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58) 구좌읍 평대리 이희순 어르신 ②

“허리 수술하고 4개월 정도 되신가. 오늘 첫 물질 다녀왔는데 오늘 솜(말똥성게) 해당 메역넣고 끓인 거라. 오분재기(떡조개)도 좀 해그네 넣고.”

인터뷰 요청할 때부터 절대 집 안으로 들이지 않을 것 같았던 이희순 어르신의 댁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가스레인지로 달려갔다. 가스레인지 위에 올린 냄비에 호기심을 갖고 있으니, 이희순 어르신 입가에 미소가 옅게 번지며 한번 먹어보겠냐며 식탁에 먹을 자리를 만들어주셨다. 그새 마농지까지 곁들인 메역솜국이 차려졌고 어르신의 부엌은 해녀삼춘의 코스요리를 선보이는 파인다이닝으로 바뀌었다.

물질 당일 끓이신 메역솜국. / 사진=김진경
물질 당일 끓이신 메역솜국. / 사진=김진경

예전에 오분자기는 전복보다 돈이 되지는 않지만 같은 먹이를 먹고 자라기 때문에 해녀들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어패류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어렸을 때 가파도에 가면 오분자기도 자주 먹었고 1990년대까지만 해도 내 기억에 식당에서 파는 해물 뚝배기 위로 오분자기가 올려져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연산 전복이나 오분자기는 제주에서 쉽게 볼 수 없게 되었다. 한동안 만나 볼 수 없었던 오분자기를 먹으니 기분이 묘해졌다. 일반 성게보다 쓴맛이 강해 상품으로는 잘 치지 않는다는 솜(말똥성게)도 나는 이날 처음 경험해 보는 맛이었다.

“(물질할 때) 욕심을 안 부리면 괜찮은데 저 아래까지 바당 속에 들어가면 전복이 있든 소라가 있든 꼭 보여. 그럼 눈에 보이난 요거 잡고 올라오젠 하지. 그럼 여기도 또 있어. 그것까지 잡젠 할 때는 숨 참은 것이 다 될 때라. 그때 그만 소라 잡고 다시 올라가야 숨이 돼(안 모자라). 딱 올라오는데 숨이 차면 위에서 한참 있다 들어 가야 돼. 욕심 부령 바로 들어가면 절대 안 돼. 숨 참아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숨 안 쉬믄 숨 컥 해부러. 그러면 안되거든. 그 숨을 좀 냉겨서 올라와야 정상이지.” 

바다 속에 들어가 소라나 전복을 캐 와야 돈을 벌 수 있지만 이는 곧 어르신의 숨과 맞바꾼 것들이었다. 돈을 더 벌 생각에 욕심을 부려 자기 숨을 헤아리지 못하고 바다에 들어가면 목숨을 잃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해녀들의 ‘욕심 부리지 말라’는 말은 그들이 한평생 바다 속에 들어가며 몸으로 체득했던 깨달음이다. 비단 바다 속뿐이랴. 뭍에서도 자기가 참을 수 있는 숨을 넘어 욕심을 부리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다만 뭍 위에서는 즉각 숨이 끊어지는 경험을 하지 못하고 있기에 숨이 끊어지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일 뿐. 어르신의 이 말씀이 나는 묵직하게 다가왔다. 

"욕심부리고 숨 다 쓰고 올라오면 절대 안 돼. 숨을 다 썼는데 큰 전복을 찾았으면 소라를 옆에다가 두고 올라오면 되지!" 인터뷰 中 /&nbsp;&nbsp;ⓒ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br>
"욕심부리고 숨 다 쓰고 올라오면 절대 안 돼. 숨을 다 썼는데 큰 전복을 찾았으면 소라를 옆에다가 두고 올라오면 되지!" 인터뷰 中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메역솜국을 맛있게 먹고 있는 나를 바라보시더니 어르신 갑자기 냉장고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셨다. 오늘 오전에 물질하면서 잡은 뿔소라였다. 바로 칼로 횟감을 쳐 주시고 초고추장까지 내어주셨다. 소라회는 초고추장에 찍어 먹어야 제일 맛있다고 이것도 먹어보라 하셨다. 수족관에 있는 소라도 아니고 식당에서 썰어주는 소라회도 아니었다. 평대리 해녀삼춘 파인다이닝에서 받는 두 번째 귀한 음식이었다.

