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70) 에밀 뒤르켐(민문홍 역), 사회분업론, 아카넷, 2012

뒤르켐(Emile Durkheim, 1858-1917)은 1893년 소르본대학에 제출한 그의 박사논문인 ‘사회분업론’에서 ‘사회연대’를 분업의 관점에서 다뤘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국부론’(國富論, 1776)에서 ‘분업의 경제적 효과’를 다뤘다면, 뒤르켐은 ‘사회분업론’에서 ‘분업의 도덕적 효과’에 주목했다. 뒤르켐의 주장을 한 문장으로 축약하면, 분업은 ‘사회의 유기적 연대’를 가능하게 하여 사회를 통합시킨다는 것이다. ‘사회질서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뒤르켐은 ‘분업의 새로운 기능’으로 답했다. 

‘사회분업론’을 서술했던 1893년의 상황과 현대의 상황은 엄청난 차이가 있기에, ‘사회분업론’의 내용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살피는 것은 부당한 측면이 있을지 모르겠다. 필자는 뒤르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대가(大家)로서 그가 보인 치밀한 논증에는 경이로운 마음을 갖고 있다. 뒤르켐이 ‘사회분업론’에서 펼친 논증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큰 도전이 된다. 여기선 그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다룬다. 

분업의 연대 효과?

뒤르켐은 현대 사회가 기능적으로 분화되고 이질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현대 사회를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라는 중요한 질문 앞에 섰다. 사회가 동질성에서 이질성/기능적 분화로 그 구성 성질이 변했는데, 이때 사회질서를 어떤 방법으로 유지할 수 있을까가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 

뒤르켐은 ‘분업의 기능’에 초점을 맞췄다. 그가 ‘사회분업론’에서 내린 결론은 ‘분업’이 이질적이고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를 유기적으로 연대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뒤르켐은 분업의 진정한 기능은 두 사람 이상의 사이에 연대감을 창조하는 거라면서, 분업이 낳는 ‘도덕적 효과’는 분업의 ‘경제적 효과’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분업의 경제적 효과’는 ‘분업의 도덕적 효과’와 비교해 보면 “보잘것없다”라고까지 표현했다.

필자가 뒤르켐 이론에 가지는 첫 번째 의문은 분업이 ‘사회의 유기적 연대’를 과연 가능하게 하는가이다. 소견에 따르면, 뒤르켐의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반이 맞다’는 것은 분업이 제대로 기능하면 사회가 나름 조화롭게 움직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반은 틀렸다’는 것은 분업이 제대로 기능하더라도 사회의 유기적 연대까지는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 사회에서 분업이 제대로 기능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뒤르켐과 필자의 생각은 더 멀어진다. 뒤르켐도 분업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을 ‘사회분업론’ 제3장에서 다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뒤르켐의 ‘예외적인’ 상황이 필자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으로 보인다. 필자에게는 ‘분업의 비정상적인 형태들’에 대한 뒤르켐의 연구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분업의 비정상적인 형태들’은 현대 사회의 병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필자는 뒤르켐이 분업의 도덕적 영향력을 과대평가했다는 생각이 든다.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사상가들이 있다. 맑스는 노동 소외가 일어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로 ‘노동 분업’을 가리키면서,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노동 소외의 여러 형태를 언급했다. 니체 또한 탈인간적인 톱니바퀴와 메커니즘으로 인해, 노동자의 ‘비인간화’로 인해, ‘노동 분업’이라는 잘못된 경제학으로 인해 삶은 병이 들고, 목적이 상실되고, 문화가 상실되어간다고 보았다.

분업은 생산성의 향상을 극대화하지만, 이로 인한 ‘최소 비용 최대 효율’의 추구는 ‘도구적 합리성’의 길을 열어 놓았다. 도구화된 이성은 연대를 크게 중시하지 않는다. 이는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와 아도르노(Theodor Adorno)로 대표되는 프랑크푸르트학파 1세대의 ‘도구적 이성 비판’을 통해 잘 확인된다.

유기체의 사회로의 유추?

뒤르켐 방법론에서 특징적인 것은 유기체의 작동 원리를 사회에 유추 적용한다는 점이다. ‘사회유기체설’은 사회학 초창기에 콩트, 스펜서, 뒤르켐 등에 의해 주장되었다. (뒤르켐이 ‘사회분업론’에서 자주 인용한) 콩트와 스펜서는 뒤르켐의 주장과는 비슷하지만 다른 주장을 펼쳤다. 이후 사회학에서 ‘사회유기체설’은 약해졌는데, 이는 유기체 원리를 사회에 적용할 만큼 둘이 닮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했다. ‘사회유기체설’이 가장 강력하게 주장된 것은 뒤르켐에 의해서인데, ‘분업의 유기적 연대’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뒤르켐은 분업이 자연 법칙인 동시에 인간행동의 도덕적 규칙이 된다고 하면서, 분업에 기인하는 연대를 ‘유기적 연대(organic solidarity)’라고 명명했다. ‘분업의 유기적 연대’ 효과는 유기체(생물체)의 작동 원리가 사회에 유추 적용된다는 것을 통해 근거지워졌다. 뒤르켐에 있어 협력과 연대는 유기체적인 것이다. 유기체의 각 기능은 이질적임에도 협력 관계가 꾸준히 유지된다.

