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62) 조원경, '그림책에 담긴 세상',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20.
황이원, '옛날 옛날 기차가 작은 섬에 왔어요', 박지민 옮김, 섬드레, 2022.

사진=알라딘.
사진=알라딘.

21세기를 준비하는 모임의 「세계 인형극 축제」

1980년대 어느 날 오사카에 공연을 하러 간 적이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심우성 선생님을 따라 ‘만석중놀이’라는 그림자극을 공연하기 위함이었다. 명색은 무대감독이었으나 실제로 무대를 감독할 일이 별로 없었다. 검은 옷을 입고 일사분란하게 무대 장치를 마련해준 극장 직원들 덕분이었다. 

해외여행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대상국이 일본인지라 왠지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돌아와 거의 한 달 넘게 헤맸다. 일종의 문화충격인 셈인데, 우선 동경대 도서관 서고에서 본 한국 자료(일제 시대에 수집한)와 아카몽 근처 중국 서점, 중문과 자체 과도서관에 소장된 중국현대문학 관련 도서 때문이었다. 아직 한중수교 이전인지라 말로만 듣던 중국 현, 당대 문학 서적이 즐비한 모습을 보며 어찌나 부러웠던지. 동경대 도서관 서고에서 먼지 뽀얗게 쌓인 우리 책들을 보며 얼마나 마음 아팠던지. 다음은 오사카 이쿠노구(生野區) 스루하시(鶴橋)에서 재일동포들과 만남이었다. 그 만남은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는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내가 참가한 인형극 축제의 명분이었다. 오사카 시 직속 21세기 오사카의 미래를 생각하는 모임. 그들이 처음으로 주최한 국제행사가 바로 세계 인형극제. 물론 인형극은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데, 그래도 인형극제라니! 

그림책과 동화(童畵)

그림책은 한글과 한자가 잘 어울린 책이다. 화책(畵冊)도 있고, 화본(畵本)도 있지만 그림책만 못하다. 그런데 왠지 그림책하면 동요(童謠), 동시(童詩)처럼 모두 아이들을 위해 아이들 또는 어른들이 만든 동화(童畫)가 연상된다. 굳이 ‘동(童)’을 붙인 것은 아이가 주체이거나 대상이기 때문일 터이다. 하지만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어른 동화(童話)라는 말이 있다시피 그림책 또한 아이들만을 위한 책이 결코 아니다. ‘그림책에 담긴 세상(조원경 지음,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20년)’을 읽으면 알 수 있다.

“그림책은 글자를 몰라도, 글자가 없어도 보기 좋은 책이다. 해석도 마음대로다. 글자 못 읽는 어린이를 위해 출발한 그림책을 우리 글자 모르는 난민도 즐긴다. 최근에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인기가 좋다. 그림책은 연약한 어린이, 사회에서 자기 주장하기 어려운 여성, 노인, 난민을 배려하는 매체이므로 진보적이다. 이런 그림책이 사회운동으로 계속 진보해 나가기를 응원한다.”(286쪽)

책 제목에 ‘한국 그림책 30년사’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1980년부터 2019년까지 선정된 165건의 그림책에 반영된 한국사회사의 단면을 기록했다. 한 해 신문지상을 벌겋게 달군 사건이나 사고는 물론이고 역사, 인권, 환경, 민속, 예술, 정치, 경제, 그리고 희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드러내고 있다. 그림책이 작은 그림 속에서 깊이와 너비의 심오함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인 듯하다. 

하나는 그림책을 만드는 이들의 쟁쟁한 진용이다. 출판사와 작가, 그리고 화가가 함께 든든한 울타리이다. 특히 이름을 대면 알만한 화가와 작품들, 예를 들어 강요배 화가의 그림책 「소나기」가 그러하고, 1987년에 브라티슬라바 일러스트 비엔날레(BIB)에서 상을 받은 강우현 작가의 「사막의 공룡」이 그러하다. 다른 하나는 1981년부터 「어린이권장도서목록」을 발표하면서 어린이 책 문화운동을 펼친 어린이도서연구회가 발전해 1993년부터 지역별 ‘동화 읽는 어른 모임’이 시작된 것처럼 그림책을 사랑하고 연구하며 함께 논의하는 이들이 곳곳에서 우후죽순처럼 솟아났다는 점이다. 경향(京鄕)을 막론하고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안팎으로 부조하고, 창작자와 독자가 호응하면서 1990년대에 어린이 책 전문서점이 생겨나고, 어린이 책 도매상도 등장했다. 이제 ‘그림책’은 ‘어린이문학’과 더불어 결코 소홀히 볼 수 없는, 아니 이미 어른과 아이가 함께 즐기는 책으로 우뚝 섰다.   

