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55) 구좌읍 하도리 고홍임 어르신 이야기 ①

“어르신, 몇 년도에 태어나셨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나? 상대방이 마흔이면 나는 마흔 한 살, 쉰이면 쉰 한 살.”

2:8로 넘긴 말끔한 백발머리, 172cm 정도의 늘씬하고 다부진 체격, 깊은 주름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독수리 같은 예리한 안광, 신발까지 올 블랙으로 단정하고 정갈하게 갖춰 입으신 착장. 

댁에서 멀지 않은 인터뷰 장소에서 약배전(Light Roast)으로 볶은 게이샤원두로 내린 커피를 드시며 인터뷰를 시작한 어르신. 나는 하도리의 고홍임 어르신(출생년도 미상)이 내뿜는 아우라에 오늘의 인터뷰가 이제껏 내가 만나왔던 어르신들과의 인터뷰와는 그 결이 같지 않을 것임을 짐작했다. 

대부분의 인터뷰 시작을 출생년도를 묻는 것으로 시작하는 나는 어르신의 대답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인터뷰 말미 어떻게든 어르신의 출생년도를 캐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하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구좌읍 하도리에서 태어 난 고홍임 어르신이 지금 살고 계신 곳은 어르신이 태어난 집 터였다. 태어난 곳에서 아직까지 살고 계신 어르신을 만난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버지가 2대 독자라 조부모께서는 당연히 아들 손자를 바라셨다. 부모님이 혼인 후 누님이 먼저 태어났고 다음 고홍임 어르신이 태어나셨다. 아홉 남매 중 첫 아들이었던 어르신은 ‘독자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남동생분들이 일찍 생을 마감하다 보니 원치 않게 독자가 되어 버렸다’며 오히려 유머도 보여주시며 긴장된 인터뷰 분위기를 완화시켜주셨다. 

보통 어르신 세대분들이 살아오신 80여년 전의 제주는 농사를 기반으로 한 삶을 사셨기 때문에, 당연히 어르신의 부모님께서도 농사를 하셨을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부모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여쭤보았다. 하지만 어르신이 꺼내주신 대답은 예상을 빗나갔다.

하도리 고홍임 어르신. / 사진=김진경
하도리 고홍임 어르신. / 사진=김진경

“우리 아버지는 소위 말해 농사는 거의 안 지었어. 그 당시가 일제시대니까 선박을 이용해 일본을 왔다 갔다 하며 물건들을 싣고 오가며 돈을 버셨어. 일본을 왔다 갔다 하니 부산에서도 사셨지. 그래서 나도 어렸을 때 부산에 조금 살았어. 6.25사변 이후 낌새가 심상치 않아 그때 제주에 돌아왔는데 바로 4.3사건이 이어지면서 우리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지. 4.3때 수배 내린 사람들 서른세 명을 부산으로 밀항을 시켜주기도 했어. 바로 수배령 내려졌고 당시 24톤이었던 아버지 배도 곧 압수당하셨어. 아버지 참 허무하게 살다가 45세에 돌아가셨지.”

어르신이 학교에 입학할 시기는 보통학교에서 국민학교로 전환된 첫 해였다. 어르신은 아버지 덕분에 다른 친구들은 만져보지도 못한 운동화를 신고, 등교할 수 있었다. 당시에 고무신도 없어 짚신을 신고 다니는 친구들이 더 많았고 비가 오면 너나 할 것 없이 신발을 벗고 맨발로 학교에 오는 일도 흔했다. 비가 오면 고홍임 어르신 역시 맨발로 학교를 가셨단다. 비교적 부유하게 자랐을 법 한데 왜 맨발로 갔는지 의아했다가, 곧 흙탕물에 아버지가 주신 귀한 운동화가 더렵혀진다고 생각해 보니 바로 이해가 됐다.

아버지께서 일본에서 돈을 벌어 오기도 하셨지만, 어르신의 할머니는 당시 하도리에서 이름 난 대상군 해녀셨다. 함흥까지 출가 물질을 다녀오실 정도라고 했다. 출가 물질을 다녀오시면 천 평(3305.7㎡)짜리 땅을 사실 수 있었고 이렇게 마련한 천 평짜리 밭이 꽤 많아 어렸을 때 먹고 사는데 큰 불편함은 없었다 했다. 

