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107) 리춘펑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우산혁명으로 알려진 홍콩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 네 지역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의 평화예술운동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네 나라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 국적에 따른 언어가 제각각 달라 영어 일어 중국어 번역 원고도 함께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오늘의 코즈웨이만 태풍 셸터. 사진=Wikipedia.

“낚시를 하지 않는 단가인(蜑家人) - 코즈웨이만의 태풍 셸터”라는 투어에 참가했다. 당일 우리는 배로 태풍 셸터를 돌며 이 커뮤니티의 이야기를 들었다.

단가인은 중국 남부(복건성 광둥성 하이난성 등)에 사는 대대로 바다 위에서 살아온 인종이다(배는 일본의 야형선과 조금 비슷하다). 예로부터 육상 생활이 금지되고 교육받을 기회도 없으며 사후에도 육상에 매장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등 육상인들로부터 배척받아 왔다.

이번 투어의 안내역을 맡아준 미리암 리(李敏婷)는 샤우 가문의 후예다. 그녀의 일족은 1840년대 영국이 홍콩 섬을 식민지화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7대에 걸쳐 홍콩 섬에 산다. 그 당시 홍콩의 인구는 겨우 4000명 정도였다.

코즈웨이만 태풍 셸터(銅鑼灣避風塘)는 1950년대 이전에는 사실 작은 만이었던 빅토리아 만의 외주(外周, 바깥쪽의 둘레)에 위치한다. 전후 영국 홍콩 정부가 대규모 매립 계획을 실행하면서 만 안은 빅토리아공원이 됐다. 그 둘레는 태풍 셸터로 변모해 점차 단가인들의 수상 취락이 됐다. 1950년대와 70년대에는 어선 외에도 단가인들이 거처로 한 옥형선도 계류되어 있었다. 더불어 음식과 레저의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는 배, 일용품을 파는 배, 천주교 선교사가 운영하는 지저스 보트의 배와 현재도 보존되어 있는 천후묘 등이 떠 있었다고 한다.

당시 태풍 셸터에는 어업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도 있었고 항구 상선에서 일하는 사람, 내항한 영미함선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었다. 단가인들은 또한 종종 물자를 사러 상륙했고 아이들은 육지에서 학교에 다녔다. 또 외국인과의 접촉이 잦아 커피나 밀크티를 즐겨 마시는 등 식문화도 상당히 서구화됐다.

이 투어 전까지 내가 주요 언론에서 얻었던 그들에 대한 인상은 태풍 셸터 커뮤니티가 생활환경이 좋지 않아 자주 불이 났다고 할 정도였지만 미리암은 그것은 사실 오해라고 말했다. 태풍 쉼터에서의 생활은 편안하고 누구나 자유롭게 바다로부터 자립해 생활할 수 있다. 적어도 그녀의 부모 세대의 사람들은 육상에서 생활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이후 영국 홍콩정부의 규제 정책에 따라 모든 옥형선은 등록을 의무화했다. 배가 오래되자 선주는 수리할 여유가 없어 면허를 반납하고 육상에서 생활하는 보상금을 받았다. 그 결과 이 수상 커뮤니티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가인들에 대한 차별적인 정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것을 비정식 주택에 대한 근대적 거버넌스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정부는 해안의 불법 점거자 취락에 대해서도 비슷한 접근을 했다. 정부는 도시 공간을 특정 용도로 통합해 한편으로 감시하기 쉽게 하려고 했다. 어쨌든 '비근대적'이란 '미개발'이나 다름없다는 도시개발 논리에서 이러한 선상생활자들의 삶은 우리가 잊기 쉬운 주택과 사람들의 관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리춘펑

리춘펑 예술가.
리춘펑 예술가.

리춘펑(李俊峰, LEE Chun-Fung)은 홍콩에 거주하는 예술가이자 큐레이터이다. 그의 작품들은 공간적, 역사적, 정치적 맥락에서 공동의 관계를 탐구한다. 그는 <Can We Live Together?>(2014) 등과 같은 큐레이터 프로젝트를 비롯해 <Cycling to the Square>(2010~), <Pitt Street Riot>(2014) 등의 프로젝트에서 참여적인 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홍콩의 풀뿌리 동네인 야우마테이(Yau Ma Tei)에 기반을 둔 커뮤니티-예술 공간인 우퍼텐(Woofer Ten, 2009-2015)을 포함한 여러 예술 이니셔티브의 공동 창립자였다. 한편, 그는 동아시아 멀티미팅(Multiple Meeting, 2012-2013)과 <Art/Activist-in-Residence>(2011-2015)와 같은 프로젝트와 함께 지역 간 예술/활동가 교류에 힘쓰고 있다. 


