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민의 제주 생활사] (13) 구제기

‘구제기물에’의 도전

‘구제기물에’는 제주도 해녀들이 물속으로 들어가 맨손으로 또는 ‘골갱이’라는 호미로 구제기를 잡아내는 도구라는 말이다. 제주 역사 속에서 구제기는 진상 품목에 들지도 않았다. 그러니 제주 역사 속에서 제주 해녀 사회에서 ‘구제기물에’는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 

조선 시대 때, 제주 해녀들에게는 판매와 진상을 위한 미역과 전복, 스스로 먹기 위한 모자반, 밭에 거름으로 쓰기 위한 해조류 정도가 주요한 채취물이었다. 1911년 강제병합 직후 자료 <남선보굴제주도>(南鮮寶窟濟州島)에는 전복 30톤, 해삼 33.9톤의 생산량을 기록하였다. 이때까지는 제주도 해녀 사회에서 본격적인 구제기물에는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1930년 자료 <제주도의 경제>(濟州島の經濟)에는 전복 1162톤, 해삼 131톤으로 증가하였고, 이전에는 채취하지 않던 소라 562톤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때까지도 제주도 해녀 사회에서 구제기 생산량은 전복 생산량에 절반도 미치지 않았다.  

1937년 《제주도세요람》(濟州島勢要覽)에 따르면, 1936년 현재 전복 생산량은 13만2728톤(가격 4만9733원), 구제기 생산량은 178만6828톤(가격 11만1677원)으로 나타났다. 드디어 제주 해녀 사회에서 구제기 생산량은 전복 생산량보다 13.5배 정도 많았다. 제주도 해녀 생산물 중에서 구제기는 단연 꼭대기에 올랐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제주 해녀 사회에서 ‘구제기물에’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제주도 구제기는 일본군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구제기 간스메(통조림) 공장이 여기저기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일본수산물통조림제조업요람》(日本水産物罐詰製造業要覽, 일본·농림성수산국, 1934)에 따르면, 1933년 현재 제주도에 구제기통조림공장은 17곳에 들어섰다.

제주도 구제기통조림공장 분포도. [카와하라노리후미(河原典史)가 《靑丘學術論集》(청구학술논집, 2001)에 발표한 &lt;식민지기의 제주도에 있어서 일본인 어민 활동&gt;(植民地期の濟州島における日本人漁民の活動) 논문에서]<br><br>甕浦里→옹포리, 城山里→성산리, 表善里→표선리, 製缶數→구제기통조림 생산량, 製缶なし→통조림 없이 구제기살코기만 생산,&nbsp;サバ味付→고등어양념, サザエ味付(アワビ水煮含)→구제기 양념(전복 백숙 포함)&nbsp;<br>/ 사진=고광민<br>
제주도 구제기통조림공장 분포도. [카와하라노리후미(河原典史)가 《靑丘學術論集》(청구학술논집, 2001)에 발표한 <식민지기의 제주도에 있어서 일본인 어민 활동>(植民地期の濟州島における日本人漁民の活動) 논문에서]

甕浦里→옹포리, 城山里→성산리, 表善里→표선리, 製缶數→구제기통조림 생산량, 製缶なし→통조림 없이 구제기살코기만 생산, サバ味付→고등어양념, サザエ味付(アワビ水煮含)→구제기 양념(전복 백숙 포함) 
/ 사진=고광민

구제기통조림공장은 가파도에서 들어섰다. 마라도 김창부(1912년생, 여) 어르신 가르침에 따르면, 김씨 어르신 15세가 되는 해인 1928년에 가파도에 구제기통조림공장이 들어섰는데, 가파도와 마라도 해녀들은 그 덕택에 큰돈을 벌기 시작하였다. 

제주도 구제기통조림공장에서 구제기통조림은 어떻게 생산되었을까. 고시홍 작가는 구좌읍 하도리에서 구제기통조림공장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도왔던 고홍빈 어르신을 만나서 구제기통조림 만들기 전개 과정을 가르침 받고, <민초(民草)들이 삶>이라는 이름으로 《제주학》(濟州學) 제4호에 발표하였는데,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구좌읍 하도리 고홍빈 어르신은 1930년 후반부터 1940년 중반까지 오씨가 경영했던 하도리 구제기통조림공장에 다녔다. 고씨 어르신은 구제기통조림공장에서 숙식하면서 일했다. 구제기통조림공장은 함석 건물이었다. 창고도 딸려 있었다. 그리고 구제기통조림공장 울타리 안에는 직원 2~3명이 숙식하는 살림집도 한 채 있었다. 전체 직원은 5~6명이었다.