사진=알라딘.
사진=알라딘.

인권 그림책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숫자, 보다 정확하게 날짜로 사회의 대사건을 기억하는 데 익숙해졌다. 4.3, 3.1, 6.10, 4.19, 5.18, 6.10, 4.16, 10.29 등등. 물론 다른 나라도 그러하다. 그때 그 사건을 잊지 말자는 다짐일 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책은 그림책, 그것도 타이완의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한 그림책이다. 앞서 서론이 길었던 까닭은 어른들이 읽는 책을 주로 소개하는 「제주의 소리」 「북세통」에 들어오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라고나 할까? 2023년 새해를 맞이하여 필자의 첫 번째 「북세통」을 어린아이와 어른을 위한 인권 그림책으로 시작하니 나름 의미가 있으리라 믿는다. 

지인으로부터 흥미로운 그림책 한 권을 소개받았다.
‘옛날 옛날 기차가 작은 섬에 왔어요(황이원 그림, 박지민 옮김, 섬드레, 2022년)’ 
타이완 국가 인권박물관 주최 제1회 인권 그림책 워크숍 대상작이자 2022년 타이완 금정상 수상작, 2021년과 2022년 연속해서 볼로냐 어린이도서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된 황이원(黃一文)의 작품이다. 상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그것이 ‘인권’상이라는 데 흥미를 느꼈다. 더군다나 타이완의 이야기를 그렸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작가는 “현재 ‘인권 문화원’이 된 과거의 정치범 수용소를 보고 ‘기차’라는 소재로 그 공간이 담고 있는 의미를 표현해 보고 싶었다.”고 했다. 작가는 그림책 뒤에 나오는 ‘창작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49년 공포된 계엄령으로 타이완 국민은 집회, 결사, 언론, 출판의 자유를 잃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많은 사람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올바르지 않은 일을 바로잡기 위해 자신의 삶과 목숨까지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들이 절대 잊혀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으로 이 그림책을 창작하게 되었습니다. 또 역사를 바로 보고,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를 소중히 여기고 지키자는 바람도 이야기 속에 담았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언제 어느 때, 누구의 이야기인가? 어쩌다 계엄령이 공포되었는가? 은유와 환유로 가득 찬 그림만으로는 알기 어렵다. 이는 분명 타이완의 2.28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2.28사건에 대해 먼저 알아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2.28 - 타이완의 참사(慘事) 

2.28은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이자 최초의 민주화운동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한데, 여기서는 타이완의 대표적인 인권 운동이자 반외세 운동인 이이팔사건(二二八事件)을 지칭한다. 공교롭게도 제주에서 4.3사건이 일어난 1947년에 발생했다. 

장제스(蔣介石)가 타이완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하기 이전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성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관으로 천이(陳儀)를 파견했다. 그와 함께 타이완으로 들어온 국민당 소속 관리와 군인들에게 타이완 사람들은 50년간에 걸친 일제 통치에 부역한 식민지 사람들일 뿐이었다. 이에 반해 원, 명, 청조 시절에 타이완 섬으로 이주하면서 타이완 원주민(말레이계를 포함한 16개 소수민족, 일명 고산족高山族)을 산속으로 몰아낸 한인들은 국민당의 배지를 달고 들어온 대륙 출신 한인들을 동포(同胞)로 여겼다. 양자의 인식 차이는 금세 드러났다.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 사람들에게 익숙한 일본어나 사투리(객가어客家語, 민남어閩南語 등 복건성 사투리) 사용을 불허하고 관화官話(북경어 중심의 표준말)만 사용토록 했으며, 행정부의 요직을 외성인(外省人)인 자신들이 독차지했으며, 타이완의 본성인(本省人)들에 대한 차별과 경제적 착취를 일삼았다. 당시 타이완 사람들 말대로 “개가 떠나니 돼지가 왔다(狗去豬來).”