뿔소라를 손질하는 어르신. / 사진=김진경
뿔소라를 손질하는 어르신. / 사진=김진경

소라회를 먹으며 어르신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았다. 지금은 잘 안 하는데 옛날에 제사 때 꼭 했던 떡이 있단다. 바로 모물만듸. 메밀 반죽을 밀대로 밀어 동그랗게 찍어내고 안에 소를 넣고 반달 모양으로 잡는 떡인데 제일 작은 떡을 세미떡, 중간 크기는 만듸떡, 가장 크게 만드는 건 물떡이라 불렀다. 무와 콩나물을 삶아 쪽파, 소금, 참기름, 깻가루 넣어 양념한 후 수분을 쫙 짜면 떡의 소가 만들어진다. 동그랗게 찍어낸 메밀 반죽 위에 콩나물·무를 소로 넣고 빚은 후 물에 삶아낸 후 한 사람당 3개씩 영장 떡으로 나눠 준 것이 바로 물떡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나 서숙 쌀 침 떡이랑 밀가루 상애떡도 잘 만들어났지. 뜨신데 놓으면 밀가루가 괴면서 상애떡이 돼. 근데 밀가루에 설탕 많이 놓으면 안 괴. 적당히 넣어야 괴.”

보통 어르신들께서 차조를 서숙이라고 말씀하시니까 차조 가루로 침 떡, 즉 차조 설기를 만드셨고 밀가루에 막걸리와 설탕을 넣어 발효시킨 상애떡도 만드셨다. 당시에는 토종밀 농사도 지었고 그 밀가루를 갈아 파우더(아마 베이킹소다를 의미하는 듯싶다)도 약간 넣어 만들었다고 하셨다. 여기서 포인트는 설탕의 비율을 너무 많이 넣으면 발효가 잘 안된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들은 발효가 된다는 표현을 ‘괸다’라고 한다. 술, 쉰다리, 떡 발효 등등 발효과정 중 보글보글 거품이 생기고 효모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괸다’라고 표현하시는 것이 재밌다. 

여하튼 이희순 어르신께서는 비결을 따로 적어 놓지 않고 눈대중으로 대충 떡을 해도 실패 없이 잘 만드신단다. 그 눈대중이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닌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본능적으로 얻어진 감이라는 것을 나는 모를 수가 없었다.

떡 이야기를 나누니 다음 내어주신 음식은 저번 설 명절에 집에서 가족들이 함께 만드셨다는 모물송편. 안에는 팥과 완두배기가 들어있었다. 완두배기는 떡집에서 사 오셨지만 팥은 직접 준비해서 만드신 거라고. 어르신 집에서는 꼭 메밀가루를 익반죽하여 빚은 ‘모물송편’을 만드신다. 떡집에서 파는 세미떡은 멥쌀에 메밀가루를 섞어 만든 떡인 데 비해 어르신이 만든 떡은 100% 메밀가루로만 만든 홈메이드 송편이라니. 어디서도 쉽게 먹어볼 수 없는 귀한 제주 음식을 마주하고 있었다.

한입 베어 무니 오히려 구수하고 묵직하게 깔린 은은한 메밀 향이 가득한 모물송편이 곤쌀로 만든 흰 송편보다 더 고급스러운 맛이 났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송편을 세 개나 먹었다. 어르신의 떡을 입에 넣으며 오늘 입이 호사하는 날이라 생각했다.

지난 설 명절에 만드셨던 모물송편. / 사진=김진경<br>
지난 설 명절에 만드셨던 모물송편. / 사진=김진경

이쯤 되니 어르신 갑자기 씩 웃으시며 오늘 오랜만에 물질 가서 문어도 잡았다며 냉동실에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큰 문어를 꺼내 손수 보여주셨다. 1.85kg 나왔다고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돈을 주고서라도 어르신이 잡은 문어를 받고 싶어 그 문어는 언제 쓰실 것인지 물었더니 요리학원을 운영하는 막내딸에게 준다고 하셨다. 아, 절대 내가 돈 주고 산다고 해도 팔아주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르신이 일전에 말씀하시길 어르신 집에서 만드는 보양식 중 가장 으뜸은 3kg 이상 된 문어로 쑤는 문게죽이라 하셨다. 나는 운이 좋게도 어르신이 직접 만든 문게죽도 먹어 볼 기회가 있었다. 몸통을 뒤집어 내장을 제거해 굵은 소금으로 박박 문질러 손질한 후 설탕과 무를 조금 넣은 물에 문어를 삶아 그 삶은 문어를 또 칼로 두들겨야 밑 준비가 끝난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준비한 문어로 죽을 쑤면 그 어떤 보양식이 따로 필요 없다고 하셨다. 