구좌읍 하도리는 물론 이웃 마을 해녀들까지 물질하여 잡은 구제기를 등짐에 지고 구제기통조림공장으로 팔러 왔다. 우도 해녀들도 구제기를 배에 싣고 왔다. 구제기가 도착하면 직원이 저울로 저울이면서 수량을 외치면, 오씨 사장은 책상에 앉아 장부에 기록했다. 잔돈이 귀하기 때문에 소라 값은 약속한 날 이후에 수시로 받아가도록 했다. 당일에는 현금 대신 금액이 적힌 딱지를 내주었다. 이 딱지를 ‘만보’라 하였다. 만보는 화투장 절반 크기의 두꺼운 흰 종이에 사장 도장을 찍은 것이다.

구제기를 광주리에 넣고 가마솥에서 삶았다. 연료는 석탄이었다. 구제기가 많을 때는 밤샘 작업을 했다. 구제기를 삶아 내치는 대로 마을 동네 여자들은 ‘골갱이’(호미)로 구제기의 살코기를 떼 냈다. 구제기의 살코기를 떼 내는 일을 하는 인부들에게는 각자 작업한 분량에 따라 임금을 환산하여 계산하였다. 삶은 구제기의 몸통 부위는 통조림으로, 나머지 똥집 부위는 보리밭 밑거름으로 팔았다. 그리고 ‘구제기딱살’이라는 겉껍데기는 바로 옆에 있는 단추공장에 팔았다.

구제기를 삶아서 떼어 낸 살코기는 광주리에 담은 채 바닷물에 담그고 맨발로 지근지근 밟으며 찌꺼기를 씻어 낸 다음, 식수로 헹구고 나서 설탕과 왜간장에 버무려 앉은뱅이저울로 저울이면서 일정량을 통조림 깡통에 담았다. 이 과정에서는 뚜껑 일부만 밀봉하였다. 통조림 재료가 담긴 통들을 다시 큰 가마솥에 넣으면서 몇 시간 가열한 뒤 밀봉 작업에 들어갔다. 그다음 하나씩 꺼내면서 통조림 뚜껑 부위를 기계에 물려가며 낱개로 밀봉하였는데, 손놀림이 빨라야 제 모양이 나왔다. 고씨 어르신은 통조림 밀봉 작업을 담당하였다. 뜨거운 김이 가시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고통스럽고 위험 부담이 컸다.

동력은 타작할 때 이용했던 원동기였다. 한 사람은 손으로 밀봉하는 기계를 돌렸고, 한 사람은 깡통을 기계에 맞물려 밀봉했다. 자동기가 나오기 전에는, 일차 밀봉한 것은 송곳 같은 꼬챙이로 구멍을 뚫어 통조림 속의 김을 빼내고 나서, 마지막으로 납땜을 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통조림은 상자에 담고 나서 검사를 받았다. 검사는 일본인의 몫이었다. 완제품은 공장 안에 쌓았다가 1년에 한 차례씩 출하하였다.

구제기 수량과 값을 적어 놓은 ‘만보’는 구제기를 팔러온 해녀에게 한 장씩 주는 유가증권 같은 딱지였다. 15일마다 딱지의 수효대로 값을 계산하였다. 구좌읍 행원리 해녀 홍복순(1931년생, 여) 어르신은 만보를 ‘구제기표’라고 하였다. 구제기표는 구좌읍 세화리나 김녕리 오일장에서 현금 대접을 받았다.  

제주도 해녀들은 구제기 겉껍질을 ‘구제기딱살’이라고 한다. 구좌읍 하도리 구제기통조림공장에서 나오는 ‘구제기딱살’은 바로 옆에 있는 단추공장에 팔았다는 것이다. ‘구제기딱살’에서 단추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고승욱은 조천읍 조천리 고순민(1931년생, 여) 어르신에게 구제기딱살로 단추 만드는 과정과 구제기딱살로 만든 단추 재료까지 수집하여 《제주도해녀문화총서Ⅰ》(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섬문화연구소, 2019)에 발표하였다.

