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준비는 이미 되어 있다

‘소리시선’(視線) 코너는 말 그대로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란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집필하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주요 현안에 따라 수요일 외에도 비정기 게재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글
故 석주명 선생. 사진 제공=서귀포시 ⓒ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故 석주명 선생. 사진 제공=서귀포시 ⓒ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서귀포시 토평 네거리를 지나다 보면 제주학의 선구자 나비박사 석주명(1908~1950) 기념비가 있다. 제주에서 석주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2000년 제주전통문화연구소가 주최한 ‘제주학 연구의 선구자 고 석주명 선생 재조명’ 학술 세미나부터였다. 이후 여러 차례의 학술 세미나와 관련 용역사업이 이뤄지면서 지금은 제주가 석주명 연구의 중심이 되고, 서귀포가 석주명 기념사업의 메카임을 자임하고 있다.

석주명은 민족의 앞날에 먹구름이 드리우던 대한제국 말기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배우고 가르치며 세계적인 나비학자가 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새 나라를 건설하는데 헌신하다가 한국전쟁 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우리나라 나비를 250여 종으로 분류하여 우리말 나비 이름을 지었으며, 우리 지도와 세계지도에 나비분포도를 그려냄으로써 자타가 공인하는 나비 박사가 되었다.

석주명이 제주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36년 여름 한 달 동안 제주에서 나비채집을 하면서였다. 제주의 독특한 자연과 문화에 매료된 그는 1943년 4월부터 2년 남짓 서귀포 토평에 있는 경성제국대학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의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제주의 자연, 방언, 민속, 인구, 역사, 문화 자료를 수집하였다. 해방이 되자 그는 이를 바탕으로 6권의 제주도총서와 27편의 제주도 관련 글을 남겼다. 그는 누구보다 제주를 잘 알기에 스스로를 반제주인이라 하였고, 사람들은 그를 제주도박사라 하였다.

석주명은 나비, 에스페란토, 제주도 연구를 통해 지역적(local)인 것이 민족적(national)인 것이고, 세계적(global)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그는 제주어가 옛 우리말임을 알렸고, 배우기 쉬운 세계 공용어인 에스페란토를 세상에 보급하기에 힘썼다. 그가 떠난 지 70여 년이 지났지만, 지역과 민족과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던 그의 삶과 학문은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석주명은 ‘제주적인 것’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본 인물이다. 그는 일찍이 제주의 자연과 문화가 귀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하루바삐 제주도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연구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누군가 그것을 행할 것을 기다리지 않고, 곤충학도였던 그가 직접 제주의 자연뿐만 아니라 인문사회 분야 연구에 뛰어들어 제주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제 제주도가 나서서 석주명의 위대한 삶과 업적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 제라한(제대로 된) 석주명기념관이 세워져야 한다. 석주명선생기념사업회에서 2009년에 기념관을 건립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석주명기념관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2015년 영천동이 석주명을 테마로 한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에 선정되면서부터다. 그 사업은 총 58억원을 투입해 기초생활 기반 확충 사업과 석주명기념관 건립 등 지역경관 개선과 지역주민 역량 강화 등을 2021년까지 추진하는 것이었다.

서귀포시 영천동에 위치한 석주명 선생의 연구실. 사진 제공=서귀포시 ⓒ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서귀포시 영천동에 위치한 석주명 선생의 연구실. 사진 제공=서귀포시 ⓒ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서귀포시는 이를 계기로 석주명기념관 건립을 위해 2015년 3월 서귀포시장을 포함한 3인 공동위원장과 전문가 및 지역주민들로 이뤄진 ‘석주명선생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추진위는 석주명의 업적과 유적 조사, 기념관 입지 선정과 기본계획 수립, 연구 서적 등 유품 확보와 전시, 기념관 활용방안 등을 논의하고 결정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당시 서귀포시는 이제부터 석주명기념관이 본격 추진된다는 보도자료를 내놓았다.

