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특집] 생존피해자 동광리 홍춘호(86)씨
고통 극복하고 여든살 넘어 해설사로 빛나다

어머니가 밭일을 할 때면 옆에서 사탕수수를 입에 물고 동생들을 돌봤다. 70여년 전이지만 장난을 치며 놀던 기억이 선하다. 어머니, 아버지와 남동생 셋, 그리고 사촌언니와 함께 살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1948년 11월은 그녀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지금은 사라진 마을,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이 그녀가 살던 곳이다. 4.3문화해설사로 활동하는 홍춘호(86)씨의 어린 시절 얘기다.

그녀의 11살 가을은 ‘해안선에서 5km 떨어진 중산간지역 통행자를 사살하겠다’는 초토화 작전이 시작된 때다. 중산간 마을 동광리의 주민들은 해안으로 내려오라는 소개령도 포고령도 알지 못하고 대다수가 마을에 남아 있었다.

동광리에 들이닥친 토벌대는 연설이 있을 예정이라며 주민들을 집결시켰고 구타와 총성이 이어졌다. 처음엔 10여명이 죽었다. 최초의 학살터는 집 근처였다. 홍 해설사는 “천둥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고 그날을 회상한다.

홍춘호 해설사가 동광리 무등이왓에서 1948년 11월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홍춘호 해설사가 동광리 무등이왓에서 1948년 11월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영문도 모른 채 고달픈 피난살이가 시작됐다. 처음엔 낮에는 동굴에 숨어지내다 밤이 되면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원물오름 굴에 숨어있던 때의 공포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총소리도 나고, 말소리도 나고, 발자국 소리도 났어요. 그날은 ‘우리가 이제 죽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발소리만 나면 우리에게 오는 것 같았어요. 가만히 그 굴 속에 엎드려서 어떻게 어떻게 시간이 지나는데...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면 그 사람들도 돌아갔어요. 그래서 ‘아 오늘은 살았구나’라고 한숨을 쉬었어요.”

곶자왈과 굴 속을 넘나들며 숨어지낸 지 몇 개월이 흘렀다. 제대로 밥을 먹지 못했던 남동생 3명은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허망한 마음과 함께 12월말 동광리 이웃들과 향한 곳은 큰넓궤다. 

큰넓궤는 굴 입구에서 10m까지는 한 사람씩 낮은 포복을 해야 겨우 들어갈 수 있다. 이어 2m 높이의 낭떠러지를 다시 내려간 뒤에야 높이 2m에 90여㎡의 공간이 나온다. 토벌대의 감시가 심해지자 40일이 넘게 어두컴컴한 굴 속에 숨어지내야 했다.

“부모님이 몰래 집에 가서 맷돌로 곡식을 갈아서 만든 범벅을 만들어오면 그걸 먹으면서 지냈어요. 천장에서 물이 떨어져서 고이면 억새를 빨대같이 만들어서 빨아먹고... 그 속에서 짐승같이 살았어요. 하늘을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밤 하늘이라도 한 번 보여달라고 했어요. 아버지에게 밤하늘이라도 한 번 보여달라고. 그러면 아버지는 ‘이제 나가면 죽는다, 잠잠해지거든 나가자’고 말씀하셨어요.”

영화 '지슬'에 나온 큰넓궤 관련 장면. 군인들이 동광리에 들어와 집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자 주민들은 마을 인근의 큰넓궤 속으로 들어가 50일 가량을 숨어 지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영화 '지슬'에 나온 큰넓궤 관련 장면. 군인들이 동광리에 들어와 집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자 주민들은 마을 인근의 큰넓궤 속으로 들어가 50일 가량을 숨어 지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숨어있던 주민들은 결국 토벌대에게 발각됐지만 불을 피워 연기로 내쫓는 기지를 발휘해 겨우 살아남았다. 토벌대는 입구를 돌로 틀어막고 가버렸다. 다행히 다른 곳에서 망을 보던 주민들이 늦은 밤 굴 입구에 박혀있던 돌을 모두 치워 빠져나올 수 있었다.

“돌을 치워준 분들이 날이 밝으면 토벌대가 와서 죽일 거니까, 아무데라도 마음대로 가서 살라고 했어요. 아니, 그런데 우리가 갈 수 있는 데가 어디 있습니까?”

온갖 고생 끝에 ‘계엄령 해제’ 선전물을 보고 주민들과 하산해 임시수용소인 정방폭포 위 단추공장으로 끌려갔다. 운동장의 풀을 뜯어먹고, 조금씩 나눠주는 쌀로 끓인 물을 먹으며 버텼다. 

