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59) 남원읍 수망리 김창언 어르신

"오일장에 가면 수망리 고사리를 제일로 쳐주지, 물이 좋아서 그래~"&nbsp;<br>벚꽃시즌이 지나고 고사리시즌이 왔으니 저도 고사리를 찾으러 가봐야할 것 같습니다. /&nbsp;&nbsp;ⓒ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br>
"오일장에 가면 수망리 고사리를 제일로 쳐주지, 물이 좋아서 그래~" 
벚꽃시즌이 지나고 고사리시즌이 왔으니 저도 고사리를 찾으러 가봐야할 것 같습니다.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이 고사리는 배미고사리. 우리 수망리 사람들은 잘 안 먹는데 육지에서는 잘 먹기도 합니다.”

수망리의 김창언(46년생) 어르신을 처음 뵈었던 날, 나는 이제껏 한반도 만나보지 못했던 고사리를 마주했다. 고작 고사리꺾기 6년 차인 나는 처음 보는 배미고사리에 보물찾기에서 보물을 발견한 듯 신이 났다. 고비라는 이름이 있지만 뱀이 또아리를 튼 것처럼 보여 수망리 사람들은 배미고사리라 부른다고. 우리가 흔히 백고사리(볕고사리)와 먹고사리로 구분하는 두 고사리를 마을에서는 촐왓고사리와 가시덤불 고사리라고 부른다고 하셨다. 제주시민속오일장에 올해 햇고사리가 처음 등장했을 때 상인분들께서 수망리에서 꺾은 고사리라 이렇게 좋지 않냐며 보여주신 것이 불현듯 생각났다. 상인들이 수망리고사리라고 강조하며 말 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마침 고사리장마도 시작되고 제주는 바야흐로 고사리 꺾을 철이 되어 어르신께 고사리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었다. (이 글에서 언급된 고사리는 수망리 허가를 받고 주민분들과 함께 채취했음을 알려드립니다. / 필자 주)

수망리에서 배미고사리로 불리는 고비<br>어르신께서 직접 찾아서 보여주셨다. / 사진=김진경
수망리에서 배미고사리로 불리는 고비
어르신께서 직접 찾아서 보여주셨다. / 사진=김진경

그렇게 다시 만난 김창언 어르신, 엊그저께보다 더 반가운 얼굴로 맞이해 주셨다. 이미 마을에서는 마을의 이야기와 역사에 해박하신 어르신이라는 소개도 받았고 마을지에 여러 꼭지에 많은 기록을 남겨주신 분이라 하셨다. 그래서 먼저 수망리(水望里),  마을지명만 들어도 물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여 무슨 의미인지 여쭈었다.

“우리 어른들이 말하기는 ‘물아, 무라, 물보라’라고 불렀어. 나중에야 수망리라고 통일했지. 의귀리는 오끼, 한남리는 무등개, 수망리는 물아라고. 한자로 물 水에 보라(ᄇᆞ라)와 비슷하게 들리는 望을 써 수망리라고 하지. 한자어 그대로 해석하지 말고 물보라가 많은 마을이라고 생각해야 해. 말 그대로 수망리는 예로부터 물이 좋기로 유명했지. 냇가 물도 오리수, 목자꼭지, 옹수물, 무근가름 뭐 이것 말고도 무척 많았어. 특히 큰이물이 가장 물이 깨끗했고 굉장히 따뜻해. 그래서 포제나 마을제를 지낼 때는 큰이물을 사용했지. 아무리 제주도가 가무는 해가 있어도 우리 수망리는 어디서 물이 나오는 지, 이제까지 물이 부족해서 걱정해 본 적이 없었어. 오리수 같은 경우에는 신흥리 사람들도 도라무통(드럼통) 가지고 와서 길어갔지. 물이 좋아서. 소마차도 오고 리어카도 오고 마차 없이 소만 와서 양쪽에 도라매고 물 길어가는 것도 보았어.”

물이 좋고 안개도 자주 낀다는 수망리. 이런 조건이 수망리의 고사리를 유명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는 것일까? 일단은 어르신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기로 했다.