ビクトリア・ハーバーに浮かぶ水上集落
李俊峰

写真1 今日のコーズウェイベイ台風シェルター

「釣りをしない蜑家人~コーズウェイ湾の台風シェルター~」というツアーに参加した。当日、私たちは船で台風シェルターを巡りながら、このコミュニティの話を聞いた。

蜑家(タンカ)とは、中国南部(福建省、広東省、海南省など)に住む、代々海の上で暮らしてきたエスニック・グループだ(船は日本の「屋形船」に少し似ている。)古来より陸上での生活を禁じられ、教育を受ける機会もなく、死後も陸上に埋葬することを許さないなどして、陸上の人間から排斥されてきた。

今回のツアーの案内役を務めてくれたミリアム・リー(李敏婷)は、蜑家の末裔である。彼女の一族は、1840年代にイギリスが香港島を植民地化した時に遡る七代にわたって香港島に暮らす。その当時、香港の人口はわずか4,000人ほどだった。

コーズウェイ湾台風シェルター(銅鑼湾避風塘)は、1950年代以前は実は小さな湾だったビクトリア・ハーバーの外周に位置する。戦後、イギリス香港政府が大規模な埋め立て計画を実行し、湾内は「ビクトリア・パーク」になった。その外周は台風シェルターに変貌し、次第に蜑家の水上集落となった。1950年代から70年代にかけては、漁船の他にも、蜑家が住処とした「屋形船」も係留されていた。加えて、飲食やレジャーのエンタテインメントを提供する船、日用品を売る船、カトリック宣教師が運営する「ジーザス・ボート」の船や、現在も保存されている「天后廟」などが浮かんでいたという。

当時の台風シェルターには、漁業で生計を立てる人もいれば、港の商船で働く人、来航した英米艦船で働く者もいた。蜑家人はまた、しばしば物資の買い出しで上陸し、子どもたちは陸で学校に通った。また、外国人との接触が多かったため、コーヒーやミルクティーを好んで飲むなど、食文化もかなり欧米化された。

このツアーの前まで、私が主要メディアから得ていた彼らへの印象は、台風シェルター・コミュニティは生活環境が悪く、よく火事が起きたいうほどのものだったが、ミリアムは、それは実は誤解だと言った。台風シェルターでの生活は気楽で、誰もが自由に海から自立して生活することができる。少なくとも彼女の親の世代の人々は、陸上で生活することを望まなかったと彼女は語った。しかしその後、イギリス香港政府の規制政策により、すべての屋形船は登録を義務づけられた。船が古くなると、船主は修理する余裕がなく、免許を返上して陸上で生活する補償金をもらった。その結果、この水上コミュニティーは今はもう存在しない。

これは蜑家の人たちに対する差別的な政策だと思う人もいるかもしれない。しかし、私はむしろこれを「インフォーマル住宅」に対する近代的ガバナンスの結果だと考える。実際、政府は海岸の不法占拠者集落に対しても同様のアプローチをとったのだから。政府は都市空間を特定の用途に統合し、一方で監視しやすくしようとしていた。いずれにせよ、「非近代的」とは「未開発」に等しいという都市開発の論理において、こうした船上生活者の暮らしは、私たちが忘れがちな住宅と人々の関係における新たな可能性を見せてくれるものなのだ。


維港上的漂浮聚落 

今天的銅鑼灣避風塘(維基百科)  Causeway Bay Typhoon Shelter Today (Wikipedia)

前陣子參加了由WMA主辦的「不打魚的蜑家人── 銅鑼灣避風塘導賞」。這原是其展覽「隔離(個)島」(Island) 的週邊活動。當天我們一行人坐著小艇,一面沿著避風塘外圍環繞巡航,一面聆聽這避風塘的古往今昔,認識這曾經蓬勃的「蜑家人」社群。

蜑家人(Tanka)是一個歷史相當久遠的族群,他們世世代代生活在海上,主要分佈在南中國沿海地區(如閩浙、廣東、海南)。自古以來蜑家人便被岸上人排斥,如禁止他們上岸生活,沒有讀書識字的機會,甚至在死後亦不得在陸地埋葬,這飽受歧視的情況一直要到近代才有改善。

這場社區遊的主講者李敏婷(Miriam Lee)本身是蜑家人後裔,祖上七代均居住在香港,最早可追溯自英國人初佔領香港島時,即1840年代。據記載,當時香港島人口只有4000多人,Miriam的祖先或有可能是當中一份子。(但由於沒有族譜記載,無法確定是否在此前已定居於此。)

今天,這一個位於維港上的銅鑼灣避風塘用作主要停泊遊艇,然而,在戰前這裡其實是個小海灣,戰後港英政府進行大型填海工程,海灣被填平成「維多利亞公園」,外圍則改建作避風塘,並漸漸吸引漁民及蜑家人聚居,發展人數眾多的海上村落。當時,避風塘裡除卻停泊漁船,一部分則為「住家艇」。此外,聚落裡還有提供餐飲小食,消閒娛樂的小艇,有售賣日常用品的「水上雜貨店」,由天主教傳教士開設的「耶穌艇」,以及一艘仍保留至今的「水上天后廟」,可謂各式各樣,應有盡有。

