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민의 제주 생활사] (10) 바구니

제주 여자들의 운반 관습은 옛 문헌에서도 기록되었을 만큼 제주도 이외 육지부 지역과 썩 달랐다. 김정(金淨, 1486∼1521)도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에서, ‘부이부대’(負而不載)라고 기록하였으니 말이다. 부이부대란 제주 여자들은 운반 대상의 물건을 등에 질지언정 결코 머리에 이어 나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주도 이외의 육지부 남자들이나 제주도 남자들의 운반 관습은 어떠한 물건을 지게 또는 바지게에 올려놓고 등에 지어 날랐으니, 김정은 부이부대라 하여 제주 여자들의 운반 관습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원초 경제사회 때 제주 여자들의 대표적 운반 도구는 ‘바굼지’였다. 바굼지는 바구니의 제주어다. 제주도 바구니는 크게 ‘구덕’과 ‘차롱’으로 나뉜다. 구덕은 대나무를 쪼개어 엮어 만든 깊숙하고 큰 직사각형의 대그릇이고, 차롱은 대오리로 네모나게 짜서 속을 깊숙하게 하고 뚜껑을 덮은 대그릇이다. 제주 여자들은 구덕 속에 차롱을 담고 다니는 수도 있었다. 그러니 구덕과 차롱은 모두 직사각형이어야 했다. 제주도 바구니는 주로 여자들이 등에 지거나, 옆구리에 끼거나, 옆구리에 차고 다니는 대그릇이다. 제주 여자들은 바구니를 등에 지어 나르기 좋게 직사각형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 바구니의 근본 목적은 제주 여자들을 위한 운반 도구였다. 

원초 경제사회 때 제주 여자들은 한평생 구덕과 차롱과 함께 살았다. 원초 경제사회란 백성들이 삶에 필요한 것을 자연에서 얻은 소재로 마련하였던 때를 말한다. 제주 여자들은 너나없이 거의 똑같이 보편적인 삶을 살았다. 원초 경제사회에서 제주 여자는 산야에서, 바다에서, 밭에서, 논에서, 삶에 필요한 자원을 스스로 마련하며 살았다. 이 글에서는 제주 여자들이 구덕, 차롱과 함께 살았던 삶을 들여다보고 싶다. 

아기와 함께했던 바구니 

갓난아기는 태어나자마자 누비이불에 감쌌다. 3일째 되는 날에는 향나무 가지를 담근 미지근한 물로 몸을 감겼다. 그리고 ‘봇뒤창옷’을 입혔다. 봇디창옷은 갓난아기가 태어났을 때, 몸을 감쌀 수 있게 만든 간편한 옷이다. 봇뒤창옷을 입히고 나서 갓난아기는 5일 동안 ‘아기눅지는차롱’에 눕혀 키웠다. ‘눅지는’의 ‘눅지다’는 ‘눕히다’의 제주어다. 아기눅지는차롱은 차롱의 뚜껑이다. 서귀포시 토평동 오남호(1942년생, 남) 어르신은 갓난아기를 눕혔던 아기눅지는차롱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기눅지는차롱(밑짝|가로 19.5㎝, 세로 12.0㎝, 높이 8.5㎝)<br>‘아기눕히는차롱’은 갓난아기를 키우는 대그릇임과 동시에 제물로 쓸 적을 담아두는 ‘적차롱’으로 쓰였다. / 사진=고광민<br>
아기눅지는차롱(밑짝|가로 19.5㎝, 세로 12.0㎝, 높이 8.5㎝)
‘아기눕히는차롱’은 갓난아기를 키우는 대그릇임과 동시에 제물로 쓸 적을 담아두는 ‘적차롱’으로 쓰였다. / 사진=고광민

이것은 오남호 어르신의 아버지(1898년생)가 살아생전에 손자를 키우려고 만든 것이다. 아기눅지는차롱 안에 보릿짚이나 ‘새’(띠)를 깔았다. 다시 보릿짚이나 ‘새’ 위에 보자기를 깔았다. 그 위에 갓난아기를 눕혔다. 1963년에 오남호 어르신은 첫아들을 보았다. 이때 오남호 어르신의 아버지는 첫 손자를 눕힐 아기눅지는차롱을 만들었다. 오씨 어르신네 집 아기눅지는차롱에서 1965년에 첫 손녀, 1967년에 둘째 손녀, 1969년에 셋째 손녀, 1972년에 넷째 손녀, 그리고 1975년에 막내 손자까지 키워냈다. 그 뒤로는 ‘아기구덕’에서 갓난아기를 눕히고 1년 동안 키웠다. 

