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석의 칼럼과 에세이 사이] (16) 고충석 제주대 명예교수, 前 총장

2007년 1월8일 김동길 당시 연세대 명예교수가  민주동지회 신년하례식에 참석한 모습 [사진출처-ⓒ오마이뉴스 남소연2007.01.08]
2007년 1월8일 김동길 당시 연세대 명예교수가 민주동지회 신년하례식에 참석한 모습 [사진출처-ⓒ오마이뉴스 남소연2007.01.08]

나이가 드니 옛것이 다 그립다. 특히 사람이 그렇다. 부모님은 물론, 나를 아껴주셨던 은사님들도 한분 두분 저세상으로 가셨다. 지난해 늦가을, 코로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김동길 교수님도 그런 분 중의 한 분이다. 보수 논객이라 일컫는 그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그는 교수로 재직하면서 민주화 투쟁을 하다가 옥살이도 했다. 한때, 현실정치에도 깊숙이 관여하기도 했다. 선생님처럼 글 잘 쓰고 말도 잘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대체로 글을 잘 쓰면 말을 잘하지 못하고, 말을 잘하면 글을 잘 못 쓰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예외적인 인물이다. 그는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축복받은 지식인임이 틀림없다. 그가 한 말과 글은 대중의 환호를 받기도 하고 때론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는 철저한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였고 신앙심이 깊은 개신교도였다. 강골의 반공주의자이기도 하다. 38선이 그어지기 이전 김일성 체제 하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겪었던 경험이 평생을 강고한 반공주의자로 살게 했다. 그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향을 평생 그리워하면서 살았다. 고향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실존이 뿌리 뽑히는 것이다. 지식사회학에서도 살면서 겪은 경험이 인식론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했다. 그러니 김 교수님처럼 고향이 이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근본적으로 남북문제를 보는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 확실한 것은 우리들의 젊은 날 그는 학생들로부터 최고의 은사로 칭송받으신 분이다. 나는 교수님의 강의를 공식적으로 신청해서 듣기도 했고 가끔은 도강을 하기도 했다. 그의 학점은 매우 짰다. 나는 교수님 과목을 수강해 겨우 낙제를 면했다. 그래도 그의 강의는 멋있었다. 낙엽이 눈송이처럼 내리던 어느 늦가을이었다. 강의실에 와서 에이츠의 영시를 칠판에 적고 시 해설을 10분 정도하고 10분은 당시의 사회·정치비판을 하고 나머지는 본 강의를 하셨다.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나의 전공인 행정학과의 강의와는 대조적이었다. 그때 교수의 강의란 저렇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는 미국에 유학 가서 에이브러햄 링컨을 연구했고 그를 매우 존경했다. 헤어스타일이나 외모도 링컨을 많이 닮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나이가 들어서 국내에 번역판으로 나와 있는 링컨 평전을 여러 권 읽어 봤다. 그러나 선생님이 쓰신 문고판 링컨 평전(샘터사 발간)이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과 관련된 나의 익살스러운 조크도 생각난다. 나는 대학 다닐 때 연세대학교를 통틀어 내가 3번째 미남이라는 농담을 하고 다녔다. 첫 번째는 김동길이고 두 번째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 번째 미남은 바로 고충석이다. 그때마다 추남 順 아니냐며 친구들은 놀려댔다. 대학 다닐 때 나는 선생님을 자주 댁으로 찾아뵙곤 했다. 선생님의 집은 젊은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여학생들도 있었다. 지금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있을 것이다. 제주대학교 교수로 와서는 선생님께 강의 요청을 드리기도 했다. 선생님은 그때마다 흔쾌히 수락해주셔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몇 년 전 연세대학교 교수와 이화여고 교장을 지낸 심치선 선생님의 장례식에서였다. 심 선생님은 나를 많이 아껴주신 고마운 은사님이다.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여학생처장을 하셨는데 그 인연으로 두터운 사제의 정을 유지했다. 그녀도 평생을 독신으로 사시다가 사후 시신을 연세대 해부학 교실에 기증하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도 고향이 이북이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심 선생님과 김 교수님 두 분 다 평안도 사람이고 월남해서는 이화여대 후문에서 두분의 어머니들이 왕래하며 지낼 만큼 절친한 이웃으로 사셨다. 자연스레 두분도 친 오누이처럼 평생을 서로 의지하면서 사셨던 것으로 안다. 

