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민의 제주 생활사] (11) 갈치, 옥돔, 재방어 낚기의 경우

“제주도 사람들은 그물을 사용하지 않았다. 산과 바닷속이 험악하니, 물고기는 낚고 들짐승은 활을 쏘아 잡았다”(不用網罟. 山險海惡 不用網罟. 魚則釣 獸則射). 

윗글은 조선왕조 영조 41년(1765)에 편집된 <증보 탐라지(增補耽羅誌)>(김영길 번역본, 제주문화원)에 들어있는 내용이다. 제주도는 화산섬이다. 그래서 이형상(李衡祥)은 화산섬 제주 바다는 칼날 같은 돌들이 묶여 서 있더라고 기록하였다. 칼날 같은 돌들이 묶여 서 있는 화산섬 제주 바닷속으로 그물을 드리우기가 사나우니, 물고기는 낚시로만 낚았다는 것이다. 화산섬 제주 바다에서 물고기를 낚는 일은 어부들의 일거리였다. 제주도 어부들은 낚싯배를 타고 일정한 어장으로 가서 갈치, 옥돔, 재방어를 낚시로 낚았다. 원초 경제사회 때의 낚싯배는 사람의 힘과 바람의 힘으로 이동하는 무동력선이었다. 원초 경제사회란 백성들이 삶에 필요한 자원을 자연에서 마련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시대이다. 낚싯배는 어느 한 어부가 소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낚싯배를 소유하지 못한 어부는 이웃 어부의 낚싯배를 타고 어장으로 갔다. 제주도 어부들이 이웃집 어부의 낚싯배를 타고 어장으로 나갈 때마다 뱃삯을 물고기로 주고받았다. 이는 제주도 어부들의 관습법으로 작용하였다. 뱃삯의 정도는 물고기에 따라 달랐다.

이 글에서는 원초 경제사회를 경험하였던 어르신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제주도 어부사회에서 전승되었던 뱃삯의 속내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 속에는 있는 자와 없는 자가 더불어 살아가는 법칙이 들어 있었다.    

갈치 낚을 때 뱃삯

갈치는 상강(10월 23일경)부터 곡우(4월 20일경)까지 제주도와 제주도 이외 육지부 사이 수심 100m 정도 깊은 바다에서 월동하였다. 그리고 곡우부터 처서(8월 23일경)까지는 제주도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펄바다’에서 활동하였고, 처서부터 상강까지는 제주도에서 비교적 가까운 ‘걸바다’에서 활동하였다. ‘펄바다’는 제주도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바다 밑에 개펄이 깔린 바다라는 말이고, ‘걸바다’는 제주도의 조간대를 지나 바닷속 바닥이 돌이나 암반으로 이루어진 바다라는 말이다.

곡우부터 대서(7월 22일)까지, 제주도 어부들은 ‘펄바다’에서 갈치를 낚았는데, 이때 ‘펄바다’에서 낚는 갈치를 ‘봄갈치’라고 하였다. 그리고 처서부터 상강까지, 제주도 어부들은 ‘걸바다’에서 갈치를 낚았는데, 이때 ‘걸바다’에서 낚는 갈치를 ‘고실갈치’라고 하였다. ‘고실갈치’의 ‘고실’은 가을이라는 말이다. ‘봄갈치’는 낮에 낚았고, ‘고실갈치’는 밤에 낚았다. 그리고 ‘봄갈치’는 굵고, ‘고실갈치’는 자잘했다. 제주도와 제주도 이외 육지부 사이 수심 깊은 바다에서 월동을 마친 갈치가 ‘펄바당’에서 먹이 활동을 하는 ‘봄갈치’는 여름에 제주도 ‘걸바당’에서 산란한다. 이때 산란한 갈치는 어느덧 쑥 자라 ‘고실갈치’가 되는 셈이다. 

구좌읍 평대리 한윤혁(1920년생) 어르신에게 갈치 낚기와 뱃삯의 가르침을 받았다. 1970년대까지 한씨 어르신은 낚싯배를 타고 ‘고실갈치’를 낚으러 다녔다. 이때 갈치 낚기는 간만(干滿)의 차가 보잘것없는 조금 동안에만 이루어졌다. 자그마한 낚싯배는 간만의 차가 큰 사리 때에는 물살을 거스르기가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고실갈치’ 낚기는 밤에만 이루어졌는데, 갈치는 야행성 물고기였기 때문이었다. 갈치 어구는 ‘갈치술’이라는 손줄낚시였다. 어부들은 각자 ‘갈치술’ 하나씩 갖추었다.

