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8) 짝사랑 러브스토리 

 

짝사랑 러브스토리 

이번 주 토요일엔 꽃 한 송이 만나러 간다
백사장 살짝 비켜 곱게 지은 도서관에
엎디어 시어를 줍는 순비기 꽃밭을 지나,

야트막 언덕바지 반쯤 마른 소나무 가지
그 가지 끄트머리 하얀 면사포를 쓰고
고요히 나를 향하던 그 달꽃을 만나러.

/ 2011년 고정국 詩

ⓒ고정국
ⓒ고정국

#시작노트

백사장에 인접한 표선도서관에, 매주 토요일 글쓰기 강의 일정이 잡혔습니다. 2011년 11월 셋째 토요일 저물녘, 강의 시간 조금 앞당겨 도서관 마당에 도착했습니다. 도서관 서쪽으로 야트막한 언덕이 있었으며, 그 언덕에는 오래 전에 이미 고사한 것 같은, 소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하필 그날 그때, 그 소나무 마른 가지 끝에 보얗게 면사포를 쓴 달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나를 기다린 게 아니라, 내 어깨에 메고 있는 카메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나는 이곳저곳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프로인 척 똥폼을 잡고 셔터를 눌렀습니다. 하늘에는 어느새 하나 둘씩, 별무리들이 살아나면서 그 때의 운치를 더해주었습니다.

글 쓰고 사진을 찍다 보면, 내 앞에 다가오는 그 어떤 풍광이나 소리나 빛깔 등이 오로지 이 한 순간을 위해, 하늘이 각별히 준비해주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확신이 서기도 합니다.

일주일이 지난 토요일에, 글쓰기 강의 차 다시 도서관에 갔습니다. 그런데, 도서관 언덕바지에 서 있던 소나무의 존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면사포 속에서 알 듯 말 듯 빙그레 나를 훔쳐보던 달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 소나무는 나를 만나기 위해 도서관 언덕바지에서 10년 넘게 기다렸던 것입니다. 초아흐레 달님을 불러 세워, 나에게 시 한편과 사진 한 장을 건네주려 했던 그 소나무는, 그처럼 생명이 다한 후에도 제가 할 일을 다 했던 것입니다. 

제주도 전체에 소나무 재선충 피해가 심각했을 당시, 마른가지 상태로 형체를 유지하던 그 소나무가, 비로소 이 지상에서 존재를 거두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건, 컴퓨터에 저장된 사진 한 장과 오늘 소개하는 짤막한 시조 한 편 <짝사랑 러브스토리>가 전부인 것 같습니다. 

한 장의 사진에도, 찍을 당시의 에피소드가 있고, 한 줄 또는 한 편의 시에도, 저마다 크고 작은 사연이 깃들어 있기 미련입니다. 그때 소나무 가지 끝에 면사포를 쓰고 나를 기다리던 달님과 나와의 짝사랑 러브스토리도, 10년이 넘도록 하늘만 아는 비밀이었습니다.


# 고정국 시인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2),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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