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30일 출범한 제주도 행정체제 개편위원회.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지난해 8월 30일 출범한 제주도 행정체제 개편위원회.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스위스는 인구가 870만명에 불과하고, 면적은 우리나라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나라다. 하지만 세계경제포럼(WEF) 2022년 글로벌경쟁력보고서에 의하면 국가경쟁력이 세계 2위이고, 미국 예일대학 등이 발표한 2020년 환경성과지수(EPI)에 의하면 환경성과가 세계 1위이며, 2022년 UN세계행복보고서에 의하면 행복지수가 세계 4위다. 2021년 스위스의 1인당 국민소득은 9만4696달러로 우리나라의 3배에 이른다.

어떻게 스위스 같은 작은 나라가 이처럼 삶의 질이 높은 나라가 되었을까? 대다수의 학자들은 그 이유를 스위스의 직접민주제와 ‘코뮌 자치’에서 찾는다. 언젠가 스위스 전문가 안성호 교수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국민이 스위스 국민보다 더 똑똑합니다. 그럼에도 스위스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잘 사는 이유는 우수한 정치제도 때문입니다. 특히 ‘코뮌 자치’는 스위스 미러클(Swiss miracle)의 원천입니다.”

스위스에는 2018년 기준 2222개의 코뮌이 있다. 코뮌의 인구는 평균 4000명으로 그 규모가 우리나라의 읍면동보다도 작다. 그러나 코뮌의 자치권은 정말 막강하다. 제주특별자치도보다 더 강력한 자치권을 누린다. 

미국의 경제학자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A. 로빈슨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한 국가의 번영과 빈곤을 가르는 요소는 제도, 특히 ‘정치제도’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아마르티아 센은 『자유로서의 발전』에서 우리의 기회와 전망은 본질적으로 어떤 제도가 존재하며 그것이 어떻게 기능하느냐에 달렸다고 역설했다. 제도는 우리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제도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질이 완전히 달라진다.

스위스가 그토록 삶의 질이 높은 나라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코뮌 자치’라는 탁월한 기초자치 제도 때문이다. 스위스인도 같은 생각을 한다. 스위스 자유연구소 소장인 로베르트 네프는 스위스 성공의 비결을 개인과 코뮌의 자유가 결합된 상태에서 경쟁력을 갖춘 코뮌공동체의 건실한 활약에서 찾고 있다. 

오영훈 도정 들어 제주형 기초자치 도입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제주도 역시 제주형 기초자치 도입을 위해 지난해 8월 30일 행정체제개편위원회를 구성했고, 올해 12월까지 연구 용역과 도민 공론화 과정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 제주에서도 스위스 못지않게 높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는 기초자치 모델이 나온다면 좋겠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 대한 적극적인 고려가 필요하다.

첫째, 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중심의 기초자치가 아니라 주민이 중심이 되는 기초자치를 해야 한다. 본래 지방자치의 주체는 주민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지방자치는 대의제를 채택한 결과, 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가 주인공 노릇을 하고 정작 주민은 소외되고 있다. 따라서 광역자치인 제주특별자치도 차원에서는 불가피하게 대의제를 실시한다고 하더라도 기초자치만큼은 지방자치의 본뜻을 살려 직접민주주의, 추첨민주주의를 토대로 하는 주민자치 형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주민이 주체가 되는 기초자치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지난 2018년 ‘제주특별자치도 주민자치위원회 협의회’(이하, ‘도협의회’라고 한다)가 마련한 <읍면동 주민자치 방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도협의회는 T/F팀을 꾸려 ‘주민자치 제도개선 보고서’(이하 ‘보고서’라고 한다)를 작성했는데 보고서에는 제주특별법에 다음과 같은 규정과 읍면동 주민자치조직의 법인격 및 자치권, 읍면동 자치특례 확대 등에 관한 규정을 두는 <읍면동 주민자치 방안>이 담겨 있다. 

① ‘읍면동 주민자치위원회’ 또는 ‘일정 수 이상의 읍면동 주민’이 주민자치조직에 관한 자치조례안을 만들어 도지사에게 주민투표를 청구한다.
② 도지사는 결격사유가 없는 한 해당 읍면동에서 자치조례안에 대한 주민투표를 실시한다.
③ 주민투표에서 가결되면 도지사는 그 자치조례안을 도의회에 발의한다.
④ 도의회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자치조례안을 그대로 의결한다.
⑤ 자치조례안이 없는 읍면동의 주민자치는 도의회에서 통상의 절차에 따라 만든 조례에 따른다.