&nbsp;‘구제기딱살’로 만든 단추 재료. / 사진=고승욱&nbsp;<br>
 ‘구제기딱살’로 만든 단추 재료. / 사진=고승욱 

조천리 구제기통조림공장에서는 구제기의 살코기는 통조림을 만들었고, 구제기딱살로는 단추 재료를 가공하였다. 구제기딱살에 동그랗게 구멍을 내면 단추 재료를 얻을 수 있었다. 숙련공들은 구제기딱살 하나에서 단추 재료 5개까지 만들 수 있었다. 구제기통조림공장에서 생산된 단추 재료는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일본 단추공장에서는 구제기딱살 단추 완제품을 생산하여 영국으로 수출하였다. 옷을 만드는 영국에 있던 공장에서는 구제기딱살 단추를 옷에 달고 여러 나라로 수출하였다.  

제주 해녀 자식들 유학길에 오르다

일제강점기 때 제주 해녀들은 물속으로 들어가 감태와 구제기를 본격적으로 채취하기 시작하였다. 제주도 해녀 사회에서 감태 채취는 바로 일본·국방성이 필요로 하는 요오드화칼륨을 생산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감태에 들어 있는 요오드화칼륨은 바로 화약원료였다. 1905년 성산읍 성산리에 한국물산주식회사(韓國物産株式會社)에서 세운 소위 ‘감태공장’이 들어섰다. 일본·국방성이 필요로 하는 요오드화칼륨은 1년에 6∼7만 파운드(2만7180kg∼3만1710kg) 중에서 제주도의 감태에서 1만 파운드(4530kg)의 요오드화칼륨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제주도 해녀들은 일본·국방성이 필요로 하는 감태와 다시마 채취의 선봉에 나서게 되었다. 제주도 해녀들은 감태와 다시마를 채취하기 위하여 한반도, 일본열도, 러시아, 그리고 중국까지 진출하였다. ‘감태물에’로 채취한 감태는 일본·국방성이 필요로 하는 화약원료, ‘구제기물에’로 채취한 구제기는 일본·군인들의 먹거리 군수물자가 되었다. 제주도 해녀 어머니들은 ‘감태물에’와 ‘구제기물에’로 큰돈을 벌게 되었다.

제주도 해녀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유학길로 내모는 수가 많았다. 제주 해녀 어머니들에게는 좌익(左翼)과 우익(右翼) 따위의 이념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제주도 해녀 어머니들에게 필요한 것은 ‘표지’(標紙)를 쓸 수 있는 자식을 두는 것이었다. 표지는 오늘날의 영수증과 같은 말이다. ‘영수증’이라는 말은 일제강점기 때 수입된 말이다. 전통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잣집에서 쌀이나 돈을 빌려서 쓸 때는 표지를 써 가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었다. 이웃집 사람에게 부탁해 표지를 썼을 때는 그 값을 술 1병으로 갚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었다. 제주 해녀 어머니들은 표지, 곧 영수증을 쓸 줄 아는 자식을 두고 싶은 것이 바람이었다. 

제주도 해녀의 자식들은 제주도 이외 육지부나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 유학길에 오른 제주 해녀 자식들은 일본 도쿄(東京)에 있는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이나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리츠메이칸대학(立命館大學)에 입학하는 수도 제법이었다. 일본에 있는 와세다대학과 리츠메이칸대학은 그 당시 일본에서도 사회주의 이론이 탄탄한 대학이었다. 

제주 해녀의 자식들 교육 발전에 헌신하다 좌절되다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유학길에 올랐던 제주 해녀 자식들이 귀향하였다. 그 무렵 1945년 9월 10일에는 제주농업학교 강당에서 각 읍면 대표 100명이 모여 제주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제주 인민위원회는 교육 사업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1948년 4.3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제주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초등학교 44개교 신설하니, 95개교가 되었다. 중학교 10개교를 신설하니 11개교가 되었다. 유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제주 청년들은 학교 선생이 되었다. 그 당시 학교 선생은 무보수 명예직이었다. 무보수 명예직의 전통은 일제강점기 이전 조선 시대 때, 제주 마을에서 전승되었던 숭고한 실천이었다.