아기구덕은 제주 여자들이 밭에 일하러 갈 때 아기를 눕혀서 지어 나르는 대그릇이기도 하였다. 제주시 삼양동 변규서(1938년생, 남) 어르신은 아기구덕 만들기 명장(名匠)이었다. 아기구덕은 씨줄 대오리인 ‘선놀’은 9개, ‘고른놀’은 21개로 구성되었다. 선놀은 서 있는 날이라는 말로 세로 방향으로 놓인 대오리고, 고른놀은 가로 있는 날이라는 말로 가로 방향으로 놓인 대오리다. 아기구덕 바닥에는 왕대나무 대오리(지름 1.4㎝) 5개를 끼워 받쳤다. 그리고 아기구덕 밑바닥에서부터 13㎝쯤 높이에 ‘정’(井) 자 모양으로 줄을 얽어맸다. 이를 ‘도들’이라고 한다. 여름에는 도들 위에 삼베 조각, 그리고 겨울에는 보릿짚 따위를 깔았다.

아기구덕(가로 64.0㎝, 세로 25.5㎝, 높이 25.0㎝)<br>표선면 가시리 강두진(1931년생, 남) 어르신의 가르침에 따르면, 제주도에서는 손자를 본 조부모가 ‘아기구덕’을 사고 산모(産母)에게 선물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제주도 부녀들은 첫아기를 친정집에서 낳는 수가 많았다. 첫아기를 낳고 1개월 후에는 아기를 아기구덕에 지고 시집으로 왔다. 이때 아기 이마와 콧등에 솥 밑에 붙은 ‘기시렁’(그을음)을 발랐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첫아기를 아기구덕에 지고 온다고 하지 않고 “솟 지엉 왐구나!”라고 하였다. / 사진=고광민<br>
아기구덕(가로 64.0㎝, 세로 25.5㎝, 높이 25.0㎝)
표선면 가시리 강두진(1931년생, 남) 어르신의 가르침에 따르면, 제주도에서는 손자를 본 조부모가 ‘아기구덕’을 사고 산모(産母)에게 선물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제주도 부녀들은 첫아기를 친정집에서 낳는 수가 많았다. 첫아기를 낳고 1개월 후에는 아기를 아기구덕에 지고 시집으로 왔다. 이때 아기 이마와 콧등에 솥 밑에 붙은 ‘기시렁’(그을음)을 발랐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첫아기를 아기구덕에 지고 온다고 하지 않고 “솟 지엉 왐구나!”라고 하였다. / 사진=고광민

돌쯤 된 아기는 발이 아기구덕 테두리에 걸쳐질 만큼 쑥 자랐다. 이때부터 아기구덕 바깥에서 키우기 시작하였다. 아기가 1년 동안 아기구덕에서 무사히 자라나면, 그 아기구덕은 잘 보관하여두었다가 여러 아기를 키워냈다. 그러나 아기구덕에서 아기를 키우다 죽는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제주도에서는 “아기 농사 반 농사”라는 말도 전승되었다. 아기를 키우는 동안 절반은 저세상으로 보내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 죽은 아기의 아기구덕은 아기의 무덤에 덮어 버리거나 신당에 가서 버리고 다른 아기를 키우는 데 쓰지 않았다. 그 아기구덕에는 아기를 저승으로 데려가는 아기에게 재앙을 가져오는 나쁜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현용준은 구좌읍 김녕리 ‘노물잇당’에 버려진 아기구덕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놓았다. 죽은 아기를 가슴에 묻은 어머니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노물잇당에 버려진 ‘아기구덕’(1970년 2월, 구좌읍 김녕리)<br>구좌읍 김녕리에는 어린아이를 키워준다고 믿는 ‘노물잇당’이 있다. 아기가 죽으면 그 ‘아기구덕’은 당에 가져다 버리고 다른 아기를 키우는 데 쓰지 않았다. / 사진=현용준<br>
노물잇당에 버려진 ‘아기구덕’(1970년 2월, 구좌읍 김녕리)
구좌읍 김녕리에는 어린아이를 키워준다고 믿는 ‘노물잇당’이 있다. 아기가 죽으면 그 ‘아기구덕’은 당에 가져다 버리고 다른 아기를 키우는 데 쓰지 않았다. / 사진=현용준