“아버지가 일본을 다니셨기 때문에 우리 어머니는 남편 뒷바라지를 챙겨드리지 못했어. 우리가 아홉 남매였으니까 아이들 키우기에도 벅차셨지.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고모까지 모두 우리 아홉 남매를 키웠어. 봐봐, 아이들 아홉에 어른이 네 명이면 나와 할아버지가 상 하나를 받는다고 해도 우리 가족이 함께 밥 먹으려면 상이 몇 개가 필요할 것 같아? 적어도 3개는 밥상이 필요해. 그리고 식구가 많다 보니 아침, 점심, 저녁밥 차리고 치우는 걸로 하루가 다 지나가. 어른 넷이 자식들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했어.”

어른들이 자식들을 먹이고 키우는 일로 모두 힘을 합쳐 하루하루를 고생하며 살아온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봐 온 첫째 아들의 무게 탓일까. 어르신은 나중에 본인이 결혼해서는 아이들을 많이 낳지 않겠다고 생각하셨단다. 아마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까지 손을 보태 아이들을 키우며 고생하는 것을 본 고홍임 어린이는 훗날 본인도 가정을 꾸려 아이가 생기면 어머니를 또 고생시켜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리라.

“당시에 간식이라고 하면 바다에서 해 오는 것들 그런 게 간식이었어. 고구마 저장했다가 그것도 먹고. 아, 우리 할아버지께서 육지 갔다가 땅콩 종자를 사고 오셔서 우리 집에서는 땅콩 농사도 지었어. 아마 당시에 땅콩 농사 지은 곳이 우리 밖에 없었을 거야. 우리만 땅콩 했어. 다른 집에서는 안했지. 그 땅콩 파종하면 방아에 찌어서 땅콩죽 해 먹었지. 그 땅콩죽이 얼마나 고소하고 맛있었는데. 지금 그런 땅콩죽 맛 안나.”

고급 종자인 땅콩을 다른 집에서는 심지 않은 이유는 이렇게 추측된다. 보통 당시에는 밥상에 오르는 음식들과 직결되는 농사가 우선 순위였다. 보리, 조, 메밀, 콩처럼 주식이나 장을 마련하기 위한 농사가 우선이었고 그 다음에는 돈으로 쉽게 바꾸기 용이한 작물 재배였을 것이다. 비교적 밭이 많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덜했던 어르신 집은 그나마 땅콩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여유 정도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도국민학교 첫 번째 입학생인 고홍임 어르신은 5~6학년 때 철학과 수필을 좋아하시는 선생님의 영향을 받으셨다 했다. 처음에는 철학을 읽어도 이해가 안됐다. 마침 선생님께서 이웃집에서 살고 계셔서 책을 읽어주시기도 하고 설명도 해주셔서 철학에 상당히 매력을 느꼈고 좋아하게 됐다. 그래서 한 때 철학자를 꿈꾸기도 했단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세화중학교와 세화고등학교에 입학하셨다. 중학생 때는 시와 수필에 관심이 많았다. 버스가 없었던 시절, 편도 40분씩 걸어서 통학 하는 것은 보통의 일상이었는데. 당시 시내에 가려면 군대 화물 트럭을 타야 하는 시기였다. 어르신의 기억에도 고등학교 시절까지 버스는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40분씩 왕복 80분을 걷는 그 시간 동안 십대 고홍임의 머릿속에는 어떤 시와 글귀들로 가득 차 있었을 지 문득 궁금해졌다.

당시에는 돈이 없으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시대였고 학교에 다닌다고 해도 도시락까지 싸고 다닐 수 있는 형편이 되는 친구들도 많지 않았다. 대부분 도시락을 싸고 오지 못하는 친구들이 다반사였다. 여기에 봄·가을, 보리 파종과 보리 수확 시기가 오면 일손을 보태기 위해 학교에 오지 못하는 친구들도 많았단다.

부모님께서 사범학교로의 진학을 권유하셔서 공무원의 꿈을 갖고 대학 준비를 하려는 찰나,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밭도 넘어가는 상황에서 대학 입학의 길은 접어두고 농사일을 같이 도울까도 했지만, 어르신에게 농사는 게을러 보였다. 농사보다는 시내에 들어가 공장 취직을 결심하셨다. 

