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57) 구좌읍 평대리 이희순 어르신 ①

작년 10월, 한 방송국에서 해녀 음식을 주제로 다큐멘터리 촬영을 한다고 연락이 와 도움을 드리기로 했다. 우연히 좋은 기회에 평대리 해녀 삼춘들과의 인터뷰가 성사되었고 인터뷰는 다큐의 한 부분으로 들어가게 됐다. 방송용 카메라가 돌아가는 어색한 마을회관 안에서 처음 뵌 두 분의 해녀 삼춘들은 소파에 불편한 기색으로 엉거주춤 앉았고 나도 좀처럼 인터뷰의 물꼬를 트지 못해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인터뷰를 하겠다고 제주시에서 온 나를 혹여나 육지에서 온 사람으로 생각하시면 안되겠다 싶어 분위기를 빨리 깨려고 화제를 전환시켰다.

“삼춘, 저희 외할머니도 해녀여수다. 일찍 돌아가셨지만. 가파도 해녀마씸.”

이 말 한마디에 평대리 마을회관의 무드는 좀 더 부드러워졌고 조금씩 대화를 이어나가기 편해졌다. 그렇게 평대리 해녀들의 음식이야기로만 두 시간 넘게 대화를 나눴다. 더 이상 방송용 카메라는 아무도 의식하지 않았고 평대리 해녀삼춘들과 나는 신이 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인터뷰가 아닌 이제껏 먹고 살았던 음식 이야기를 수다 떨 듯 풀어냈다.

“근데 이, 우리 동네에서는 물토새기랜 안 해. 우리 평대에서는 굴맹이라고 해.”

제주 음식을 많이 안다고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고 다짐할 때는 바로 이럴 때이다. 아무래도 외가가 가파도인 나는 서남쪽 지역에서 주로 일컫는 물토새기만 익숙했지 굴맹이라는 단어는 그날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이정도면 제주 해녀의 생활사와 먹거리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두 분의 삼촌들 중에서 유독 눈을 반짝이며 말씀해주시는 이희순 어르신(1943년생)의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었다. 그래서 그 이후 몇 번이나 어르신께 인터뷰를 요청드렸다.

“야인, 고를 말도 어신디 무사 자꾸 물어볼 거 있댄 햄시?”

몇 번이나 인터뷰 요청을 드렸지만 계속 어긋난 일정으로 성사되지 못했고, 어르신과의 인터뷰가 더 이상은 어렵겠다는 생각과 함께 어르신을 내 마음속에서 놓아주자는 마음이 들었을 때 어르신 편에서 연락이 먼저 왔다. 처음 만났을 때 본인이 만듸떡 이야기 꺼냈는데 평대 오면 만듸떡 한번 만들어 주시겠노라는 연락이었다. 나는 주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만듸떡을 만들어 주시지 않는다고 해도 기뻤다. 바로 일정을 잡고 평대리로 넘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만난 이희순 어르신. 평대리 중동네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81년째 평대리를 지키고 있는 어르신이었다. 피난 당시 다른 동네에서 친정어머니만 혼자만 어렵게 빠져 나와 평대에 정착했고 평대리 토박이 아버지를 만나 혼인하셨다. 어르신은 일곱 딸과 두 아들을 둔 딸부잣집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형제자매가 워낙에 많았고 어머니가 이희순 어르신이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일찍 돌아가신 터라 아쉽게도 친정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립지만 함께 했던 기억이나 추억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다며 아쉬워하셨다.