소녀와 함께했던 바구니

어느덧 여자아이가 자라 일곱, 여덟 살이 되면 부모의 일을 거들거나 생업전선에 나섰다. 이혜영 작가의 <제주 사람 허계생>(도서출판 한그루)의 주인공 허계생(1953년생, 여) 어르신은 일곱, 여덟 살 때부터 식수 확보에 뛰어들었다. 이때 식수를 담는 그릇은 ‘등덜펭’이었다. 등덜펭은 지역에 따라 ‘두벵들이’ 또는 ‘바지펭’이라고도 일렀다. 등덜펭은 식수 두 되(1되 = 1.8리터) 정도 담을 수 있는 그릇이었다. 운반 도구는 차롱 아래짝이었다. 아기눅지는차롱 아래짝도 식수가 담긴 ‘등덜펭’을 지어 날랐다.

여자아이 아홉, 열 살 때부터는 옹기그릇 ‘대바지’에 식수를 담고 지어 날랐다. 대바지는 식수 넉 되 정도 담을 수 있는 그릇이었다. 대바지 운반 도구는 ‘대바지물구덕’이었다. 대바지물구덕은 대바지를 넣고 지고 다니는 구덕이라는 말이다.

대바지물구덕(가로 37.5㎝, 세로 21.5㎝, 높이 20.5㎝)<br>2000년 5월 9일, 남원읍 신흥2리 김윤탁(1919년생, 남) 어르신이 살아생전에 부탁하여 복원한 ‘대바지물구덕’이다. ‘대바지구덕’은 ‘대바지’를 그 안에 넣어서 지고 다니는 ‘구덕’이다. ‘허벅’이 어른들이 지고 다니는 것이라면, ‘대바지’는 어린 소녀들이 지고 다니는 그릇이다. 따라서 이 ‘구덕’은 ‘허벅’을 지어 나르는 ‘물구덕’보다 작았다. / 사진=고광민<br>
대바지물구덕(가로 37.5㎝, 세로 21.5㎝, 높이 20.5㎝)
2000년 5월 9일, 남원읍 신흥2리 김윤탁(1919년생, 남) 어르신이 살아생전에 부탁하여 복원한 ‘대바지물구덕’이다. ‘대바지구덕’은 ‘대바지’를 그 안에 넣어서 지고 다니는 ‘구덕’이다. ‘허벅’이 어른들이 지고 다니는 것이라면, ‘대바지’는 어린 소녀들이 지고 다니는 그릇이다. 따라서 이 ‘구덕’은 ‘허벅’을 지어 나르는 ‘물구덕’보다 작았다. / 사진=고광민

그리고 이때부터 허리에 ‘촐구덕’을 차고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촐구덕은 허리에 차는 구덕으로 ‘질구덕’보다 작은 대그릇이었다.

촐구덕(가로 32.0㎝, 세로 24.5㎝, 높이 21.0㎝)<br>‘촐구덕’은 ‘질구덕’보다 작고, ‘조레기’보다 큰 ‘구덕’으로 허리에 차는 대그릇이다. 이것은 서귀포시 토평동 김홍식(1939년생, 남) 어르신 집에 있는 것이다. 김씨 외삼촌 오○○(1904년생) 어르신이 생전에 만들어 준 것이다. / 사진=고광민<br>
촐구덕(가로 32.0㎝, 세로 24.5㎝, 높이 21.0㎝)
‘촐구덕’은 ‘질구덕’보다 작고, ‘조레기’보다 큰 ‘구덕’으로 허리에 차는 대그릇이다. 이것은 서귀포시 토평동 김홍식(1939년생, 남) 어르신 집에 있는 것이다. 김씨 외삼촌 오○○(1904년생) 어르신이 생전에 만들어 준 것이다. / 사진=고광민

