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10) 밤비

늦은 밤 손톱노크의 빗소리를 듣습니다

 

밤비

1
취객의 혼잣말처럼 깊은 밤에 오시는 비
하나 둘 불경기의 간판불이 꺼지면서
양순한 우산 하나가 까만 밤을 펴듭니다

말소리 숨소리, 조심성 참 많은 밤비
슬픔의 잔가지에 대롱대롱 맺힌 봄이
이제나 저제나 하다 목덜미를 깨울 때

문득 그 자리에 올려다본 까만 하늘
사랑을 모르고 산 어둠의 살갗들이 
순순히 악역을 풀고 밤을 속삭이잡니다.

2
하늘의 귓속말을 우리말로 받습니다
나직나직 비 오는 창 그 여학생 목소리 같은
늦은 밤 손톱노크의 빗소리를 듣습니다.

/ 2018년 고정국 詩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시작노트

50년 전 그때 그 여학생 노크소리는 남달랐습니다. 뒷문으로 살며시 다가와 유리창 문을 손톱 끝으로 두들기다 보니, 약간은 금속성 소리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어느 비바람 사납던 밤, 자정 넘긴 시각에 그 여학생 손톱노크소리가 뒷문 쪽에서 들려왔습니다. 

전신에 삼도화상 입고, 병원비가 없어 강제퇴원하고 돌아와 셋방에서 잠못들어 신음할 때, 아득히 그 손톱노크소리가 들려왔던 것입니다. 가족들 몰래 일어나 뒷문 유리창을 열었습니다. 번쩍번쩍 번갯불 사이로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들기는 하늘의 노크소리였습니다. 

문을 열자 차가운 빗방울이 잠시 약해지면서, 화상 입은 내 얼굴을 어루만졌습니다. “불쌍한 나의 백성아, 혹시 학생 때 글짓기 상품으로 받았던 원고지가 지금도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원고지를 꺼내 오늘밤부터 일기를 쓰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화상에 손이 다쳐서 지금은 글을 쓸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걸 내가 왜 모르겠느냐, 오년이든 십년이든 손톱 다 빠져버린 손가락에 새로운 손톱이 나올 것이니, 그때는 반드시 글을 쓰라”시는 하늘의 나직한 타이름이셨습니다. 그야말로 본격적 글쓰기 태동의 밤이었습니다. 

다시 울퉁불퉁 삼십 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시작노트에 그때 까만 밤 나의 창에 ‘하늘 님’을 영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빗소리는 하늘의 노크소리가 아닌, 오십 년전 그 손톱노크의 여학생 목소리로 소곤대면서, <밤비>라는 시조 한 편을 건네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아프고 괴롭고 외로워도, 그 슬픔과 괴로움의 잔가지 사이에는 반드시 사랑과 감사와 기쁨이 있다는 것도 글쓰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2),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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