혼자 남겨진 친정아버지가 계셨고 오빠와 언니는 일찍 결혼을 했다. 집안의 맏이는 이희순 어르신이었다. 당연히 집안 살림은 어르신의 몫이었다. 하루하루 먹기 살기 부족한 형편은 아니었어도 집안 살림도 해야 했고 동생들도 보살펴야 했다. 또 당시 여자가 학교에 입학한다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내심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마음만 그렇게 먹을 뿐이었다. 어르신은 학교에 가고 싶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일찍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도 평대리로 오고는 물질을 배우며 해녀 일을 조금 하셨단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은 부모나 어른들에게 물질을 배우면서 해녀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과 바닷가에서 놀면서 헤엄도 치고 해삼과 소라를 잡으면서 노는 것이 첫 물질의 시작이었다. 어르신 말씀을 빌리자면 ‘친구들하고 놀멍 자연적으로 배우는거’였다. 어촌계도 어르신이 30대가 되어서야 결성이 되었다 했다. 수협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에야 바다에서 물건을 해 오면 수협에서 수매해서 돈도 벌고 물질 해온 것들도 덕분에 수출도 많이 했지만 어촌계나 수협이 생기기 전에는 바다에서 해 온 물건들을 세화리까지 가져가 식당에 팔았다. 그렇게 용돈 정도 벌어서 쓰고 그래도 팔지 못해 남으면 먹기 바빴다고 하셨다. 

“우리 젊었을 때 해녀 모집해 가는 사람 따로 이서나서. 그렇게 해녀가 모이면 육지에 가. 출가물질. 그럼 또 육지에 물질 시키는 사람이 있지. 우리가 육지에서 물질해서 물건을 해오잖아? 그 사람이 거기서 팔아. 그렇게 판 돈 중 그 자가 이익금 먹고 남은 걸로 우리 계산해 주지, 육지는 가기만 하면 물질해 온 것들이 바로 돈이 되니까. 그때 제주는 물질해도 수협이 없었으니까 돈 되기가 어려웠었지. 그래서 육지에 많이 가 나서. 육지에서도 뿔소라 잡고 멍게영 합저(홍합)따고 해삼 잡고, 천초(우뭇가사리)도 캐서 돈 벌었지. 그렇게 육지는 한 4년 댕겨온 거 닮아. 2~3월에 나가면 한 반년 있다 8~9월에 들어와. 친구들하고 같이 출가물질 가잖아이. 몇 사람씩 해서 방 빌어서 같이 자고 밥해 먹고 해.  내가 있던 육지의 섬사람들 먹는거 보난 보리밥 먹더라이. 우린 육지 갈 때 제주에서 서숙쌀(차좁쌀) 가마니에 묶어 같이 배로 실엉 그걸로 밥 먹거든. 그래서 육지 아주망들이 우리한테 영 고라서. 너희는 서숙쌀 많이 먹어서 물에 동동 뜬다고. 자기네는 쌀밥 보리밥 먹으니까 물에 가라앉아서 (물질) 못한다고 했어.”

아직도 여전히 현직 해녀이신 이희순 어르신. 인터뷰날 당일은 허리수술 후 4개월 만에 물질을 나갔던 날이었다. / 사진=김진경
아직도 여전히 현직 해녀이신 이희순 어르신. 인터뷰날 당일은 허리수술 후 4개월 만에 물질을 나갔던 날이었다. / 사진=김진경

제주 어른들이 차조로 만든 술을 조껍데기술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차조를 호화시켜 누룩을 넣어 발효시키면 안에 전분질은 발효가 되면서 분해되지만, 조를 감싸는 껍질 부분은 분해가 잘 되지 않고 껍질 형체가 그래도 남아 있다. 멥쌀이나 찹쌀로 만든 술들은 알곡이 형체가 거의 보이지 않지만 차조는 그대로 알곡껍데기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차조로 골감주를 만들어도 마찬가지다. 당화가 모두 끝나도 차조껍데기는 알곡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안에 전분질은 덩그라니 비어있다.  어르신이 ‘너희는 서숙쌀 많이 먹어서 물에 동동 뜬다’라는 말을 하실 때 불현 듯 제주 어른들이 오메기술을 조껍데기 술이라고 부르는 것이 생각이 났다.