사건의 발단은 1947년 2월 27일, 타이베이시 위안환(圓環) 빌딩 안의 복도에서 당시 전매제도로 인해 개인 판매가 금지된 담배를 몰래 팔고 있던 린장마이(林江邁)라는 과부가 전매국 직원과 경찰의 단속에 걸려 뭇매를 맞고 중상을 입은 사건이다. 그렇지 않아도 과잉 단속과 무차별 폭력에 치를 떨던 이들은 이에 격분해 시위(示威)했고, 그 과정에서 천원시(陳文溪)라는 학생이 경찰이 쏜 총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일부 지역의 시위가 전국적인 항쟁으로 바뀌었다. 

며칠 후 ‘2.28사건 처리 위원회’가 구성돼 계엄 해제, 체포된 시민 석방, 군경 발포 금지한다는 등의 성명서가 발표되면서 일단 진정 국면으로 들어가는 듯했으나 천이는 이미 대륙의 장제스에게 연락해 증원군 파견을 요청한 상태였다. 3월 8일,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당시 상하이에 주둔하고 있던 21군 선봉대가 지룽(基隆)에 상륙하고, 이튿날 주력부대가 바다를 넘어오면서 타이완 전역에 걸친 무차별 학살이 시작됐다. 5월 16일 장제스가 공식적으로 사태 종료를 선언하면서 일단 2.28사건은 종식됐다. 하지만 타이완은 이미 초토화된 후였다. 국민당 정권은 공산당에 패배해 타이완으로 후퇴하기 직전인 1949년 5월 20일부터 대만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실시했다. 계엄체제는 장제스의 아들인 장징궈(蔣經國)가 1988년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리덩후이李登輝(타이완 출신으로 최초의 직선제 총통) 재임 시절인 1991년 5월 폐지됐다. 리덩후이는 직선제 총통이 된 후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했으며, 2.28사건이 50주년이 되는 1997년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2.28 평화공원을 설치하기로 했다. 정부가 발표한 공식적인 사망자는 2만 8천여 명. 하지만 당시 핵심 인물인 천이가 공산당에 투항했다는 죄목으로 1950년 타이완에서 처형된 것 외에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 이후

“옛날 옛날 기찻길이 있었어. 바다를 건너고 논밭을 지나 덜컹덜컹 치익……기차가 이 섬에 왔단다.” 

그림책은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기차는 근대의 산물이다. 특히 식민지 사회에서 기차는 근대화의 탈을 쓴 수탈의 상징이다. 하지만 그림책에 나오는 ‘기차’는 그러기도 하고 또한 아니기도 하다. 동일한 점은 그것이 외부에서 들어온 것, 즉 우리가 아닌 그들의 것이라는 사실이고, 틀린 점은 근대화의 산물이 아니라 독재의 표상이라는 사실이다. 아, 같은 것이 또 하나 있다. 그 기차는 그냥 기차가 아니라 ‘위대한 기차’이다. 그들이 스스로 위대하다면, 우리는 반대로 ‘하찮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기 왔다. 보잘 것 없는 이 작은 섬에 말이다.” 
“위대한 기차가 정한 규칙만 잘 지키면, 너희는 더 강해지고 잘 살게 될 것이다.”

앞서 2.28에서 본 것처럼 ‘위대한 기차’는 ‘하찮은 존재’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결정했으며, 철저하게 사람의 권리를 박탈했다. 하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고 싸우는 이들이 있었다. 1979년 12월 10일 타이완의 민주 인사들은 잡지 메이리다오(美麗島)를 창간하고,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다. 이들이 주최한 민주화 시위에서 민중과 경찰이 충돌하게 되자 정부 당국은 이들을 폭력반란사건으로 규정하고 주최자 8명을 반란죄로 기소해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당시 투옥된 핵심 인물 가운데 한 명인 스밍더(施明德)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후 이들이 만든 정당이 바로 1986년에 창립된 민주진보당(民進黨)이다. 작가가 언급한 ‘인권문화원’이 바로 메이리다오 사건으로 체포된 이들이 갇혔던 감옥인데, 현재 정식 명칭은 ‘징메이 인권문화원구(景美人權文化園區)’이다. 참고로 타이완의 인권문화원은 이외에도 정치범 수용소가 있던 섬 뤼다오(綠島)에도 있다. 