보고서는 위와 같은 <읍면동 주민자치 방안>이 실시될 경우의 기대효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현행 주민자치제도는 읍면동의 특성이나 차이를 반영하지 못한 채 붕어빵 찍듯이 일률적으로 시행된다는 폐단이 있다. 예컨대, 제주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인구가 2천여 명인 추자면과 제주의 강남이라 불리며 인구 5만여 명인 노형동의 주민자치 여건은 매우 다르다. 그러나 현행 제도로는 그러한 다름을 반영할 수가 없다. 반면, 우리의 제안에 의하면 읍면동마다 저마다의 특성과 자치역량에 맞는 주민자치모델을 결정·실시할 수 있게 된다. 차별적이고 다양한 형태의 주민자치를 꽃피울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보고서 검토를 제안받은 대통령 소속 자치분권위원회는 같은 해 10월 1일 도협의회가 마련한 <읍면동 주민자치 방안>은 정부 방침과 부합하고 제주특별법을 개정하면 실시 가능하다고 했다. 다만, 도민 결정권 존중의 취지에서 제주특별법 개정 추진은 제주도민, 도청 및 도의회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고 회신했다. 중앙정부도 긍정적으로 화답한 것이다.

제주형 기초자치 도입과 관련해 시군자치 부활 주장이 있는데 과연 중앙정부가 이를 수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가 상당하다. 반면 읍면동 주민자치 방안은 정부가 이미 위와 같이 화답한 선례가 있다. 따라서 실현 가능성 차원만 보더라도 시군자치 부활보다는 읍면동 주민자치 도입 가능성이 훨씬 높다.

둘째, 주거와 돌봄 등 주민의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높일 수 있는 기초자치를 해야 한다. 이를테면 제주에서는 주민참여예산, 마을공동체 활성화 예산 명목으로 매년 400억원의 예산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일회성·행사성 사업으로 쓰이고 있어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는 거의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하기야 주민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비효율적으로 쓰이는 예산이 그 돈뿐일까? 그렇다면 그런 예산을 주민 스스로 삶의 질을 높이는 쪽으로 사용할 수는 없을까?

이와 관련, 제주민회의 ‘읍면동 마을기금 제도화’ 주장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읍면동 마을기금이란 국가와 제주특별자치도가 출연하고 읍면동 주민이 공동소유하고 자율적·민주적으로 관리하는 주민 공동자산을 말한다. 기초자치의 한 방안으로 읍면동 마을기금이 제도화된다면 이를 기반으로 읍면동 주민 스스로 주거서비스, 돌봄서비스, 보건의료서비스, 보육서비스, 생필품 공급서비스 등 주민의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높일 수 있는 사업을 펼칠 수 있다. 그 경우 주민의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높이는 기초자치가 실현될 수 있다.

제주에서는 이미 마을 단위에서 주민공동자산을 활용해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사례가 많이 있다. 예컨대 신촌리의 경우 빌라 주택 32세대를 주민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데 그 주택을 무주택 주민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임대해 일부 주민의 집 걱정을 덜어줄 뿐 아니라 연 1억 3000만원의 임대수익도 올려 그 돈으로 마을 운영 경비를 충당한다고 한다. 그 덕분에 신촌리 주민은 리세와 포제비를 부담하지 않는다. 만일에 읍면동 마을기금이 제도화되고 제주 43개 읍면동이 모두 마을기금을 조성해 주거서비스 사업을 펼친다면 제주에서는 집 없는 주민의 한숨을 덜어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임대수익을 주민에게 균등 배당하는 방법으로 주민의 살림살이에도 보탬이 될 수 있다.

신용인. ⓒ제주의소리
신용인. ⓒ제주의소리

위와 같은 두 가지 점에 대한 적극적인 고려와 함께 제대로 된 도민 공론화 과정을 거쳐 주민이 자치의 주체가 되고 주민의 삶의 질이 높아지는 기초자치가 실시되길 바란다. 그렇게 되면 제주도민이 제주의 실질적인 주권자 노릇을 하면서 스위스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높은 삶의 질을 누리는 새로운 제주시대가 열리지 않을까? / 신용인 제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제주민회 공동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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