제주도 야학 풍경. 제주도 어느 야학 공부방에 청년들이 모여 공부하고 있다. / 사진=고광민<br>
제주도 야학 풍경. 제주도 어느 야학 공부방에 청년들이 모여 공부하고 있다. / 사진=고광민

조선 시대 때, 제주도 마을 입법 기구인 존위(尊位), 행정 기구인 경민장(警民長), 사법 기구인 감관(監官)은 무보수(無報酬) 직책이었다. 유보수(有報酬) 직책은 경민장이 거느리는 하인, 감관이 거느리는 ‘케지기’였다. ‘하인’은 마을에서 공적인 일을 위해서 심부름을 하거나 잡일을 하는 신분이 낮은 사람이라는 말이고, ‘케지기’는 일정한 구역의 농경지에서 방목 등 지켜준 값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미군정요원 E.그랜드미드 《주한미군정》(1951년)에서,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제주 인민위원회 활동은 모든 면에서 제주도에서의 유일한 당이었고, 유일한 정부였다”고 평할 만큼 평화롭고 활기 넘쳤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사망한 ‘3.1사건’에 항의하여 1947년 3월 10일부터 ‘민·관 합동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미군정시대(美軍政時代) 정부는 제주도를 ‘빨갱이섬’으로 설정하였다. 덩달아 제주도 이외 육지부의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회 단원들은 속속 제주에 들어와 경찰, 행정기관. 교육기관 등을 장악하면서 1948년 ‘4.3사건’이 일어났다. 광복 이후부터 1948년 4월 3일까지 이어졌던 제주도 사람들 스스로 힘으로 제주 인민 중심사회 건설의 실천은 좌절되고 말았다. 

제주도 구제기가 소위 제주도 젊은이들에게 ‘빨갱이’ 누명 씌우기에 한몫을 했던 셈이다. 지금도 제주도 ‘구제기’의 운명은 일본 수출에 휘둘리고 있다. 지금도 제주도 해녀가 잡은 구제기 70∼80%는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다. 구제기의 수출 길이 막힐 때는 잡은 바닷물 웅덩이에 저장한다. 2022년 12월 2일, 안덕면 대평리 해녀들은 자기가 잡은 구제기를 바닷물 웅덩이에 저장하고 있었다.

잡아 온 ‘구제기’를 저장하다(2022년 12월 2일). <br>안덕면 대평리 해녀들이 물속에서 잡아 온 구제기가 팔려나갈 때까지 갯가 물웅덩이에 저장하고 있다. 대평리 해녀마다 구제기를 저장하는 망사리를 각각 갖추고 있었다. /&nbsp;사진=고광민<br>
잡아 온 ‘구제기’를 저장하다(2022년 12월 2일).
안덕면 대평리 해녀들이 물속에서 잡아 온 구제기가 팔려나갈 때까지 갯가 물웅덩이에 저장하고 있다. 대평리 해녀마다 구제기를 저장하는 망사리를 각각 갖추고 있었다. / 사진=고광민

서귀포시 하효동 포구 주변에 있는 식당 이름은 ‘부에난소라’이다. 주인에게 왜 식당 이름이 ‘부에난소라’냐고 물었다. 일본 수출이 막혀서 ‘부에난’ 구제기들이 이 식당에 모여 있다는 것이다. ‘부에난’의 ‘부에나다’는 “화가 난다”라는 말이다. 일본으로 팔려나가지 못하여 화가 난 구제기들이 이 식당에서 팔고 있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제주도 구제기는 한국 사회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제주도 구제기는 한국의 전통적인 식문화의 대상에 끼어들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제주도 구제기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대접을 받기 시작하였다. 구제기는 일본의 전통적인 식문화의 대상에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주도 구제기는 제주 해녀들의 수입원이 되었고, 제주 해녀들은 자식들을 유학길로 내몰았다. 해방과 함께 고향 제주로 돌아온 해녀의 자식들은 인민위원회 교육 사업 등에 헌신적으로 뛰어들었고, 4.3사건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빨갱이’ 누명을 쓰는 신세가 되는 수도 있었다. 제주도 구제기의 운명은 제주도의 현대사와 함께 기구하였다.


#고광민

1952년 제주도 출생. 서민 생활사 연구자.저서 ▲동의 생활사 ▲고개만당에서 하늘을 보다 ▲마라도의 역사와 민속 ▲제주 생활사 ▲섬사람들의 삶과 도구 ▲흑산군도 사람들의 삶과 도구 ▲조선시대 소금생산방식 ▲돌의 민속지 ▲제주도의 생산기술과 민속 ▲제주도 포구 연구 ▲사진으로 보는 1940년대의 농촌풍경 ▲한국의 바구니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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