어르신은 냉동실에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큰 문어를 꺼내 손수 보여주셨다. / 사진=김진경
어르신은 냉동실에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큰 문어를 꺼내 손수 보여주셨다. / 사진=김진경

어르신 댁에는 업소용 큰 화로가 하나 보였다. 왜 화로를 집에 설치하고 쓰시냐 여쭤보니 3년 전까지 밭일할 때 가정용 가스레인지가 아닌 화로로 음식을 하면 시간도 단축되고 음식 만들기도 쉬워 사용했었단다. 굴맹이(군벗)도 큰 화로에서 삶은 것이 부드럽고 야들야들하게 잘 삶아지고 국수나 칼국수, 수제비도 화로에서 얼른 만들어 밭에 가져가면 효율적이라 하셨다. 

이희순 어르신께서 시집오고 나서는 당근 이천 평(약 6611㎡), 콩 삼천 평(약 9917㎡) 정도 농사를 지으셨다. 수확한 당근과 콩을 공판해서 팔아 생활하며 아이들 학비를 댔다. 밭농사로 모자란 돈은 바다에 들어가 잡아 오는 것들로 메웠다. 어르신께서 학교에 다니지 못한 아쉬움이 있어 아이들은 꼭 대학까지 다 보내고자 했다. 그 의지는 어르신이 한평생 바다에 들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나 큰아들 팔 때 돼지 6마리 잡아서, 친구들 직시(몫)로만 한 마리 들어가고 궨당들 먹는 거만해도 3~4마리는 필요하지. 그렇게 큰아들 팔고 4년을 붙여놔서 우리 2남 2녀 아이들 다 집에서 결혼시켰다. 마당에 천막 쳐 놓고 행 해났지. 동네 잔치랜 하면 동네 사람들 다 오고 우리 부녀회도 집에 와서 밥도 해 주고 설거지도 다 해주고. 진짜 결혼한댄 하면 그땐 마을 잔치나 다름없었지. 그때는 돈으로도 부주를 꽤 했을 때였는데 보통 오천 원, 많이 준 사람은 만원. 이렇게 줘나서. 그다음부터는 조금씩 오르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보통 오만 원아니? 열 배라 열 배. 그런데 재밌기는 그때가 더 재미이서 나서. 보리쌀에 팟 넣어서 놋그릇에 넣고 나무 쟁반에다 돼지고기 넉 점 썰어서. 갈빗살 딱 넣어서 주민 그게 꿀맛이야. ᄆᆞᆷ국은 도새기 잡는 날 삶아서 그 저녁부터 다음날까지 먹고 잔칫날에는 성게국도 끓여나고 많이는 안 끓여났지만, 콩나물도 놓고 해나서. 이제는 성게미역국 많이 끓여놓는 걸로 변했지.”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베지근한 몸국 한 그릇이 먹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 흔하던 몸(모자반)이 이제 제주에 거의 없다고. 시장이나 마트에서 살 수 있는 몸은 추자도산이 이제 거의 유일한 제주산이라고 했다.

흔했던 오분자기나 전복, 몸(모자반)이 그렇게 점점 귀해졌고 그 당시에는 돈이 되지 않는 것들이 비싼 몸값이 되기도 한다. 가령 보말이 그렇다. 어렸을 때 동네 꼬마들의 놀이며 간식거리였던 보말은 지금 시중에 소라보다 더 비싸게 팔리고 있다. 곧 솜(말똥성게)도 어느 순간 귀한 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희순 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길 지금이 바로 성게 철이란다. 특히 4월까지 잡는 성게가 제일 맛이 있다고. 4월부터 7월은 성게가 산란기여서 맛이 떨어진다고 한다. 보통 바다에 들어가는 시간은 물 때에 맞춰 정하는데 성게를 잡은 후에 그 성게를 까고 작업해야 하는 시간까지 계산해서 일과를 짜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해녀 탈의장에서 함께 모여 성게 작업을 하는데 올해 성게가 1kg에 13만 원까지 뛰었단다. 성게가 점점 비싼 몸이 되어가는 것이 마냥 좋지는 않다고 하셨다. 