아홉, 열 살 여자아이들은 촐구덕을 허리에 차고 산야로 나가 고사리를 꺾고 산나물을 캤다. 그리고 바다로 나가 ‘가시리’(불등풀가사리), ‘짓거리’(진두발) 등의 바다풀을 매거나 ‘수두리’(두드럭고둥), ‘오분재기’(떡조개)를 잡아 촐구덕에 담아 날랐다.

1979년 3월, 현용준은 구좌읍 행원리에서 여자아이들이 촐구덕을 허리에 차고 서로 경쟁하듯 바닷가를 거닐며 미처 따내지 못한 톳을 따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런 톳을 ‘톨이석’이라고 하였다. 톨이석은 톳의 이삭이라는 말이다.

톳 이삭 줍는 아이들(1979년 3월, 구좌읍 행원리) <br>이 마을에서는 음력 2월에 마을 공동으로 톳 채취를 한다. 미처 따내지 못한 톳이 갯바위에 붙어 있다. 이런 모양의 톳을 톳 이삭이라고 이른다. 아이들이 허리에 바구니를 차고 갯바위를 거닐며 톳 이삭을 따고 있다. / 글, 사진=현용준<br>
톳 이삭 줍는 아이들(1979년 3월, 구좌읍 행원리)
이 마을에서는 음력 2월에 마을 공동으로 톳 채취를 한다. 미처 따내지 못한 톳이 갯바위에 붙어 있다. 이런 모양의 톳을 톳 이삭이라고 이른다. 아이들이 허리에 바구니를 차고 갯바위를 거닐며 톳 이삭을 따고 있다. / 글, 사진=현용준

제주 여자아이들은 어느덧 자라 열다섯 살부터 ‘허벅’에 식수를 담고 ‘물구덕’으로 지어 날랐다. 허벅은 식수 10되 정도 담을 수 있는 옹기그릇이었다. ‘등덜펭’, ‘대바지’, ‘허벅’은 모양이 대체로 둥글며 배가 불룩하고 아가리는 아주 좁은 옹기그릇이었다. ‘물구덕’은 제주 여자들이 식수 운반용 옹기그릇인 ‘허벅’을 담고 등에 지에 나르는 대그릇이었다.

물구덕(가로 52.0㎝, 세로 36.4㎝, 높이 21.0㎝)&nbsp;<br>‘물구덕’은 제주 여자들이 식수 운반용 옹기그릇인 ‘허벅’을 담고 등에 지에 나르는 대그릇이다. 이것은 제주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것이다. ‘물구덕’은 ‘질구덕’보다 얕게 만들었다. 죽세공들은 손 뼘으로 그 높낮이를 가늠하였다. ‘물구덕’은 한 뼘 높이, 그리고 ‘질구덕’은 한 뼘에 중지 손가락 한 마디를 더하여 높이를 가늠하였다. ‘물구덕’ 밑바닥에 왕대나무 조각 8개를 엮어 붙였다. 그래야 ‘물구덕’ 밑바닥이 쉬 헐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질빵을 걸치기도 좋았다. / 사진=고광민<br>
물구덕(가로 52.0㎝, 세로 36.4㎝, 높이 21.0㎝) 
‘물구덕’은 제주 여자들이 식수 운반용 옹기그릇인 ‘허벅’을 담고 등에 지에 나르는 대그릇이다. 이것은 제주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것이다. ‘물구덕’은 ‘질구덕’보다 얕게 만들었다. 죽세공들은 손 뼘으로 그 높낮이를 가늠하였다. ‘물구덕’은 한 뼘 높이, 그리고 ‘질구덕’은 한 뼘에 중지 손가락 한 마디를 더하여 높이를 가늠하였다. ‘물구덕’ 밑바닥에 왕대나무 조각 8개를 엮어 붙였다. 그래야 ‘물구덕’ 밑바닥이 쉬 헐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질빵을 걸치기도 좋았다. / 사진=고광민

