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56) 구좌읍 하도리 고홍임 어르신 이야기 ②

하도리에서 만난 고홍임(출생년도 알 수 없음) 어르신의 군 이야기가 더 궁금했던 이유는 이러하다. 

내가 알고 있는 헌병은 소위 헌병 모자를 쓴 군인 잡는 귀신 이미지였는데 어르신은 사복을 입었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사진에서 보여준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은 동료의 옷이라 하셨다. 어르신은 처음부터 수사관이 될 생각은 아니셨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중대장이 어르신을 불렀다. 두꺼운 책을 하나 주며 시험을 보라고 하셨는데 그 시험이 바로 군수사관이 되기 위한 시험이었단다. 당시에는 한자를 모르면 될 수가 없었다. 죄명과 관련법을 다 외우고 있어야 했는데 당시 책은 모두 한자로 쓰였다. 어르신은 중대에서 시험을 보고 군수사관이 되었고 그렇게 10년 동안 군대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건·사고를 수사하는 업무를 맡으셨다.

헌병모자를 쓰고 군복은 빌려입은 옷이라 하셨다. 군수사관들은 사복차림 이었다고. / 사진=김진경
헌병모자를 쓰고 군복은 빌려입은 옷이라 하셨다. 군수사관들은 사복차림 이었다고. / 사진=김진경

“군에서 나는 사고는 생각보다 다양해. 생각지도 못하게 교통사고도 잦고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을 수사하는 역할을 해. 예를 들어 일반인하고 군인들하고도 충돌이 생기는 일도 있지. 그럼 군 수사관이 가장 먼저 사건을 인계받고 그 다음 파출소로 넘겨. 군인과 민간인들이 싸우더라도 합의점을 잘 찾을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야.”

“아니 근데 군인이 일반인하고 부딪힐 일이 있어요?”

“왜 없어. 전방에는 군인이 민간인보다 더 많기도 해. 군대에서 자살하는 놈. 내무반에서 수류탄 터트리는 놈, 특히나 군대는 살인사건이 총으로 많이 발생해, 그렇게 총기사고 나면 현장 검증도 우리가 직접 하지. 그래서 사복을 입고 다니는 경우가 많아. 경찰 공무원이 강력계도 있고 잠복근무하는 것처럼 군 수사관도 똑같아. 그런데 내가 군수사관 했을 때 안타까웠던 것은 배우지 못하고 불우한 환경의 아이들이 큰 사고를 내는 경우가 많다는 거야. 막상 범죄를 일으킨 아이의 부모님이 찾아오면 딱한 사정이 많아. 부모들이 사정사정하는데 봐주지도 못하고 그럼 또 그들의 아들도 측은하고 불쌍하고 그래.”

이런 일도 있었다. 죄를 지은 사병을 고홍임 어르신이 직접 부모와 그 군인을 태워 운전하며 남한산성 형무소(교도소)로 호송했다. 이제야 갓 아이 티를 벗은 젊은 군인과 선처를 호소하는 부모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르신도 마음도 이루 먹먹할 수 없었단다. 어르신이 이 가족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들이 형무소에 들어가기 전 그저 따뜻한 밥 한 끼 사드리는 것뿐이었다.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문득 당시 제주에 있는 아들이 생각났겠다 싶었다. 또한 경기도 연천역에서 사병이 열차사고로 안타깝게 바퀴에 다리 한쪽이 잘렸는데 후송병원에 잘린 다리가 함께 오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알자마자 바로 그 사고 현장에 달려가서 군인의 다리를 가지고 온 것도 어르신이었다. 그때 병원으로 되돌아가는 젊은 군수사관 고홍임어르신의 마음이 어떨지 나는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월남전에 파병 시 가장 많았던 사고는 총기 사건이었단다. 의외로 강간 사건은 어르신의 부대에서는 없었다. 참전한 사람들 모두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촉즉발의 사건·사고 현장에는 어르신이 늘 계셨다. 

내가 감히 상상도 못 했던 어르신의 군 생활은 10여 년 정도 이어졌다. 늘 사건 현장에서의 눈은 냉정해야 했고 입은 무거워야 했다. 기록을 하는 손은 감정에 치우치지 말아야 했다. 모든 사건과 문서들은 비밀화 돼야 한다고 하셨다. 순간 어르신이 왜 지금껏 제주에 와서도 외롭게 지냈다고 하셨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대목이었다.