“육지 가 보난 남자는 버꾸기(바가지를 말씀 하신 듯 싶다) 도라매고 눈(수경) 조그만거 써. 여잔 한명도 안보였고 바다 들어가는 건 죄다 남자들이 해서. 우리 제주해녀들이 출가물질 다니니까 지금은 육지 섬마다 다 해녀 있고 그 중 제주 출신들도 많고. 그런데 막상 출가물질 가서 이것저것 빼면 남는 것이 별로 없어. 그래서 몇 년 하다 말았지”

그렇게 출가물질을 다니다 어르신 나이 스물여섯에 혼인을 하셨다. 신랑감은 같은 마을에 사는 친오빠 동창이어서 중매로 시집을 갔다라고 말하기도 그랬단다. 남편의 친할머니와 어르신의 부모님이 또 워낙 친해 어렸을 때부터 제 집 드나들 듯 매일 집으로 놀러왔고 심지어 오빠와 군대도 같이 다녀올 정도였다. 제주에 돌아와서도 바다에만 나가고 동생들 보살피며 살림을 맡아 하는 딸의 어깨가 무겁고 안쓰러워 보였을까. 아끼는 셋째 딸이 너무 멀리 출가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어르신의 친정아버지께서는 오빠의 벗과 중매를 주선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때는 학교 다녔던 사람들이 별로 없을 때고 나도 공부를 하고 싶어도 못했던 게 조금 한이 된 것 같아. 우리 아이들 대학까지 내가 이 악물고 보냈어. 그 때 당시 우리가 아이들 키울 때는 돈 막 잘 벌기 시작할 때여도 자기 밥만 잘 먹고 사는 것이 일 순위였고 대학까지 당연히 보내려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어. 근데 나는 내가 공부를 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더 악을 먹고 애들 대학을 보냈던 것 같아.”

남편 분은 배를 탔었는데 결혼한 후에는 농사를 겸하셨다. 그 당시에 배는 나무배에 바람으로 움직이는 풍선(風船)이었는데 보통 서너 명이 함께 배를 타고 생선을 잡아 와 돈을 벌었다. 마찬가지로 수협이 없을 시기라 배가 뭍에 닿으면 남편분이 리어카에 생선을 싣고 동네에 끌고  다니면서 돈을 버셨다. 생각해 보니 그 당시에 주로 옥돔이랑 갈치를 많이 팔았었단다. 그렇게 어르신은 물질과 농사를, 남편 분은 배를 타고 농사를 하며 네 아이를 키워내셨다.

지금에야 곤밥을 실컷 먹을 수 있는 시대가 왔지만 보리밥을 먹으며 살았던 것이 바로 어제 인 것 같이 생생하시단다. 보리밥을 지을 때는 고구마를 큼지막하게 썰어놓고 밥을 짓는데 그 고구마를 타박고구마, 모인고구마라고 불렀다. 지금처럼 노르스름한 단단한 밤고구마가 아닌 허여멀건한 고구마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고구마가 사라졌다. 또한 보리밥 아니면 서숙밥(차조밥)이나 모멀범벅. 모멀국수도 주로 먹었던 식사였다. 그렇게 일상식으로 먹었던 차조나 메밀이 지금은 아주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시대가 왔다. 그땐 그저 하루 잘 차려먹는 것이 중요했던 시대였고 다행히 아이들 굶기며 살지는 않아 감사했다고 하셨다.