‘갈치술’의 구조<br>한림읍 수원리 고성법(1919년생) 어르신께서 살아생전에 쓰시던 ‘갈치술’이다. 옥돔을 낚는 어구도 이와 같았다.&nbsp;/ 사진=고광민
‘갈치술’의 구조
한림읍 수원리 고성법(1919년생) 어르신께서 살아생전에 쓰시던 ‘갈치술’이다. 옥돔을 낚는 어구도 이와 같았다. / 사진=고광민

낚싯배는 어부 서넛이 탈 수 있는 크기였다.

출어(出漁)(1960년대, 제주항)<br>어부 세 사람이 낚싯배를 타고 갈치 어장으로 출어하고 있다./ 사진=홍정표
출어(出漁)(1960년대, 제주항)
어부 세 사람이 낚싯배를 타고 갈치 어장으로 출어하고 있다./ 사진=홍정표

어부 네 사람이 타면 ‘갈치술’과 ‘갈치술’이 엉키기 일쑤였다. 제주도 어부들은 낚싯배가 비좁아 여러 개의 손줄낚시가 서로 뒤엉키는 모양을 ‘술맞춤’이라고 하였다. 한씨 어르신이 타고 다녔던 낚싯배는 세 사람이 타야 ‘술맞춤’이 일지 않았다. 이때 어부 두 사람은 낚싯배 ‘한장’ 좌우에 한 사람씩 각각이 앉아서 갈치를 낚았다. ‘한장’은 낚싯배 맨 한가운데 칸살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낚싯배 주인은 뒤쪽 칸살 ‘고물’에 앉았다. 

갈치 미끼는 ‘고도리’라는 고등어 새끼거나 갈치 살코기를 발라낸 것이었다. 갈치 어장에 닻을 드리우고 낚싯배를 세웠다. 갈치가 물리는 수심이 달랐는데, 그 지점을 ‘고리’라고 하였다. 어부들은 각자 자기가 고기 낚는 ‘고리’를 찾아야 갈치를 많이 낚을 수 있었다. 어부들끼리도 갈치가 무는 ‘고리’ 정보는 서로 교환하지 않았다. 낚싯배 선주(船主)는 두 사람의 어부에게 각각 어획량의 5분의 1의 갈치를 뱃삯으로 받았다.

만선(滿船)(1960년대, 제주항)<br>어젯밤에 갈치 낚으러 나갔던 낚싯배는 만선이 되어 제주항으로 돌아왔다. / 사진=홍정표
만선(滿船)(1960년대, 제주항)
어젯밤에 갈치 낚으러 나갔던 낚싯배는 만선이 되어 제주항으로 돌아왔다. / 사진=홍정표

옥돔 낚을 때 뱃삯

옥돔은 제주도 지역에 따라 3가지 이름이 전승되었다. 제주도 동부 지역 사람들은 ‘오태미’, 남부지역 사람들은 ‘솔라니’, 그리고 제주도 서부 지역 사람들은 ‘생선’이라고 하였다. 옛 문헌은 옥돔을 ‘옥두어’(玉頭魚)라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오태미’를 한자어로 기록한 것이다. 옥돔은 ‘펄바다’에서만 사는 물고기이다. 어기(漁期)는 음력 9월부터 이듬해 음력 4월까지였다. 옥돔은 여름에는 맛도 떨어질뿐더러 쉬 부패하기 때문에 잡는 일을 삼갔다.

한림읍 월령리 사람들은 옥돔을 ‘생선’이라고 하였다. 이 마을 양창부(1926년생) 어르신에게 생선 낚기와 뱃삯에 대하여 가르침 받았다. 

한림읍 월령리 사람들의 생선 어장은 차귀도에서 북쪽으로 서너 시간 노를 저어야 갈 수 있는 먼 곳에 있었다. 차귀도는 한경면 고산리 125번지에 있는 섬이다. 생선 낚기 물때는 두무날(음력 11일과 26일)부터 다섯무날(음력 14일과 29일)까지였다. 생선 낚기는 낮 동안에만 이루어졌다. 생선은 펄 속에 몸을 반쯤 묻고 있으면서 먹이 활동을 펼치는 물고기였다. 생선 어구는 ‘갈치술’과 같았다. 다만 낚시만 갈치낚시보다 작았을 뿐이었다.