솜은 지금 날이 추워 우뭇가사리 위로 가끔 하나씩 나와 있단다. 점점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면 솜도 차츰 바다 깊은 데로 들어간다고. 오늘 몇 개 봉가와서 오분자기 넣고 솜국을 끓이셨다는데 마침 그날이 우리가 어르신 댁에 방문한 날이었다. 

1943년생인 이희순 어르신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게으르게 살아 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부지런하고 착실하게 살아오며 2남 2녀를 대학 공부까지 다 시켰다. 성인이 되니 신기하게도 아이들이 각자 가르치는 일들을 하고 있단다. 큰딸도 간호사 잠깐 하다 지금은 과외를 하고 있고 작은아들도 영어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작은딸은 제주시내에서 요리학원을 운영하고 있고 제주 최초 여성 조리기능장이기도 했다. 

“어? 어르신. 저희 친정어머니도 따님 학원에서 한식 조리사 자격증 취득했어요.”
“내가 제주 음식으로 상도 받았어. 고라주카?”

2017년, 제2회 음식 박람회 때였다. 어르신께서는 뭣도 모르고 음식 해서 가지고 오면 된다고 해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시내로 갔다. 행사장에 가 보니 다른 사람들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음식도 오밀조밀하고 화려하게 만들어서 왔다. 어르신만 평소 옷차림이었단다. 어르신은 당시 옛날 전통식으로 대차롱에 밭에 가서 먹는 음식을 만들어 갔다. 보리밥, 서숙밥, 상추, 배추, 멜젓, 자리젓, 어랭이. 이렇게 밭일할 때 먹는 음식과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 두 가지 주제로 만들어 갔는데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온 화려한 음식을 보고는 매우 난처해하셨다. 

두 번째 지정된 자리에 만들어 온 음식들을 펼쳐놓은 후 앉아 있는데 남자분들이 슬슬 돌아보더니 어르신이 만들어 오신 음식이 무엇인지 물었단다. 그래서 설명을 하나하나 해 주었다. 옛날부터 먹었던 음식이고 제사 때 올렸던 우리 음식, 밭에 갈 때 차린 음식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 후엔 아무런 말도 없고 결과가 없어 어두워지기 시작해 집으로 돌아갔다. 김녕쯤 갔는데 전화가 왔다. 상 받을 거라고. 다시 부랴부랴 제주시로 들어왔다. 어르신의 음식은 마을 음식의 이야기와 내용을 잘 표현해서 가산점이 붙었다고 했다. 

어르신은 향토음식경연대회에서 평소 만드는 음식을 선보여 최우수상을 받으셨다. / 사진=김진경
어르신은 향토음식경연대회에서 평소 만드는 음식을 선보여 최우수상을 받으셨다. / 사진=김진경
어르신이 받은 향토음식경연대회 최우수상. / 사진=김진경
어르신이 받은 향토음식경연대회 최우수상. / 사진=김진경
어르신이 받은 제주해녀상. / 사진=김진경
어르신이 받은 제주해녀상. / 사진=김진경

제주에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네 할머니처럼 보이셨던 어르신이 지금은 열 명의 손자를 둔 현직 해녀 할머니로 살고 계시다. 꾸준하고 성실하게 해녀를 놓지 않은 덕택에 작년에는 해녀 박물관에서 제주해녀상도 받았다. 

어르신의 인생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르신의 인생 자체가 하나의 제주 해녀 음식박물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를말이 없다고 몇 번이고 말씀하셨던 어르신. 하지만 알고 보니 내가 최근에 만난 최고의 박물관장이셨다. 이희순 관장님께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셨다.

“다음에 오민 만듸떡 꼭 해 줄 테니까 메밀 한 말이랑 콩나물 천 원어치만 사와 이. 그리고 구쟁기 맛있는 거 고르는 거 알려주마. 소라도 늙은 건 맛 어서. 껍질도 두껍고. 껍질 얇은 소라가 맛있어.”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김윤영(이로이로)

육지것에게 들리는 제주의 진한 사투리는 화가 나신 것도 같고 꽤나 투박하기도 하여 인터뷰 때마다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갔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매번의 인터뷰가 제주어 듣기 평가이기에 삼촌들의 표정과 손짓에 더 집중하며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있다.

하도리에서 이로이로라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관련된 여러 클래스들도 운영 중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제주의 콘텐츠들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있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한지 10년 차,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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