‘여청’과 함께했던 바구니

제주 여자들은 열다섯 살부터 어른의 일을 이루어내기 시작하였다. 열다섯 살의 제주 여자는 ‘여청’의 몫을 이루어냈다.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남사록>(南槎錄)에서, “‘성안’에 남자군인[男丁]은 5백인데 여자군인[女丁]은 8백이었다.”고 하였다. ‘성안’은 지금의 옛 제주시 중심가를 이른다. ‘여정’(女丁)은 조선 시대에 군역까지 져야 했던 제주 여자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후에 ‘여정’(女丁)은 ‘여청’으로 변하여 어른이 된 여자를 이르는 말이 되었다. 

제주 ‘여청’들은 식솔(食率)들이 먹을 양식을 생산하는 기술자였다. 화산섬 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제주 여청들에게 크게 요구되었던 일은 밭매기와 곡식을 장만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사회적 의무를 차곡차곡 이루어내며 ‘구덕’과 ‘차롱’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당당한 역군(役軍)이었다.   

‘질구덕’은 제주 여청들이 비교적 거친 짐 따위를 담고 질빵에 걸어 등에 지어 나르는 운반 도구 중에서 가장 큰 대그릇이었다. 

질구덕(가로 46.7㎝, 세로 43.5㎝, 높이 33.0㎝)<br>‘질구덕’의 ‘에움’(테두리)은 대오리 대신 칡넝쿨로 얽어맸다. / 사진=고광민<br>
질구덕(가로 46.7㎝, 세로 43.5㎝, 높이 33.0㎝)
‘질구덕’의 ‘에움’(테두리)은 대오리 대신 칡넝쿨로 얽어맸다. / 사진=고광민

제주 여청들은 질구덕을 산야에 쇠똥과 말똥을 주우러 다닐 때 운반 도구로 삼았다. 그리고 제주 해녀들이 갯밭으로 물질하러 갈 때 땔감, 옷가지, ‘테왁’, ‘망사리’ 등 여러 가지 물질 도구를 담고 질빵에 걸어 지어 날랐다.

질구덕 지고 가는 해녀(1971년 여름, 조천읍 신흥리) <br>조천읍 신흥리 해녀들이 수건을 머리에 쓰고 ‘망사리’를 등에 지고 바다로 물질 나가고 있다. /&nbsp;사진=현용준<br>
질구덕 지고 가는 해녀(1971년 여름, 조천읍 신흥리)
조천읍 신흥리 해녀들이 수건을 머리에 쓰고 ‘망사리’를 등에 지고 바다로 물질 나가고 있다. / 사진=현용준

‘테왁’은 해녀가 물질할 때 바닷물 위에 띄워 놓는 커다란 뒤웅박이고, ‘망사리’는 해녀가 해산물을 채취하여 담아 넣고 갯가까지 운반하는 그물로 된 자루이다. 그리고 제주 해녀들이 물속으로 들어가 채취한 해산물을 질구덕에 지고 왔다. 

제주 여청들은 혼사를 치르고부터 가정생활을 하면서 사회적 의무를 게을리할 수 없었다. 사회적 의무는 친가, 외가, 이웃집에 부조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서귀포시 대포동 김순정(1927년생, 여) 어르신의 가르침에 따르면, 1985년 전후까지만 하더라도 제주 사회의 부조는 쌀로 이루어졌다. 쌀의 정도는 친족이나 이웃의 관계에 따라 달랐다. 사촌지간과 당사돈 집 대사(大事)에는 소승(小升)으로 쌀 10되(20리터)를 부조하였다. 이때의 부조를 ‘열되부조’, 또는 ‘말찬부조’라고 하였다. ‘말찬부조’는 쌀 1말이 가득한 부조라는 말이다. 먼 친족이나 먼 사돈집에는 소승으로 쌀 6되(12리터)를 부조하였다. 이때의 부조를 ‘여섯되부조’라고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대승(大升)이 일반화되면서부터 ‘여섯되부조’는 ‘석되부조’라고 하였다. 그리고 동네집에는 소승으로 쌀 4되(8리터)를 부조하였다. 이때의 부조를 ‘넉되부조’라고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대승(大升)이 일반화되면서부터 ‘넉되부조’는 ‘두되부조’라고 하였다. 