낚싯배는 어부 다섯 사람이 탈 수 있는 크기였다. 낚싯배 앞쪽을 ‘이물자리’, 뒤쪽을 ‘고물자리’, 그리고 배의 방향을 조종하는 장치인 ‘치’(키)를 꽂는 ‘칫궁기’ 주변을 ‘칫자리’라고 하였다. ‘이물자리’ 좌우에 어부 1명씩 2명, ‘고물자리’ 좌우에 어부 1명씩 2명, 그리고 ‘칫자리’에 선주 1명이 앉아서 생선을 낚았다. 생선은 닻을 드리우고 낚싯배를 세워 낚기보다는 조류와 바람을 따라 흘려 줘 가며 낚았다. 바람이 드세거나 조류가 세차게 흐를 때는 닻으로 속도를 조절해 가며 낚았을 뿐이었다. 

생선 낚싯배 선주는 네 사람의 어부에게 각각 어획량의 5분의 1의 생선으로 뱃삯을 받았다.

재방어 낚을 때 뱃삯

우도 사람들은 재방어를 ‘저립’이라고 하였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재방어는 이동성 물고기를 쫓아 우도 연안 가까이 몰려들었다. 우도 주흥동 양순향(1935년생) 어르신에게 재방어 낚기와 뱃삯에 대하여 가르침 받았다. 

우도 재방어 어장은 우도 북쪽 ‘박머리’에서부터 ‘새비톤여’까지였다.

‘저립’(재방어) 어장 ‘박머리’(2019년 10월 4일)<br>‘저립’ 어장 ‘박머리’에는 파도가 일렁이고 있다. / 사진=고광민
‘저립’(재방어) 어장 ‘박머리’(2019년 10월 4일)
‘저립’ 어장 ‘박머리’에는 파도가 일렁이고 있다. / 사진=고광민

어기는 하지(6월 22일경)부터 상강(10월 24일경)까지였다. 하지 무렵에는 어린 재방어가 우도 어장으로 몰려들었다. 우도 사람들은 어린 재방어를 ‘깨저립’이라고 하였다. 음력 7∼8월 무렵에 재방어는 150kg 정도까지 자랐다. 물때는 간만의 차가 느슨한 ‘조금’보다는 물살이 드센 사리 동안에 더 잘 물었다. 재방어는 주로 낮이나 달 밝은 밤에도 낚았다.

낚싯배는 세 사람이 탈 수 있는 크기였다. 우도 오봉리 어부들은 세 사람이 같이 힘을 모아 재방어를 낚았다. 재방어를 낚는 어부들은 서로 힘을 모아 재방어 손줄낚시를 공동으로 갖추었다. 우도 재방어 낚시는 두툼한 줄 200여 발에 2m 철삿줄에 낚시를 달아맸다. 재방어 낚시에서 25㎝ 위쪽에 자그마한 낚시를 다시 매달았다. 그 위에 두껑같은 것을 끼우는데 이것이 ‘쇠뿔’이다. 재방어 미끼는 갈치, ‘만배기’(만새기), 고등어였다. 재방어 미끼는 물고기를 통째로 낚시에 끼웠다. 재방어는 배를 이동하면서 낚는 수가 많았다. 그러니 미끼로 끼운 물고기가 올곧지 못했다. 재방어에게 먹이인 미끼를 올곧게 위장할 필요가 요구되었다. 재방어 어구의 쇠뿔은 물고기의 머리 구실을 하였다. 위에 달린 자그마한 낚시에 물고기 머리를 끼우고, 아래 커다란 낚시에는 물고기 몸통을 끼웠다. 쇠뿔 양쪽에는 구멍을 내고 그 자리에 소라 겉껍데기나 전복 겉껍데기를 박아놓았다. 재방어 낚시의 쇠뿔은 아무것이나 되지 않았고, 3살쯤 된 살아 있는 황소 뿔을 뽑아 만들었다. 어린 수소 뿔이어야 빛깔이 좋았다. 그래야 재방어의 눈을 끌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립’(재방어) 낚시의 구조 / 사진=고광민
‘저립’(재방어) 낚시의 구조 / 사진=고광민