避風塘內一部分人以打魚為生,一部分人則為港口上的商船工作,也有一些會為來訪的英軍、美軍軍艦工作,如幫忙修繕船身。另外,他們亦不時上岸補給,如購買物資、打水,小朋友會到岸上上學,有需要時亦會到醫院看西醫;由於多接觸外國人,他們的飲食文化亦相當西化,會飲咖啡奶茶,吃意大利粉等。

其實過往我對這社群認知不多,從媒體獲得的印象是避風塘內衛生環境惡劣,又常有火災,但Miriam指這其實並非事實,據她的認知,避風塘內水質清澈,亦沒聽過曾發生嚴重火災(不過若遇上大型颱風時便的確較危險)。而且,避風塘內生活寫意,各人自由自在,靠海吃海,自力更生。她認為至少是在她父母那年代,若非迫不得以,一般都不願上岸。然而,後來由於港英政府推出管制政策,各艇戶需登記牌照,當船舊了,無力維修時便不得不把牌照交出,領取賠償到岸上生活。因此,此一海上聚落今天已不復存在。

一些讀者或覺得這或許是陸上政權針對蜑家人的歧視政策?但我認為,這其實較多源於政府對「非正式房屋」的「治理」,因當時政府對岸上的寮屋聚落其實也有採取相似做法。這類管制主要是為了將空間整合到特定用途,同時亦讓管治權力更容易進入到這類聚落中。試想想若警察想進到避風塘裡拘捕疑犯,那不會是一件容易的事。無論如何,對於一種「非現代」即為落後的城市發展邏輯,蜑家人的故事讓我們認識到「現代」的另一種可能性,與及人與人之間一些或已被遺忘的關係。


Floating Village on the Victoria Harbor

Recently, I participated in a tour titled "Tanka Who Don’t Fish - Causeway Bay Typhoon Shelter". On that day, we took a boat riding around the typhoon shelter and listened to the stories of this community.

Tanka 蜑家, is an ethnic group in South China (such as Fujian, Guangdong and Hainan) who have been living on the sea for generations (a bit similar to the "Houseboat" えぶね  in Japan), Since ancient times, they have been repulsed by the people on the land, for example, they are forbidden to live on shore, they do not have the opportunity to receive education, and some are not even allowed to be buried on land after their death.

Miriam Lee 李敏婷, who was invited to lead this tour, is the descendant of Tanka. Her family has lived in Hong Kong for seven generations, dating back to the British colonization of Hong Kong Island in the 1840s, in which the population was just around 4,000 at that time. 

Causeway Bay Typhoon Shelter 銅鑼灣避風塘, located in the periphery of the Victoria Harbor, was actually a small bay before the 1950s. After the war, the British Hong Kong government carried out a large-scale reclamation project, and the bay was filled in as "Victoria Park", the outer area was converted into a typhoon shelter, which gradually became the floating village of Tanka. In the 1950s to 70s, not only fishing boats were moored in the shelter, but also "houseboats" which Tanka took as home. In addition, there were different kinds of boats that provided food and drink, leisure entertainment, selling daily necessities, as well as a "Jesus boat" run by Catholic missionaries and a floating "Tin Hau Temple" that has been preserved to this day.

At that time in the typhoon shelter, some people made their living by fishing, while others worked for the merchant ships in the harbor, some worked for the visiting British and American warships. Tanka people also went ashore to buy supplies frequently, and children went to school. In addition, due to their frequent contact with foreigners, their food culture is also quite westernized, such as they like to drink coffee and milk tea.

Before this tour, my impression from the mainstream media to them is that the typhoon shelter community had poor living conditions and there were often fires, but Miriam said this was in fact a misunderstanding. Life in the typhoon shelter is easy, and everyone is free, living off the sea and being self-reliant. She thinks that at least in her parents' generation, people did not want to live ashore. However, later, due to the regulatory policy of the British Hong Kong government, all houseboats were required to register. When the boats became old, the boat owners could not afford to repair them, so they had to surrender their licenses and take compensation to live ashore. As a result, this floating community no longer exists today.

Some may think that this is a discriminatory policy against the Tanka people. However, I think it is more a result of the modern governance of “informal housing", as the government actually took a similar approach to the squatter settlements on the shore. Here, the government was trying to integrate the urban space into specific uses and, on the other hand, make it easier to monitor. In any case, for the logic of urban development where "non-modern" means "under-developed", the life of these boat dwellers allows us to see another possibility of housing and relations between people that we might forg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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