뒤르켐의 유명한 ‘아노미’ 개념은 ‘자살론’(1897) 출간 4년 전에 ‘사회분업론’(1893)에서 ‘유기적 연대’를 논하는 문장에 나온다. ‘아노미 상태가 불가능하다’는 표현으로 등장했다. 유기체인 사회에서 ‘아노미 상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 분업이 제대로 되면 ‘사회의 유기적 연대’가 이루어져서 아노미 상태가 불가능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사회 분업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분업이 사회의 유기적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는 뒤르켐의 분석에는 사회와 유기체를 동일시하는 뒤르켐의 관점이 작용했다. 필자는 유기체를 사회에 유추하는 뒤르켐의 방법론에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유기체의 분업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유기체를 적절하게 살아가게 하지만, 사회의 분업은 그렇지 않다. 사회의 분업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인위적인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외부 기관의 감시와 규제가 필요할 뿐더러, 사회의 분업이 제대로 기능하더라도 그 모습은 ‘유기체의 유기적 연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현대 사회의 ‘기능적 분화’와 ‘유기적 연대’는 필자에게는 도리어 ‘가야 할 길’처럼 보인다. 생물체계의 작동 원리를 사회체계에 적용함으로써 사회의 규범화된 모습을 선취해서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사회의 실제 작동 원리와는 맞지 않다. 사회는 기능적 분화가 완벽하지도 않고, 체계의 자기준거나 자기생산이 유기체처럼 이루어지지도 않고, 그 기능체계 간의 구조적 연결도 원만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사회는 유기체처럼 건강하지 않다.

유추(類推, analogy)는 같은 종류의 것 또는 비슷한 것에 기초하여 다른 사물을 미루어 추측하는 방법이다. 유추라는 방법은 유기체와 사회가 비슷하다는 것에 기초해서 유기체에 적용되는 것을 사회에도 적용한다. 하지만 유기체와 사회가 애초에 비슷하지 않다면 유추 자체가 방법론적으로 문제된다. 무엇보다 유기체와 사회의 본질적 차이는 양자의 유사성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에 유추라는 방법은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건강’과 ‘유기체 간의 공존’

필자는 사회를 유기체로 보지 않는다. 다만 유기체와 비슷한 점이 있고 매우 다른 점도 있다는 점을 중시한다. 사회에는 부분 상호간과 부분과 전체 사이의 내면적 필연성이 없기에, 필자는 부분 상호간과 부분과 전체 사이에 조화를 이루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을 규범적 개념으로 주장하고자 한다. 사회가 유기체가 아님에도 유기체와의 관련성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유기체 간의 공존’에서 사회의 (어느 정도는 反사실적인) 규범적 전형(典型)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과 ‘유기체 간의 공존’ 개념은 뒤르켐 이론에서 좀 더 부각되어야 한다. ‘건강’과 ‘유기체 간의 공존’이 오늘날 사회이론을 구상하는데 적절한 매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뒤르켐은 ‘분업의 도덕적 기능 – 유기적 연대’, ‘유기체의 사회로의 유추’를 주로 다루면서 이와 관련하여 ‘건강’과 ‘유기체 간의 공존’을 다루었다. 

필자는 병든 유기체와 병든 사회, 건강한 유기체와 건강한 사회가 비슷하다는 점에 근거해 사회를 유기체에 비유하고자 한다. 사회와 유기체는 ‘유추’ 관계에 있기보다는 ‘비유’ 관계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를 위해 뒤르켐의 ‘사회분업론’으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뒤르켐은 유기체를 사회에 ‘유추’하기도 했지만, ‘비유’하기도 했다. 

유기체(생물체)와 사회를 연결하는데 가장 적절한 표현은 ‘건강’(‘건강한’)이라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건강한 생물체와 마찬가지로 ‘건강한 사회’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 이러한 언급은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이고 ‘유추’가 아니다. 사회의 건강은 모든 기능들이 조화롭게 발달할 때 가능하다. 

사회 기능들은 자신의 한계 내에서 절제할 줄 알아야 하며 서로 견제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화가 깨지고 질병이 생긴다. 유기체 간에 공존할 수 있어야 자연이 유지되듯이, 사회 구성원 간에도 공존할 수 있어야 사회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이처럼 ‘건강’ 개념은 ‘유기체 간의 공존’ 개념과 관련된다. 필자는 ‘건강’과 ‘유기체 간의 공존’이 오늘날 사회이론을 구상하는데 적절한 매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가며

뒤르켐은 (앞서 살펴본 바대로) ‘사회분업론’에서 이질적이고 기능적으로 분화된 현대 사회에서도 분업을 통해 사회의 유기적 연대를 성취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뒤르켐은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고 그 내용은 명료했다. 뒤르켐과 입장을 달리하는 필자도 뒤르켐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필자는 뒤르켐의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유기체의 작동 원리를 사회에 유추 적용하는 뒤르켐의 방법론에도 반대한다. 

‘사회분업론’에서 뒤르켐이 더 중점을 두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필자가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사회분업론’ 제3장에서 다룬 ‘분업의 비정상적인 형태들’과 ‘사회분업론’ 제1장에서 다룬 ‘건강’과 ‘유기체 간의 공존’이 그것이다. 필자는 뒤르켐이 이를 중심으로 논의를 펼쳤으면 하지만, ‘사회분업론’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뒤르켐이 주장하는 ‘분업의 유기적 연대’, ‘유기체의 사회로의 유추’ 내용이 너무나도 강력했다. 

책에서 내 생각과 딱 맞는 내용을 찾기는 쉽지 않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그 주장이 의미를 잃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내가 좋아하고 따르는 내용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큰 의미를 주는 책들이 있다. 내게 뒤르켐의 ‘사회분업론’은 그랬다. 내가 한때 이 책을 정말 간절히 찾았던 이유를 알 것 같다.


# 고봉진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고려대 법학과 졸업,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법학박사.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법철학/법사회학 전공).

블로그: blog.naver.com/gojuraph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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