면상 삶과 죽음의 이별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삶과 죽음은 뚜렷한 경계로 구분되는 게 아니라 서로 소통하는, 망자가 겪은 생전의 역사와 또 다른 역사의 실현임을 간과해서 안 된다. 왜냐하면 “굿은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과 과거의 오해를 푸는 것,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통하게 하는 역사적 만남과 소통”(64쪽)을 수행하는 ‘영게울림’의 과정 속에서 “과거의 억울함을 푸는 한풀이이며 역사적 해원”(64쪽)의 구연(口演)을 실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굿은 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의 통로이면서 제주 사람만이 지니는 인정, 제주 정신의 토대가 되는 미의식, 정서를 만들어 왔다. 제주 정신의 토대는 ‘역사 체험의 정서’, ‘생산 노동의 정서’, ‘비판적 변증법적 정서’를 통하여 완성된 한(恨)의 미학이다.”(65쪽)

이러한 제주 굿의 해원을 수행하는 미의식은 ‘미여지벵뒤’의 공간에서 한층 실감을 갖는다. 고백하건대, 《태손땅》을 읽기 전 ‘미여지벵뒤’란 제주어를 접한 적이 없었다. ‘미여지벵뒤’란, “죽은 망자가 더 갈 데 없는 이승의 끝, 미어진, 버려진, 고사목과 가시나무만 황량하게 펼쳐진 황무지 같은 벌판. 생명이 살아갈 수 없는 저승의 입구이자 산 사람과 망자가 이별하는 곳”(80쪽)이다. 그러니까 ‘영게울림’의 과정을 거친 망자는 ‘미여지벵뒤’를 지나가야 하는데, 이곳은 영계(靈界)에 존재하는 어떤 상상의 공간이 아니라 제주 사람들의 목축과 농경 생활에서 익숙한 삶의 척박한 공간과 포개진다. ‘미여지벵뒤’는 그러므로 현실적이고 매혹적이고 비의적이다. 역사적 해원의 ‘영게울림’을 하면서 망자는 ‘미여지벵뒤’를 맞이하듯, 그곳은 제주의 삶과 분리할 수 없는 제주의 삶의 터전인 제주의 대자연이 펼쳐진 곳이다.

5. 
2023년 새해를 맞아 문무병의 《태손땅》의 행간에서 피어나는 삶의 세속과 성스러움을 곰곰 음미해본다. 과학기술과 의학에 대한 맹신에 속수무책인 21세기에 정녕 우리가 둔감하고 무심해지는 ‘오래된 새로움’의 가치는 무엇일까. 제주가 지닌 ‘오래된 새로움’의 콘텐츠는 무엇일까. 인간의 ‘태를 사른 땅(태손땅)’이 함의한 제주의 무속문화(큰굿과 신화)를 각별히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주에는 한겨울 지나 봄까지 동백꽃이 피고 진다. 제주 심방들은 동백꽃을 들고 굿판을 주관하는데, “동백꽃은 생명꽃, 환생꽃, 번성꽃”(148쪽)이라 한다. 2023년 새해에는 제주의 동백꽃이 지닌 신화적 생명성과 풍요로움이 제주는 물론 세계 곳곳에 흐드러지게 피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문무병의 시 ‘돔박새 운다’의 부분을 읊조려본다.

돔박새 운다 돔박새 운다/새벽안개 속에 돔박새 운다/어둠을 쓸며 어둠을 쓸며/생명꽃, 환생꽃, 번성꽃 물고/어둠을 쓸며 돔박새 운다/돔박새 운다 돔박새 운다/ (중략) /배고픈 새 쌀 주고, 물그린 새 물 주며,/사랑 잃은 새 님 그려/밤비소리 가르며 돔박새 운다
— <돔박새 운다> 중에서


# 고명철

1970년 제주 출생.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4.3문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문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연구와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 계간 <실천문학>, <리얼리스트>, <리토피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는 《세계문학, 그 너머》, 《문학의 중력》,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mcriti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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