고홍임 어르신의 군 현역 시절 사진. / 사진=김진경
고홍임 어르신의 군 현역 시절 사진. / 사진=김진경
고홍임 어르신 자택에 걸려있는 베트남전 참전 기념 시계. / 사진=김진경
고홍임 어르신 자택에 걸려있는 베트남전 참전 기념 시계. / 사진=김진경

군수사관을 하며 겪은 일들을 말해주는 어르신의 눈과 입은 침착했지만 사건 하나하나 듣는 나는 어르신만큼 침착하지 못하고 무섭고 떨리는 마음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어르신은 더 이상 군 생활을 이어 나가고 싶지 않으셨단다. 상부에 보고를 드리고 제주로 내려왔다. 제주로 내려오니 전역장을 보내주었다. 그렇게 어르신은 평범한 일반인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내려왔지만 군 수사관으로 살아오신 세월에 마을 사람들과 쉽게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런 적적함과 외로움에 다시 육지 생활 후 중년이 훌쩍 넘은 나이에 다시 돌아온 이유도 이해됐다. 일반인들은 차마 겪어보지 못했을 무섭고 끔찍한 사건들을 마주하면서도 냉철하고 면밀하게 해결해야 했을, 하지만 마음은 뜨거운 불처럼 따뜻했을 그 누구에게도 말 못했을 군에서의 시간은 혼자서만 마음에 품으셨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그 시절 어르신 모습을 상상해 보니 왠지 눈물이 핑 돌았다.

완전히 제주에 내려와서는 당근 농사하며 어르신이 개발한 영농법을 여러 사람에게 알려주기도 하면서 고향에 정을 붙이셨다. 그렇게 15년 정도 농사짓다 마을 바닷가를 바라보는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 당시 바닷가에 도로가 나기 전이었는데 언젠가는 해안도로가 생길 것이고 그렇다면 사람들이 도로를 따라 집을 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은 바로 해안가 모래사장에 땅은 얻어 집을 지었다. 마을 사람들은 “저 홍임이 육지에만 살다 보난 아무것도 모르고 저디에 집 지엄쪄”라며 소곤거렸단다. 하지만 어르신이 집을 짓고 곧 거짓말처럼 도로가 생겼다.

집을 지을 당시 지금 한국통신에 다니는 큰아들이 군 복무 중이었는데 근무하던 초소가 바로 어르신이 지은 집이었다. 그 집은 바닷가와 인접해 있어 근처에 청둥오리들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청둥오리가 귀소본능이 있다는 것을 아셨던 어르신은 청둥오리들에게 먹이를 주며 오리가 살 터를 만들고 오리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을 했다. 길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해안가로 오기 쉽게 되니 여름철이면 사람들이 물놀이하러 어르신의 식당 주위로 모여들었다. 모래사장에 천막을 쳐 주고 여름 한철 함바집을 하기도 했단다. 그렇게 어르신 식당 주위에 건물들과 점차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식당은 부인과 10여 년 정도 하다 나이 60대가 넘어 정리하셨단다. 

어르신이 지금 사시는 집은 어르신이 태어난 집터였다. 어렸을 때 살던 집을 허물고 다시 집을 지어 살았고 자식들도 이 집터에서 장성했고 제주를 떠나지 않고 살고 있었다. 다만 어르신의 형제들은 부산, 거제, 인천 등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어 자주 왕래할 기회가 별로 없다고 하셨다.

큰아들은 어릴 때부터 알아서 성실히 자라더니 한국통신에 입사했다. 신경을 크게 쓰지 않아도 알아서 커 준 착한 아들이라 하셨다. 둘째 아들은 대기고등학교를 잘 다니다 2학년이 되니 학교 그만두고 검정고시로 일찍 대학을 간다고 했다. 그렇게 둘째 아들은 남들보다 조금 일찍 제주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번듯한 직장생활을 하기를 내심 바랐다. LG연구원 입사 기회가 있었는데 둘째 아들은 마다했다. 이놈이 뭘 하려고 이러나 싶었단다.