아들 셋, 딸 넷 칠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어르신은 장남으로 태어났기에 고생을 많이 하셨다 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 당시에는 먹고 사는 일이 가장 중요했을 시기라 부모님은 낮에 일하러 가셔야 했고 어르신이 동생들을 업어주면서 보살폈다고 했다. 동생들을 한번 업으면 내려뒀다 다시 업을 수가 없어서 그냥 부모님이 집에 오실 때까지 동생을 계속 업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 동생이 옷에 소변이라도 해버리면 어르신 등이 따뜻해졌다가 바로 축축해지면서 식으면 찬기가 도는데 어떻게 할 도리가 없으셨다고.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사셨다고 한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벗하면서 맏이들이 주로 동생들을 돌봐주고 그 사이 부모님들은 농사를 지으러 나가셨다. 어르신 댁도 마찬가지지만 수망리 사람들은 보리, 조, 메밀, 고구마 농사를 주로 지었는데 절간고구마(빼떼기)도 많이 만들어 팔기도, 먹기도 하며 살았다. 수망리는 메밀 농사가 특히 잘 되어서 쌀(보리쌀)보다 메밀을 더 많이 먹었다고 할 정도로 자주 먹었다. 마을에 상이 나면 메밀가루를 이용해서 돌레떡을 꼭 만들어 피력떡(부조하는 떡)으로 사용했다. 마을 사람들이 제사할 때 만드는 음식 중 최고 유명한 것도(일반적으로 반드시 하는 것을 유명하다고 표현하신 듯싶다) 빙떡이라 하셨다. 묵도 직접 쑤어서 제사상에 올리는 등 메밀은 수망리 사람들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음식 재료라 하셨다.

“그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메밀 음식은 메밀죽이야. 메밀쌀로 죽을 쑤어 먹으면 속도 편안하고 맛도 구수하고 (배)속에 있는 것도 쑥 내려가고. 최고의 음식이지. 그리고 느쟁이범벅. 메밀 갈고 고운가루 거르면 그 위에 남는 속껍질이랑 굵은 거 있지? 그걸로 고구마랑 해서 범벅 만들어. 그거 고사리 꺾으러 갈 때는 새벽에 나가기도 하고 날도 막 풀릴 때가 아니라서 아침에 막 만들어 허리춤에 차고 나가면 따뜻하기도 하고 빨리 식지도 않고 온기도 있어서 좋았어. 그땐 비닐 같은 것이 없었으니까 보자기에 잘 싸서 보자기 양 끝을 허리에 잘 묶어 차고 나왔다 물가에 앉아서 먹기도 했어. 범벅에 간은 되어 있으니까 이게 한 끼 밥이지 뭐. 메밀 껍데기도 베개로 사용하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어. 그런데 버리기 아까워서 베개를 만든 것이 요즘은 건강에 좋다고 오일장에서 팔대? 그런 걸 보니 격세지감을 느껴.”

예전에 가스레인지가 상용화되기 전에는 연탄으로 숯 내서 그 위에 번철을 놓고 빙떡을 해 먹거나 피력으로 받은 돌레떡을 화롯불에 구워서 먹으면 정말 꿀맛이었다고 하셨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장날, 돌레떡을 한가득 삶아 시장으로 가셨다고 했다. 메밀가루를 동그랗게 반죽에서 물에 삶은 돌레떡을 다시 불에 구워 먹는 맛은 어떤 맛일까? 궁금해졌다. 또 중산간 마을이다 보니 꿩이 많았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꿩 울음소리가 시끄러울 정도였다고. 그래서 수망리 사람들은 꿩 잡아다 메밀 칼국수도 많이 만들어 먹었단다. 생각해 보니 메밀하고 꿩고기가 음식궁합이 잘 맞는 것 같다고 음식을 먹어도 속이 더부룩하지 않고 편안하고 든든해서 메밀꿩국수도 좋아한다고 하셨다.

어르신께서는 비가 많이 오는 마을이 특히 좋은 고사리가 많이 나는 것 같다고 하셨다. 옛날부터 제주 사람들은 수망리, 교래리, 송당. 이 세 부락의 고사리가 으뜸이라고 생각해서 이 마을의 고사리 값을 잘 쳐주는 편이었다고. 육지 상인들이 제주에 와 지역주민들을 고용해 마을 사람들이 꺾은 고사리를 받아 말려서 팔아 돈을 버는 모습을 많이 봐 왔었단다. 봄이 되기 시작하면 진드기나 해충들도 올라오고 묵은 풀 돌도 억세져서 과거에는 방엣불(방화불)을 목초지에 일부러 놓기도 했다. 그럼 해충이 타면서 그것이 또 거름이 되기도 하고 소와 말의 배설물도 거름으로 더해진다. 방엣불을 놓은 후 목초가 올라오기 전 먼저 맞이하는 첫 고사리는 정말 품질이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지금도 물론 수망리 고사리가 질이 좋지만 예전에 비하면 그 옛날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어르신과 함께 먹고사리 꺽는 비법을 전수받았다. 저렇게 길게 올라왔다고 아래로 꺾는것이 아니라 중간 부분 톡 꺾이는 부분에서 꺾어야 한다 말씀해주셨다.&nbsp; / 사진=김진경
어르신과 함께 먹고사리 꺽는 비법을 전수받았다. 저렇게 길게 올라왔다고 아래로 꺾는것이 아니라 중간 부분 톡 꺾이는 부분에서 꺾어야 한다 말씀해주셨다.  / 사진=김진경