석주명을 사랑하는 이들과 영천동 주민들은 머지않아 석주명기념관이 건립된다는 꿈에 부풀었다. 그들은 제라한 석주명기념관을 짓기 위해 담당 공무원들과 일본에 있는 왕오색나비생태관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념관을 건립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부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기념관 최적 부지인 구 경성제국대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은 당시에 제주대 아열대농업연구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문제는 서귀포시와 제주대 간에 토지교환으로 해법을 찾았다. 서귀포시에서 2017년 생약연구소 건물을 포함하여 4필지 1만6000여 평방미터를 확보하면서 기념관 건립이 가능하게 되었다. 하여 당시 서귀포시는 “이번 교환토지 확보로 70년 숙원인 석주명기념관 건립이 급물살을 타게 됐다. 석주명기념사업을 기존 문화시설과 연계해 문화도시로서 위상이 한층 더 제고될 전망”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얼마 후 서귀포시는 석주명기념관 건립에 난색을 표했다. 농어촌활성화 사업비로는 기념관(박물관) 건립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기념관 건립에 큰 기대를 걸었던 영천동 주민과 건립추진위원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업 기간 내에 석주명기념관 건립이 어려워지면서 영천동 활성화 사업과 기념관 건립은 별건으로 되고 말았다. 그러한 서귀포시의 과오에 대해서는 보다 분명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서귀포시는 석주명기념관 건립 예산을 확보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2020년 6월 구 경성제국대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 연구동을 국가등록문화재 제785호로 등재하였다. 그리고 2020년에 ‘석주명기념관 관련연구’ 용역을, 2022년에 ‘제주도시험장 종합정비계획 수립’ 용역을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석주명기념관을 어떻게 지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충분히 논의되고 검토되었다.

뿐만 아니라 석주명의 삶과 사상을 정리한 ‘한국의 르네상스인 석주명’(궁리, 2018), 그의 제주 행적을 꼼꼼히 정리한 ‘제주학의 선구자 석주명’(한그루, 2021), 그의 유품과 유물들을 낱낱이 정리한 ‘나비박사 석주명의 아름다운 날(단국대, 2021)’ 등의 책이 나오면서 석주명의 삶과 업적에 대해 소상히 밝혀졌고 평가도 어느 정도 이뤄졌다.

석주명에 대한 이야기가 초등교과서에 실렸고, 한국과학기술원은 그를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하였으며, 과학기술통신부는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하였다. 석주명은 청소년들이 가장 선호하고 존경하는 과학자 중의 한 분이다. 그러한 분이 제주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는 것은 제주도로서는 큰 행운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주도는 ‘석주명’의 브랜드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석주명기념관 건립을 위한 부지도 마련되었다. 그가 근무하던 연구동이 등록문화재로 등재도 되었다. 여러 차례의 용역을 거치면서 석주명기념관 건립에 대한 방향도 어느 정도 제시되었다. 이쯤이면 제주도시험장 연구동 건물(300평방미터)을 속히 복원하여 석주명의 사진과 유품들을 전시해야 한다. 하지만 거기를 석주명기념관으로 삼기엔 턱없이 부족하며 별도의 제라한 기념관이 필요하다.

석주명기념관에는 인공지능(AI)과 메타버스를 활용하여 그의 생애를 살필 수 있는 전시실, 그의 제주도에서의 활동을 보여줄 생약연구소실, 그가 수집한 제주도 자료를 볼 수 있는 제주문화체험실, 그의 제주방언 연구를 활용한 제주어체험실, 세계 여러 언어와 세계 공용어인 에스페란토를 비교 체험할 수 있는 에스페란토체험실 등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세계의 나비를 볼 수 있는 나비전시실과 살아있는 나비를 직접 관찰할 수 있는 나비생태체험관이 구비된다면 많은 청소년들이 즐겨 찾는 학습장소가 될 것이다. 

윤용택 제주대 철학과 교수. ⓒ제주의소리
윤용택 제주대 철학과 교수. ⓒ제주의소리

제라한 석주명기념관을 짓기 위한 준비는 이미 되어 있다. 그런데도 기념관 건립이 차년피년 미뤄지는 이유는 초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2015년 이후에 서귀포시장이 네 번 바뀌고, 담당 공무원도 수없이 바뀌어 석주명기념관 건립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달라지고 있다. 게다가 당시 지역 정치인의 위상이 많이 달라지면서 석주명기념관 건립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세상이 제주를 잘 모를 때 석주명이 제주를 세상에 알렸듯, 세상이 그를 잘 모를 때 제주가 그를 세상에 알리는 게 도리다. 서귀포지역 국회의원과 도의원, 제주특별자치도지사와 서귀포시장께서 좀 더 적극적으로 석주명기념관 건립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기대한다. / 윤용택 논설위원·제주대 교수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