4.3 그림책

제주 4.3항쟁 70주년이 되는 2018년, 4.3 관련 그림책 한 권이 나왔다. 4.3때 집에 남겨둔 곡식 항아리가 아까워 밤에 갖고 나오려다 턱에 총을 맞은 어린 아영의 이야기. 총에 맞아 너덜거리는 턱을 가위로 잘라 평생 말 못 하는 모로기(제주어로 벙어리)로 살아야만 했던 진아영 할머니를 이야기하는 그림책, ‘무명천 할머니(정란희 글, 양상용 그림, 스콜라)’.

“그림도 아프고, 아영이도 아프고, 제주도 아프다. 숱한 사람들의 비명과 울음을 감춘 채 제주는 아름다운 섬으로 다시 피어난다. 4.3 70주년 제주는 비극의 뿌리를 기억하면서 원인과 책임자 규명을 숙제로 안은 채 평화와 화해를 기다린다.” (그림책에 담긴 세상, 245~246쪽)

4.3평화공원에 갔다가 뮤지엄샵에서 두 권의 그림책을 보았다. 하나는 2016년에 나온 ‘나무도장(권윤덕 글, 그림, 꿈교출판사, 평화를 품은 책)’, 그리고 다른 한 권은 2022년에 나온 ‘무등이왓에 부는 바람(김영화, 이야기꽃)’이다. 그림책을 읽고, 보면서 새삼 ‘인권’을 생각했다.  

인권

인권은 사람의 권리란 뜻이다. 사람이 태어나 사람답게 살 권리가 인권이라면 사람이 사람답게 죽는 것 또한 인권이다. 모든 생명체는 물론이고 생겨난 것들은 모두 사라진다는 점에서 삶과 죽음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불공평이 시작되어 사는 내내 빈부, 흑백, 미추(美醜), 고저(高低), 전휴(全虧) 등 선천적인 또는 인위적인 차별의 세계에서 시비와 호오의 대상이 되어 살아간다. 심지어 죽음조차 그러하다. 누구는 무병장수하고 또 누구는 요절한다. 편안하게 모든 이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운명(殞命)하는 이도 있고, 홀로 고독사하는 이도 있다. 가장 참혹한 것은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 그 까닭도 모른 채 죽는 경우다. 이런 불평등, 차별, 소외를 해소하기 위해 사람들은 사회를 이루고, 국가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사회, 국가가 오히려 불평등과 차별의 온상이 될 줄이야. 그리하여 이를 해소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행해진 것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혁명이든 민란이든 아니면 시위든 핵심은 ‘잘’ 살아보자는 뜻 아니겠는가? 잘 먹고 잘살다가 잘 죽을 수 있게 해달라는. 하여 다시 묻건대, 우리는 ‘잘’ 살고 있나? 우리의 사회는 우리의 나라는 우리를 ‘잘’ 살게 해주고 있나? 

‘옛날 옛날 기차가 작은 섬에 왔어요’의 마지막 그림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
“만약 우리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는다면, ‘위대한 기차’는 다시 돌아올 거야.”


#심규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졸업, 동대학원 중문학 박사.

제주국제대 교수, 중국학연구회, 중국문학이론학회 회장 역임. 현 제주중국학회 회장, (사)제주문화포럼 이사장.

저서로 『육조삼가 창작론 연구』, 『도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사』, 『한자로 세상읽기』, 『부운재』(수필집) 등이 있으며, 역서로 『중국사상사』, 『중국문학비평소사』, 『마오쩌둥 평전』, 『덩샤오핑과 그의 시대』, 『개구리』, 『중국문화답사기』, 『중국사강요』, 『완적집』, 『낙타샹즈』, 『인생이 첫 만남과 같다면』 등 7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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