어린 아들과 함께 찍은 어르신의 젊은 시절. / 사진=김진경
어린 아들과 함께 찍은 어르신의 젊은 시절. / 사진=김진경

“제주대학교 경영학과인가 나와서 이제 뭐 하나 싶었는데 놈삐(무) 장사 하는 거라. 놈삐 세척하고 당근도 하고. 학교 졸업하고 수협도 안 간다, 축협도 안 간다. 엘지에 연구원으로도 안 간다. 빈둥빈둥하길래 그럼 네놈 알아서 해라 말하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제 이놈이 나보다 낫지(웃음). 저 세화 위에 공장을 하나 하는데 제주에서 두 번째로 큰 놈삐 공장이야. 생각해 보니 이놈이 어렸을 때부터 심부름은 잘하더라고. 우리가 깨 농사지었는데 갑자기 천둥 번개 막 치니까 6살짜리가 비 쫄딱 비 쫄딱 맞으면서 뛰어오는 거라. 본인도 비에 다 젖었으면서 마루에 깨 다 젖었다고 물 천지라고 그 어린놈이 울상으로 막 속상해하던 것이 기억나. 자기가 마루 문 닫고 나갔으면 됐는데 안타까워하며 말하던 것이 생각났어.” 

둘째 아들은 밭은 수십만평을 임대하여 농사를 지으며 농산물 가공공장을 하고 있었고 그 규모가 꽤 컸다. 아마 어렸을 때 아버지가 농사짓는 방법과 철학을 보고 자라며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문득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두 아들에게 고홍임 어르신은 어떤 분이실까? 

인터뷰가 무르익고 어르신이 게이샤 원두로 내린 커피를 두 잔째 드시고 계실 때, 하도초등학교 100년사에 한 꼭지에 글을 썼다며 국민학생 시절 에피소드를 들려주셨다. 난 그렇게 어르신이 운행하는 타임머신을 타고 70여 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하도초등학교 100년사에는 고홍임 어르신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 사진=김진경
하도초등학교 100년사에는 고홍임 어르신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 사진=김진경

어르신의 국민학교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월정, 김녕, 하도 초등학교 대항 운동회날이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싸 주신 도시락을 들고 운동회가 열리는 월정국민학교까지 가다 행원 볼레밭에서 넘어져 도시락이 다 엎어졌다. 어린 마음에 모래 범벅이 된 도시락을 던져버리고 우울한 마음으로 월정으로 갔더니 도시락 이야기를 들은 담임선생님께서 어르신에게 식권을 하나 들려주셨단다. 

선생님이 주신 식권을 들고 찾아간 식당에서 만난 국수는 그 당시 쉽게 볼 수 없었던 국수였다. 돼지고기 듬뿍 넣고 만든 뽀얀 고기국수였다. 그 식당의 그 날 안주는 돼지고기, 식사는 고기국수였다. 어르신이 처음 먹었던 그 고기국수 맛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고기가 어찌나 두툼했는지. 지금도 그때 먹었던 베지근한 고기국수만큼 맛있는 국수를 이제껏 먹어 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친구들은 그런 어르신을 모두 부러워했단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도시락 엎을 걸 하며 한탄하는 친구들도 있을 정도였다. 

아마 세 마을의 학교가 연합으로 여는 운동회인 만큼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마을잔치 같은 날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그런 마을잔치에는 돼지를 잡아 수육도 삶고 고기국수도 마련하여 운동회의 흥과 분위기를 띄우는 음식으로 딱 맞았을 음식을 어르신은 행운처럼 드셨던 것 같다.

또 이런 에피소드도 있었다. 6학년 운동회 날. 어르신은 몸이 좋지 않아 달리기 같은 단거리를 못 했다. 6년 내내 달리기를 하면 꼴찌는 어르신이었다고. 4학년때는 3등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어쩌다 세 명이 달리게 되어서 3등 해 보는 영광(?)도 누렸었단다. 난생 처음 달리기로 공책 한 권을 받았다. 아예 달리기에서 배제되고 기록을 맡기도 했다. 그런데 6학년 때 달리기의 방식은 좀 달랐다. 못을 단 막대기에 중간지점에서 병을 잘 묶어 병이 떨어지지 않게 유지하며 결승점까지 오는 방식이었다. 

막대기와 병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병을 떨어뜨리지 않고 단번에 도착할 수 있는지 감이 잡혔다. 이 달리기만큼은 자신 있었다. 여섯 명이 달렸는데 비록 중간 지점에 일등으로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결승점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고홍임 어르신이었다. 국민학교 6년 다니면서 달리기 1등은 처음 해 본 짜릿한 경험이었다. 