농사가 게으르다는 표현을 쓰셨지만 아마도 어르신은 마음이 급하셨던 것 같다. 생육기간이 긴 농사는 파종 후 매일 보살피며 공을 들이며 수확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수확 시기까지 기다릴 마음의 여유가 없으셨던 것 같다. 가세가 기운 상황에서 맏아들로서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집안에 보태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농사를 짓는 본인의 모습이 게으르다 하셨던 것 같다. 

중학생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던 어르신은 시내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지인이 운영하는 옵셋인쇄소에서 극장에 올라가는 영화 포스터 간판을 그리는 일도 하셨단다. 그 당시에 제주에서 유명한 극장이 세 군데 있었는데 제일극장, 중앙극장, 제주극장이었다. 이곳 중 가장 큰 제일극장은 영화 포스터를 2층에 올려 달 정도로 크게 그렸다. 혹여 그때 당시 찍어 둔 사진이나 그림이 있냐 여쭤보니 없다고 해서 너무 아쉬웠다.

고홍임 어르신의 젊은 시절 모습 사진. / 사진=김진경
고홍임 어르신의 젊은 시절 모습 사진. / 사진=김진경

청년 고홍임은 시내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다시 하도리로 들어오게 된다. 아버지 삼년상을 치르자마자 바로 군 입대를 했고, 그때 어르신 나이가 스물 세 살이었다 하셨다. 대구 영천에서 헌병으로 3년 복무하다 월남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다행히 사단 사령부였기 때문에 베트남의 제일 안전한 곳으로 배치되었다고 한다. 베트남에서 딱 일 년 복무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8월 12일 날 부산항에서 출발하고, 퀴논항에서 출발해 일 년 만인 8월 12일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의 땅을 밟는 아침, 어르신은 여느 날이나 마찬가지로 아침식사하고 갑판 위에 올라갔다. 저 멀리 한라산이 보였다. 어르신이 어렸을 때 부산에서 바라 본 제주도였다. 내 고향 제주도, 한국에 무사히 들어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동료들에게 저기 바다 위 보이는 섬이 제주도라고 안내해 주었다. 다른 동료들은 제주도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르신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수평선의 섬이 제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한국에 금방 도착한다는 선내 방송이 나오자 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르신은 귀국 후에도 군 생활을 몇 년 더 하셨단다. 팔 년 정도 군 복무를 한 후 제주에 내려왔다. 군 복무 중 얻은 아들과 제대 후 8살 터울의 아들을 낳아 두 명의 자식이 있었지만 오랜 타지 생활에 어르신께 맞는 일은 육지에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제주에 오고서는 일 년 후 망탱이 하나 짊어지고 다시 육지로 나가셨단다. 육지에서 당구장도 몇 년 해 보고 이것저것 해 보았지만 결국 다시 제주로 들어왔다.

“나 태어났다고 했을 때 우리 할아버지가 기뻐했는지 안했는지는 내가 보지 않았으니까 몰랐는데, 군 복무 중 내가 장남을 낳았을 때 할아버지가 너무 좋아하셨어. 나는 아이를 많이 낳고 싶지는 않았는데 하루는 할아버지가, 하루는 할머니가, 하루는 나하고 같이 사는 사람이 계속 이야기해서 8년 터울 아들을 낳았지. 그렇게 육지 생활을 하고 내가 다시 제주에 왔을 때가 내 나이 사십대 말이었는데, 오니까 외로웠어. 아니 지금까지 상당히 외롭게 살았어. 우선은 말(話). 더군다나 제주에 오니 대화가 더 한정되었고.”