사회적 의무를 실천하는 부조의 쌀은 반드시 ‘고는대구덕’에 담고 다녔다. 고는대구덕의 ‘고는’은 ‘가늘다’[細]라는 말이다. ‘구덕’은 가로줄 대오리 폭이 0.6㎝ 정도로 비교적 거칠게 짠 대그릇이라면, 고는대구덕은 가로줄 대오리 폭은 0.1㎝ 정도로 비교적 촘촘하게 짠 대그릇이었다. 고는대구덕은 크게 세 가지가 전승되었다. 

‘고는대질구덕’은 소승으로 ‘열되부조’ 또는 ‘말찬부조’의 쌀을 담아 나르는 대그릇이었다. 고는대질구덕은 ‘고는대구덕’ 중에서 가장 큰 대그릇이다. 나는 제주시 도련동 변규서(1938년생, 남) 어르신의 고는대질구덕 만드는 과정을 관찰하였다. 고는대질구덕은 씨줄 대오리인 ‘고른놀’은 12개, 날줄 대오리인 ‘선놀’은 11개로 구성되었다.

고는대질구덕(가로 34.0㎝, 세로 26.5㎝, 높이 20.0㎝)<br>‘고는대질구덕’은 ‘고는대구덕’ 중에서 제주도 여자들이 물건을 담아 등에 지어 나르는 대그릇이다. 이것은 제주시 도련동 변규서(1938년생, 남) 어르신께서 살아생전에 나에게 ‘맨촌구덕’과 ‘맨촌차롱’의 생산 과정을 보여주려고 만든 것이다. / 사진=고광민<br>
고는대질구덕(가로 34.0㎝, 세로 26.5㎝, 높이 20.0㎝)
‘고는대질구덕’은 ‘고는대구덕’ 중에서 제주도 여자들이 물건을 담아 등에 지어 나르는 대그릇이다. 이것은 제주시 도련동 변규서(1938년생, 남) 어르신께서 살아생전에 나에게 ‘맨촌구덕’과 ‘맨촌차롱’의 생산 과정을 보여주려고 만든 것이다. / 사진=고광민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고는대질구덕을 대물림하였다. 시어머니에게 고는대질구덕을 대물림받지 못한 여청은 밭매기 3일 노동의 값으로 샀다. 고는대질구덕은 말찬부조의 쌀을 담고 지고 나르는 일, 해마다 신당(神堂)에 올릴 제물을 담고 지고 나르는 일, 그리고 부모 제사 때 제물을 담고 지고 나르는 일을 이루어냈다.     

‘고는대촐구덕’은 소승으로 ‘여섯되부조’, 대승으로 ‘석되부조’의 쌀을 담아 나르는 대그릇이었다. 고는대촐구덕의 ‘촐’은 ‘차다’라는 말로 허리에 끼워서 지닌다는 말이다. 이것은 구좌읍 행원리 홍복순(1931년생, 여) 어르신 집에서 쓰던 것이다. 고는대촐구덕은 씨줄 대오리인 ‘고른놀’은 13개, 날줄 대오리인 ‘선놀’은 11개로 구성되었다.

고는대촐구덕(가로 31.5㎝, 세로 25.5㎝, 높이 20.0㎝)<br>‘고는대촐구덕’의 바닥과 옆에 나일론 조각이 박혀 있다. 주인이 이것을 들고 어디에 가더라도 잃어버리지 않게 표시해 둔 것이다. / 사진=고광민<br>
고는대촐구덕(가로 31.5㎝, 세로 25.5㎝, 높이 20.0㎝)
‘고는대촐구덕’의 바닥과 옆에 나일론 조각이 박혀 있다. 주인이 이것을 들고 어디에 가더라도 잃어버리지 않게 표시해 둔 것이다. / 사진=고광민

