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13) 들레 생각 외 3편

눈 없는 민들레 얼굴에 내 눈물이 맺힌 날

 

들레 생각 외 3편

1
약간씩 모자라서 우리 둘은 사이가 좋았지
성은 ‘민’이고 이름은 ‘들레’라는 
그 노란 코흘리개가 나도 무척 좋았지

일학년 옆자리에 자리 잡고 앉은 아이
이름 석 자 겨우 쓰고 히죽 히죽 웃던 아이
그 여름 방학이 끝나자 학교 오지 않았지

사삼 때 고아가 된 두 살 배기 이 아이를 
피난민 ‘민’ 씨가 챙겨 민들레가 됐다는 아이
가엾어 그해 여름에 뇌염으로 떠났지

생각, 생각 끝에 민 씨 집에 찾아갔지
민 씨네 움막집엔 아무도 살지 않고
마당엔 ‘들레’를 닮은 꽃송이가 있었지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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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월은 흐르고 흘러 오십 년을 넘게 흘러
쇠똥도 약이 된다는 초파일 금악오름
혼자서 소를 먹이는 그 아이를 만났지

작은 키 통치마에 단발보다 짧은 머리
터진 고무신을 얼기설기 꿰매 신은,
웃을 땐 눈이 없었던 민들레를 만났지

지상의 백년이면 천상의 하루란다
연꽃 빨간 봉오리가 고추잠자릴 예감하듯
들레는 그곳에 와서 나를 기다렸단다

3
봄 동산 모든 꽃은 첫사랑의 화신인 거
약간 모자라야 꽃의 마음을 안다는 거
첫사랑 나의 ‘들레’가 진짜 시인이었던 거

지상의 진짜 사랑엔 해피엔딩이 없다는구나
아프게 세상에 와서 아프게 봄을 웃는,
눈 없는 민들레 얼굴에 내 눈물이 맺힌 날.

/ 2004년 고정국 詩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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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쇠똥도 약이 된다는 부처님 오신 날, 한림읍 금악리 소재 해발280미터의 금악오름에 올랐습니다. 그때 유난히 키가 작은 민들레 한 송이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나도 몸을 낮추어 그 민들레에 눈을 맞추었습니다. 그 민들레송이가 50년 전 첫사랑인 나를 알아보고, 장시조 한 편을 건네주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낭송해드리는 '들레 생각'이라는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입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2),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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