막 물질을 마치고 오신 삼촌댁 부엌에는 당일바리 생물과 제주 송편, 4월에 제일 맛있다는 성게를 넣은 미역국까지 귀한 음식이 잔뜩 있었습니다.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막 물질을 마치고 오신 삼촌댁 부엌에는 당일바리 생물과 제주 송편, 4월에 제일 맛있다는 성게를 넣은 미역국까지 귀한 음식이 잔뜩 있었습니다.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어르신이 최고로 뽑는 옛날 반찬은 마을 사람들끼리 추렴해서 먹는 고기반찬이라 하셨다. 그리고 젓갈. 이렇게만 두 개가 어르신의 최고의 반찬이었다. 어르신은 주로 자리젓, 멸젓, 갈치젓을 담가 먹었는데 갈치젓을 만드는 것이 제일 까다롭다 한다. 왜냐하면 냉동 상태거나 심지어 얼음에 살짝 닿은 갈치도 젓갈이 되지 않았다. 배에서 바로 낚아온 갈치를 바로 받아 비늘 삭삭 긁어 정리하고 잘 토막낸 후 소금 넣고 간을 잘 맞춰야 갈치젓이 잘 만들어졌다. 또 옛날에는 어찌나 젓갈 위에 파리가 알을 싸 놓는 경우가 많았는지. 어르신은 ‘벌거지 인다’라고 표현하셨는데 항아리에 젓갈을 가득 담아둬도 벌거지 한번 일어나게 되면 그 정성으로 담근 젓갈을 버려야 했던 경우도 많다고 하셨다. 그러다 시대가 흘러 항아리 뚜껑이 생기면서 예전보다 벌거지 이는 경우는 덜 했고 지금은 직접 젓갈을 담그지 않고 편리하게 사 먹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암튼 어르신의 기억에 갈치젓은 여간 예민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 젊었을 때 돼지고기 먹기 막 어렵지는 않아나서. 옛날에는 통시라는 것이 있었잖아. 조 채에 설거지 해난 물 끼얹어 통시에 넣어주면 돼지가 그런 걸 그렇게 잘 먹었어. 집집마다 돼지가 있는 거라. 그걸로 클 만이 크면 그걸 추렴해서 한 다리씩 가져간다니까. 그럼 언젠가 우리집이 것도 추렴하면 한번 씩 와서 다 사가. 부위마다 가격차이가 있어 집마다 사정에 맞춰 추렴한댄 하믄 고기 사켜 하면서 오지. 그땐 마을에 정육점도 어서나서. 누구네 집 추렴했져 이 소리 들으면 추렴한 날은 사람들끼리 모영 간 삶아서 술 해 먹고 돈 주고 고기 사 가고. 그런 정이 있었어. 내가 아마 스물여섯에 결혼했으니까 서른살 까지 그랬던 거 닮아.”

이희순 어르신 댁에 막상 가보니 마당에 널린 생길이(무말랭이). / 사진=김진경
이희순 어르신 댁에 막상 가보니 마당에 널린 생길이(무말랭이). / 사진=김진경

어르신이 말씀하시길 지금 돼지고기는 옛날 돼지고기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지금은 사료를 먹지만 집집마다 통시에 돼지를 키우던 시절, 돼지들은 서숙 쌀 껍데기나 메밀 갈았던 껍데기를 많이 먹었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옛날 돼지고기가 그렇게 맛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추렴을 하는 날 돼지 삶은 국물이 생기고 그날은 몸국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 몸(모자반) 썰어놓고 메밀가루 훑어서 몸국 끓이면 그렇게 맛있었다고. 마늘은 당연히 기본으로 들어갔고 깻가루와 고춧가루까지 넣으면 정말 맛있는 몸국이 만들어졌다.

고를말이 없다며 다소 귀찮아하는 듯 해 보였던 이희순 어르신 댁에 막상 가보니 마당에 널린 생길이(무말랭이)가 가장 먼저 보였다. 우영팟에는 주황색 당근들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고 무도 가지런히 자리 잡았다. 돌담에 널린 해녀복은 바다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해 보였다. 나는 어르신의 부엌으로 돌격 직진했다.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 뚜껑을 열어보았다. 성게미역국이 보였다.

“어르신 이거 성게미역국이죠?”

“아니. 성게가 아니고 오늘 오랜만에 물질하러 가서 솜(말똥성게)이영 오분재기 행 온걸로 솜국 끓인거. 한번 먹어보젠?”

메역솜국과 마농지. / 사진=김진경
메역솜국과 마농지. / 사진=김진경
이희순 어르신의 해녀복. / 사진=김진경
이희순 어르신의 해녀복. / 사진=김진경
이희순 어르신. / 사진=김진경
이희순 어르신. / 사진=김진경

거짓말 보태지 않고 정말 20여년만에 먹어보는 오분자기였다. 

그렇게 이희순 어르신이 떠 주신 메역솜국과 마농지를 안주 삼아 어르신의 해녀음식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기로 했다.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김윤영(이로이로)

육지것에게 들리는 제주의 진한 사투리는 화가 나신 것도 같고 꽤나 투박하기도 하여 인터뷰 때마다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갔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매번의 인터뷰가 제주어 듣기 평가이기에 삼촌들의 표정과 손짓에 더 집중하며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있다.

하도리에서 이로이로라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관련된 여러 클래스들도 운영 중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제주의 콘텐츠들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있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한지 10년 차,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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