‘떡구덕’은 소승으로 ‘넉되부조’, 대승으로 ‘두되부조’의 쌀을 담아 나르는 대그릇이었다. 떡구덕은 떡을 담아 나르는 대그릇으로 쓰였음은 물론이다. 제주시 영평동 강여옥(1913년생, 여) 어르신의 친정은 애월읍 광령리이다. 광령리에서는 떡구덕을 ‘동의바구리’라고 이른다. 제주시 중심에서 동쪽에 있는 도련동에서 생산된 대그릇이라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강씨 어르신은 1948년에 관덕정 앞마당 오일장에서 친족 집에 떡이나 쌀 등을 담고 ‘고는대질구덕’에 담아 갈 양으로 동의바구리를 샀다. 친부모 제사 때는 떡을 가득 담은 동의바구리를 고는대질구덕에 넣었다. 그리고 동의바구리 옆에 술 한 병을 세웠다. 고는대질구덕을 등에 지고 친부모 제사 보러 다녔다. 1963년쯤에 ‘동의바구리’의 ‘에움’(테두리)이 빠졌다. 강씨 어르신은 동의바구리 테두리 자리를 줄로 휘휘 감아 ‘바농상지’로 쓰고 있었다. 바농상지는 바느질 도구를 담는 반짇고리라는 말이다.

떡구덕(가로 22.0㎝, 세로 18.6㎝, 높이 13.5㎝) / 사진=고광민<br>
떡구덕(가로 22.0㎝, 세로 18.6㎝, 높이 13.5㎝) / 사진=고광민

‘할망’과 함께했던 바구니

제주 사람들은 노년의 제주 여자를 ‘할망’이라고 한다. 제주도 할망들은 스스로 살아갈 힘이 있는 한, 생계를 이을 정도의 밭에서 농사를 지어 양식을 생산하거나 바다에서 해산물을 따면서 조용하게 남은 인생을 살아갔다. 구좌읍 월정리 사람들은 월정리 서쪽 바다를 ‘도파당’이라고 한다. 1997년 5월 25일, 월정리 도파당에서는 ‘우미물에’가 펼쳐졌다. 우미물에는 마을 사람들 스스로 채취를 금하였다가 일정한 날에 해녀들이 물속으로 들어가 맨손으로 우뭇가사리를 매는 물질이라는 말이다. 월정리에서 우미물에가 이루어진 날이었다. 갯가에는 해녀들이 채취한 우뭇가사리를 실어나를 자동차까지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물속으로 들어가 ‘우미물질’을 할 정도의 힘을 잃은 어느 할망은 허리에 ‘촐구덕’을 차고 갯가로 밀려든 바다풀 속에서 우미를 골라내는 족족 허리에 차고 있는 촐구덕에 담고 있었다.

파도에 밀려든 우뭇가사리를 줍다(1997년 5월 25일, 구좌읍 월정리) / 사진=고광민<br>
파도에 밀려든 우뭇가사리를 줍다(1997년 5월 25일, 구좌읍 월정리) / 사진=고광민

할망이 차고 있는 촐구덕은, 제주 여자 소녀들이 허리에 차고 톳 이삭을 줍던 촐구덕이었다.

그리고 제주 여자들은 굽이굽이 한평생의 길을 걷다가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하직한 날, 제주 여자가 즐겨 입었던 흰 적삼을 ‘차롱’ 뚜껑에 넣었다. 이때의 ‘적삼’을 ‘혼적삼’이라고 하였다. 혼적삼을 차롱 뚜껑에 넣고 지붕 위에 올라가 죽은 이의 성과 이름 밑에 ‘보’를 붙여 세 번 큰소리로 외쳐 온 세상에 알렸다.

[고광민의 제주 생활사]는 제주의 문화와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이니스프리 모음재단’과 함께 합니다.


#고광민

1952년 제주도 출생. 서민 생활사 연구자.

저서 ▲동의 생활사 ▲고개만당에서 하늘을 보다 ▲마라도의 역사와 민속 ▲제주 생활사 ▲섬사람들의 삶과 도구 ▲흑산군도 사람들의 삶과 도구 ▲조선시대 소금생산방식 ▲돌의 민속지 ▲제주도의 생산기술과 민속 ▲제주도 포구 연구 ▲사진으로 보는 1940년대의 농촌풍경 ▲한국의 바구니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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