또 초가집에서 공부한 이야기, 학교에 불이 나 창고에서 공부하기도 했는데 비가 오는 날에는 창문에 유리가 없어 학교에 가지 못했던 이야기. 학교 초가집 밑에 쥐구멍이 있었던 기억, 바닥은 산듸짚이 깔려 있어서 연필을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찾기 여간 어려웠던 이야기들도 들려주셨다. 어르신의 이런 이야기들은 하도초등학교 100년사에 수록되어 있었다.

달리기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으셨던 삼촌의 에피소드로 삼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nbsp;/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br>
달리기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으셨던 삼촌의 에피소드로 삼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처음엔 다소 경직되었고 어려웠던 어르신과의 인터뷰는 점점 양파껍질 벗기듯 다채롭고 입체적인 매력이 있는 하도리의 정겨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로 공기가 바뀌었다.

“나는 사람이 사생활 하는 데만 관여했지, 산전수전은 겪지 않았어. 내가 맡은 임무를 하면서 사는 것이 도리지. 돈을 벌기 위해 산전수전 겪은 사람은 나는 산전수전 겪었다고 말하지 않아. 내가 생각하는 산전수전은 정말 죽을 고비를 넘기며 험하게 산 사람들이야.”

인터뷰 초반 어르신이 이야기 한 말을 나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커피 두 잔을 다 마신 후의 어르신의 얼굴을 보니 어르신이 말한 산전수전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40대인 나에게 어르신의 인생은 굴곡지고 험한 산전수전을 겪은 인생이었다. 그러나 늘 감내하고 인내하고 기다리며 지내셨을 삶을 사신 어르신에게, 본인의 인생은 산전수전이라고 말하기도 가당치 않다고 생각하는 삶에 대한 겸손과 인내의 산물이었다. 

나는 갑자기 내가 부끄러워졌다.

고홍임 어르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20년 후 60대의 나는 차마 산전수전을 겪으며 살았다고 말할 뻔했다. 

온갖 풍파와 사건 사고들을 마주함에도 의연하고 속으로만 삭이며 살아왔을 어르신의 인생. 군수사관으로 살아온 인생에서 혼자 감내해야 하는 비밀들과 이야기들을 속에 품으며 돌아온 제주에서 조금만 흐트러져도 실수할까 봐 외로움을 자처하며 사셨을 어르신의 삶. 하지만 그 인생 이야기 속 드문드문 보이는 위트있고 지혜로운 삶의 방식은 나의 무릎을 ‘탁’ 치기에 충분했다. 

누구와 만나도 본인은 고작 상대방보다 한 살 많은 사람이라 소개하시는 어르신의 인생을 고작 짧은 인터뷰로 다 들여다볼 수는 없었지만 외로운 삶을 사셨을 어르신에게 몇 해 전부터 어르신들보다 한 살 어린 ‘블랙맨’ 친구들을 사귀었단다. 성별도 나이도 서로 다르지만 검은 옷을 선호해 블랙맨 친구란다. 그 친구들이 곁에 있어 다행히 어르신이 외로워 보이지 않으셨다. 블랙맨들이 조우하는 하도리의 한 북카페에서 만난 고홍임 어르신은 내가 이제껏 만난 남자삼춘들 중 삶을 살아가는 자세에 대한 해답을 가장 명쾌하게 주신 분이셨다.

늘 블랙으로 갖춰입고 다니신다는 어르신의 성품과 오라가 상대방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 사진=김진경
늘 블랙으로 갖춰입고 다니신다는 어르신의 성품과 오라가 상대방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 사진=김진경

우리나라 국민학교 첫 1학년이었던 고홍임 어르신과 마지막 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내게도 작은 끈이 하나 생긴 것 같았다. 코냑처럼 향이 풍부하고 깊은 술을 좋아하는 하도리동동의 멋진 친구가 하나 생긴 기분이었다. 다음 하도리에 갈 때는 멋진 노신사 친구에게 줄 직접 증류한 44도짜리 소주를 들고 가야겠다.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김윤영(이로이로)

육지것에게 들리는 제주의 진한 사투리는 화가 나신 것도 같고 꽤나 투박하기도 하여 인터뷰 때마다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갔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매번의 인터뷰가 제주어 듣기 평가이기에 삼촌들의 표정과 손짓에 더 집중하며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있다.

하도리에서 이로이로라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관련된 여러 클래스들도 운영 중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제주의 콘텐츠들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있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한지 10년 차,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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