사십대 후반 제주에 돌아와서 시작한 농사는 처음엔 일머리가 없어 사람을 얻어서 하셨단다. 그래서 당연히 소득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어르신은 효율적으로 농사가 잘 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보기로 한다. 책과 전문 문헌 자료, 실험 자료, 주위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며 파종하는 시기를 조절해 보면서 해충을 효과적으로 박멸하는 방법도 알아냈다. 농촌지도소에서 강의 요청이 와 그 방법을 전파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충을 죽일 때 효과적으로 약을 치는 시기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될 수 있으면 낮에 약을 치면 별 효과가 없다 했다. 해가 뜬 후 30분 사이에 처리를 하여 해충을 질식사 시켜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는 방법, 여름의 경우 저녁 7시 40분에서 8시 10분 일몰사이 어스름한 그 30분의 짧은 시간이 매우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 이 여름날의 일몰시간의 해충이 농작물에 제일 피해를 많이 주기도 하지만 이 때 해충을 퇴치하기 가장 효과적인 시기라는 것은 어르신이 연구해서 알아 낸 결과다. 

제주에 와 본격적으로 농사를 연구하며 한 것이 대략 사십 여년 전이었고, 당시 하도에서는 어르신이 당근을 처음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후 하도리도 대대적인 당근농사 지역이 됐다. 어르신 말에 의하면 당근은 비교적 농사법이 수월했고 김만 잘 메주면 되었다고 한다. 혹여나 수확이 시원찮은 해가 발생하면 다음해에는 파종을 열흘 단위로 해 보면서 어느 시기에 파종을 하면 수확한 당근의 질이 제일 좋은지도 체크해 보셨다. 그렇게 두 해 정도 지나고 나니 질 좋은 당근을 수확하는 시기와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런 공으로 작목반 협의회장을 맡으시기도, 관련 토론회도 토론자로도, 강의도 하시게 되었단다. 그렇게 어르신의 농사 경력은 15년으로 비교적 짧지만 공은 컸다.

여기까지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왜 어르신이 고향에 들어와 더 외로웠다고 하시는 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철학을 좋아하고 글쓰기와 그림에 재능도 있었고 평범한 농사꾼도 아니셨다. 여기에 헌병으로 군 생활도 하셨고 당근 농사를 하며 연구했던 이야기를 들으니 거시적인 안목과 예리함을 기본으로 관찰력도 매우 높으신 분이라 생각 들었기 때문이다. 리더로서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본인은 마을에 어울리는 이웃도 없고 외로웠던 중년의 시기를 보내셨단다.

“네?? 어르신이 군 수사관이셨다고요?”

인터뷰 중반이 지났을 때 즈음, 헌병 모자와 완장을 차고 있는 내가 알고 있었던 이미지의 헌병이 아닌 사복 차림의 군 수사관의 고홍임 어르신을 마주하게 되었다. 군 수사관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그때서야 2:8로 말끔하게 정돈된 머리와 정갈한 올 블랙의 옷차림의 어르신이 뿜어내는 아우라가 바로 수긍이 되었다. 

고홍임 어르신이 군 수사관으로 복무하던 시절 모습. / 사진=김진경
고홍임 어르신이 군 수사관으로 복무하던 시절 모습. / 사진=김진경
베트남 파병 사진. / 사진=김진경
베트남 파병 사진. / 사진=김진경

인터뷰 초반부터 나에게 본인은 산전수전 하나도 겪지 않았고 게으른 사람이라고 하셨다. 이제껏 뭐 하나 진득하게 하지 못하고 실증도 잘 내는 사람이라고 인터뷰 내내 재차 말씀하셨던 어르신. 군 수사관이셨던 어르신이 하시는 말씀을 나는 이제야 이해를 했다. 나는 더 이상 어르신이 몇 년도에 태어나셨고 올 해 몇 세이신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궁금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나보다 고작 한 살 많은, 군대 시절 내 앞의 어르신이 겪었던 이야기와 50대 이후 어르신의 중년 이후의 삶이 더 궁금해졌다.

청년의 미소를 가진 삼춘과 만나 공감도가 높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삼촌의 나이를 잊어버렸습니다.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청년의 미소를 가진 삼춘과 만나 공감도가 높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삼촌의 나이를 잊어버렸습니다.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 김윤영(이로이로)

육지것에게 들리는 제주의 진한 사투리는 화가 나신 것도 같고 꽤나 투박하기도 하여 인터뷰 때마다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갔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매번의 인터뷰가 제주어 듣기 평가이기에 삼촌들의 표정과 손짓에 더 집중하며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있다.

하도리에서 이로이로라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관련된 여러 클래스들도 운영 중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제주의 콘텐츠들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있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한지 10년 차,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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