이 두 분은 오래전에 연세대학교 총장과 참의원 의장을 지낸 우리나라 현대사의 거물인 백낙준 박사의 수제자들이기도 하다. 대학생 시절 심 선생님 권유로 백 박사님의 장충동집에 세배를 간 적이 있다. 그는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대단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 그분에게 세뱃돈을 받은 기억이 지금까지 새롭다. 그는 항상 일인일기(一人一技) 교육을 강조했다. 사람이 먹고살기 위해서는 특장의 기술 하나씩은 익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육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자 성리학에 경도된 지식인이지만 문명사적인 통찰력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씀이었다. 

김동길 교수님은 휠체어에 노구를 의지한 채 심치선 교수님의 장례식에 오셔서 조사를 해주셨다. 김 교수님의 조사는 어떠한 말도 없이 테니슨의 시를 암송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유명한 시 백조의 노래( swan song)가 그것이다. 아름다운 백조는 평소에는 전혀 노래를 못 하지만, 죽기 직전에는 한마디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해는 지고 저녁별 반짝이는데
     날 부르는 맑은 음성 들려오누나
     바다 향해 머나먼 길 떠날 적에는 
     속세의 신음소리 없기 바라네 
     
     움직여도 잠자는 듯 고요한 바다
     소리 거품 일기에는 너무 그득해
     끝없는 깊음에서 솟아난 물결
     다시금 본향 찾아 돌아갈 적에
     
     황혼에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
     그 뒤에 밀려오는 어두움이여 
     떠나가는 내 배의 닻을 올릴 때
     이별의 슬픔이란 없기를 바라네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 
     파도는 나를 멀리 싣고 갈지니
     나 주님 뵈오리 직접뵈오리
     하늘나라 그 항구에 다다랐을 때(김동길 역)

장례식에 참석하신 사람들은 김 교수님께 오래 사시라는 덕담을 드렸지만, 조시를 낭독하며 김 교수님께서도 당신의 죽음 또한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죽음도 미리 준비한 것 같다. 그는 코로나19 후유증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영면에 드셨다. 장례식도 추모식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고인의 뜻에 따라 시신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실험용으로 기증됐고, 사시던 집은 김옥길 기념관과 함께 이화여대에 기증됐다. 남겨놓은 자식이 없으니 가는 길이 얼마나 쓸쓸했을까 생각해봤다.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싶은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에 따라 추모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1월 어느 일요일 오후, 택시를 대절해서 조의차 선생님 댁을 찾았다. 그날따라 하필 영하 15도를 웃도는 매서운 날이었다. 선생님이 살지 않은 집은 을씨년스럽다 못해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내가 학생이었을 때 선생님 댁은 꽤 크다고 생각했다. 마당도 넓었다. 김 교수님 어머니는 지나가는 누구라도 목마른 사람은 물을 마시고, 비록 거지라도 들어와 손이라도 씻고 갈 수 있게 대문을 개방하셨다고 한다. 마당에는 수도꼭지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선생님이 사셨던 집의 형태는 거의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집 옆에 고층의 건물들이 올라가 상대적으로 선생님의 집은 보잘것없어 보였다. 더욱이 19평짜리 김옥길 기념관이 마당에 들어서니 너무나 답답해 보였다.

선생님이 가시고 난 후 사람 손길이 닿지 않으니 집 마당에는 주인 잃은 신문지, 고지서, 통지문 같은 것만 주인을 기다리며 삭풍에 나부끼고 있었다. 대문 한쪽 편에는 선생님이 쓰셨음 직한 빈 여행용 트렁크 두 개가 눈비를 맞고 있어 더욱 쓸쓸함을 더해 주었다. 한때 수 많은 사람의 박수갈채 속에서, 화려한 삶(?)을 사셨던 그분의 역사도 바람이 되어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인생이란 이렇게 왔다 이렇게 가는 것( 셰익스피어,-Thus I come, Thus I go)인가!

고려말 조국의 운명 앞에서 인간사 덧없음을 되뇌었던 야은 길 재의 시조가 사나운 북풍을 가로질러 나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교수님께 이 시를 바치며 명복을 비는 것이 나의 추모방식이 되려니….
교수님의 명복을 빈다.


# 고충석

現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제7대 제주대학교 총장, 제주국제대학교 초대 총장, 제주발전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제주를 대표하는 원로학자로서 칼럼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노마지지(老馬之智)의 조언을 격주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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