재방어 미끼에 따라 어법(漁法)이 달랐다. 갈치는 전통적인 재방어 미끼였다. 갈치를 반으로 토막을 내어 머리 쪽은 내던져 버리고 꼬리 쪽만 미끼로 삼았다. 이때 쇠뿔은 바로 갈치 머리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갈치를 통째로 꿰면 재방어는 꼬리만 잘라 먹고 내빼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만새기는 1960년대부터 고안된 재방어 미끼였다. 만새기를 낚싯배 안에 살려두었다가 산 채로 낚시에 꿰어 재방어 미끼로 삼았다. 만새기가 없을 때는 고등어로 대신하였다. 미끼를 달아맨 재방어 낚시를 물속으로 드리워 놓고 배를 이동시켜 가며 재방어를 낚거나 닻을 드리운 채 배를 세워 놓고 낚았다. 앞의 어법을 ‘흘림배기’, 뒤의 어법을 ‘닷배기’고 하였다. ‘흘림배기’ 때는 갈치를 미끼로 삼았고, ‘닷배기’ 때는 살아 있는 만새기나 고등어를 미끼로 삼았다. 또 어법이나 미끼에 따라 하루 중에서도 시간대가 달랐다. 갈치 미끼를 낚시에 꿰었을 때는 해 뜨기 전(이때를 북새라 한다)이나 해가 질 무렵, 또는 달밤에 ‘흘림배기’로 재방어를 낚았다. 고등어 미끼를 낚시에 꿰었을 때는 밤에 ‘닷배기’로 재방어를 낚았다. 그리고 만새기 미끼를 낚시에 꿰었을 때는 낮에 ‘닷배기’로 재방어를 낚았다. 

그리고 ‘흘림배기’ 때 재방어가 물면 재방어와 배가 서로 줄다리기하듯 힘을 겨루었다. ‘닷배기’ 때는 배를 세운 채 미끼를 달아맨 낚싯줄을 흘려 주었다가 고기가 물면 힘을 내 낚싯줄을 잡아당겼다. 낚싯배가 물속으로 들어가는 험한 지경에 이르는 수도 있었다.   

오봉리 어부들은 재방어를 낚고 나서 서로 분배하였다. 어부 세 사람과 선주가 각각 4분의 1씩 나누어 차지하였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사람의 힘과 바람의 힘으로 낚싯배를 부렸던 원초 경제사회 때의 제주도 어부들은 어장 조건에 따라 배의 크기를 달리하였다. 갯가와 비교적 가까운 ‘걸바다’를 오갔던 낚싯배는 어부 세 사람이 타고 다닐 수 있는 정도의 배였고, 갯가와 비교적 멀리 떨어진 ‘펄바다’를 오갔던 낚싯배는 어부 다섯 사람이 타고 다닐 수 있는 정도의 배였다. 갈치와 옥돔 낚기의 경우, 어부마다 어획량의 5분의 1을 선주에게 뱃삯으로 주었다. 그리고 재방어 낚기의 경우, 어획량을 4등분으로 나누고 어부와 선주가 각각 1등분씩 차지하였다. 

제주도 낚싯배에 엔진이 장착되고 대형화되면서부터 제주도 낚시어업은 크게 달라졌다. 원초 경제사회 때에는 조금 때만 갈치와 옥돔을 낚았지만, 지금은 물때를 가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원초 경제사회 시대 사람들은 자연에 순응하며 고기 낚았다면, 개발 경제사회 시대 사람들은 자연을 거스르며 고기를 낚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일까 제주도의 갈치와 옥돔은 자원 고갈로 치닫고 있고 재방어는 완전하게 고갈되어 제주도로 오지 않고 있다. 


[고광민의 제주 생활사]는 제주의 문화와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이니스프리 모음재단’과 함께 합니다.


#고광민

1952년 제주도 출생. 서민 생활사 연구자.저서 ▲동의 생활사 ▲고개만당에서 하늘을 보다 ▲마라도의 역사와 민속 ▲제주 생활사 ▲섬사람들의 삶과 도구 ▲흑산군도 사람들의 삶과 도구 ▲조선시대 소금생산방식 ▲돌의 민속지 ▲제주도의 생산기술과 민속 ▲제주도 포구 연구 ▲사진으로 보는 1940년대의 농촌풍경 ▲한국의 바구니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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