이 곳에서 풀려난 뒤에도 갈 곳이 없었다. 가족들이 함께 살던 동광리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마을, 무등이왓은 130여호가 모두 불타 없어진 뒤다. 안덕면 화순리에 정착해 움막을 짓고 살고, 애기업개(보모)를 하며 어떻게든 살아보려 애썼다.

그녀가 14살 되는 해, ‘폭도들에게 무엇을 제공하면서 살았냐’며 억울하게 고문을 당했던 아버지는 시름시름 앓다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8년 뒤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뒤늦게 태어난 막내 남동생이 9살이 됐던 해다. 그 때를 회상하던 그녀의 입에서 “진짜 기가 막히게 살았지”라는 말이 새어나왔다.

“4.3 때문에, 시국만 아니었으면, 학교도 다닐 거 학교도 못 다니고, 학교도 몇 달 밖에 못다녔어요. 시국만 아니었으면 편하게 살고 공부도 하고 다 할 텐데.”

20대 초반 결혼과 함께 동광리로 돌아온 그녀는 아이들을 키우며 밭을 매고, 산에서 나무를 베다 숯으로 만들어 팔았다. 자정까지 일한 날이 많았다. 나무를 가득 등에 짊어지고 10km 거리에 있는 모슬포항 일대까지 걸어가야 했다. 

하루하루를 묵묵히 살다보니 4남매의 어머니이자 9명의 손자를 둔 할머니가 됐다. 괴로웠던 그 시절 기억을 가족들의 미소로 조금씩 메웠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숨어 살던 큰넓궤 쪽으로는, 불타 사라진 무등이왓 마을 근처로는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홍춘호 해설사가 가족들 이야기를 하며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
홍춘호 해설사가 가족들 이야기를 하며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

해설사로 시작한 제 2의 인생 

세상은 조금씩 바뀌었고, 4.3을 입 밖으로 말할 수 있는 시기가 됐다. 대통령이 사과하고 4.3진상조사보고서가 나왔다. 그녀가 취재진들의 동행 요청을 받고 큰넓궤를 다시 들어가본 것은 일흔여섯살이 되던 2013년이다. 얼마 뒤 동광리에는 사리진 무등이왓 마을과 아픔의 장소를 잇는 4.3길이 열렸다.

이 곳에서 제주도 소속 4.3문화해설사를 시작한 것은 5년 전이다. “4.3의 아픔을 직접 겪고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람들의 부탁에 마음을 먹었다.

해설사가 된다는 것은 끔찍했던 고통의 공간들을 다시 마주쳐야 한다는 의미다.  고통스런 공간을 다시 마주했을 때는 말이 잘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용기를 내며 말을 하기 시작하자 이 곳을 찾은 방문자들은 그와의 대화에서 큰 충격과 교훈을 얻었다. 홍 해설사 역시 학생들과 얘기를 나누며 걷다 보면 보람이 느껴졌다. 떠올리기조차 싫었던 70여년 전 공포스런 공간들은 이제 홍 해설사의 일상이 됐다.

2021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의 날 기념식에서 대한민국 인권상을 받고 있는 홍춘호 해설사. ⓒ제주의소리
2021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의 날 기념식에서 대한민국 인권상을 받고 있는 홍춘호 해설사. ⓒ제주의소리

2021년 홍 해설사는 4.3의 참상을 세상에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대한민국 인권상을 수상했다. 

“죽지 않아 이제도록 살아있으니까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죽어버렸으면 내가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아온 걸 누가 압니까? 아무도 모를 일인데 살아있으니 이런 얘기도 할 수 있고.”

아직 홍 해설사는 할 일이 많다. 특히 단추공장으로 끌려가 고생하던 남제주군 지역 사람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크다. 4.3 생존피해자로서 세상에 4.3의 이야기를 알리는 해설사로서 소명도 남아있다. 4.3 75년을 맞는 2023년에도 그녀가 계속 걷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앞으로도 내가 말을 지금처럼 잘할 수 있으면, 사람들이 요청하면 해야죠. 내가 말을 잘 못하고 걷지 못하게 되면 못하지만..., 지금처럼 말하고 걸을 수 있다면 손님들이 요청하면 얼마든지 해야죠.”

큰넓궤 앞에 선 홍춘호 해설사가 취재진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
큰넓궤 앞에 선 홍춘호 해설사가 취재진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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