고사리 꺾는 것도 수준이 있단다. 고사리 꺾기 경력이 오래된 사람은 백고사리는 못 꺾는다고 하셨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안 꺾는다고 하셨다. 그 이유를 물으니 먹고사리가 훨씬 비싸게 쳐 주니 덤불이나 숲 안에 숨어있는 먹고사리를 꺾는 것이 돈을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고사리 초보들은 먼저 초지에서 보이는 고사리를 꺾다가 어느 정도 능숙해지면 먹고사리로 넘어간다고 하셨다. 고사리를 삶아서 말리면 백고사리보다 먹고사리가 근수가 더 나가서 고사리꾼들은 먹고사리를 더 선호했다. 특히 일본으로 간 사람들이 제주에 왔다 돌아갈 때 고사리는 꼭 가지고 가려고 한다고. 일본에도 고사리가 있지만 제주고사리만큼 좋은 고사리는 보기 힘들다 했다. 그래서 일본으로 돌아갈 때 수망리 고사리도 함께 바다 건너 일본으로 많이 넘어갔다.

어르신은 제주 서쪽보다는 동쪽이 고사리가 훨씬 많이 나는 것 같은데 그 이유는 지형적 차이 때문인 것 같다고 하셨다. 비도 많이 오고 산을 끼는 지역의 고사리가 많이 나는데 수망리가 딱 그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봄철이면 여자들이 다 고사리 꺾으러 나간다고 한다. 특히 요즘처럼 비가 오고 그치고 어스름한 새벽 시간에 올라오는 고사리는 가장 좋은 최상품이다. 다들 잘 알겠지만, 제주에서는 4월에 내리는 비를 고사리장마라고 한다고. 맑은 한낮에는 위에서 아래로 꽂아 내리는 햇살에 고사리가 반사되어 잘 보이지 않고 해가 기울어져 있을 때 앉아서 비스듬히 땅을 보면 고사리들이 올라온 것들이 전부 다 보인다. 그래서 보통 오전에 고사리를 꺾으러 많이 다닌다고 하셨다. 농사는 내가 씨를 뿌리고 밭을 일구고 잡초도 제거해야 하는 등 신경을 써야 하는 것들이 많은 데 비해 고사리는 공짜니까 여성들이 놀이 삼아 도시락 싸고 친구들과 벗으로 삼아 같이 다닌단다. 친구들과 같이 다니면 고사리 꺾는 즐거움도 배가되고 혹여나 땅만 보고 다니다 길을 잃어도 벗들이 있으면 조금 덜 위험하다셨다.

“고사리는 열두손이 올라와. 그럼 우리 수망리 사람들은 고사리 꺾을 때마다 조상께 열두 번 절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조상님께 인사드리면서 꺾어. 사실 열두 번 꺾어도 더 납니다 고사리는. 다만 점점 줄기가 세어지고 맛도 없고 독도 강해서 더 이상 안 꺾는 거지. 지금 4월 중순 지나가면 뱀도 동면에서 깨기 때문에 백반이랑 방울 꼭 달아야 하고 주의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고사리를 꺾어도 9번이 올라온다고 알고 있던 나는 어르신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어르신의 말을 들어보니 보통 4월 한 달 동안 집중해서 고사리를 꺾고 5월로 넘어가면 고사리는 질이 떨어져 잘 꺾지 않는다. 아마 올라오는 족족 계속 꺾으면 계속 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고사리를 꺾을 때마다 등을 굽히는 행동이 조상님께 절을 한다고 말씀하시는 표현도 재미있었다. 고사리에 대한 이런 의미를 담아서 그런 걸까? 제사할 때 고사리 한가닥을 올려놓고 제사를 시작한다고 하신 수망리 이장님의 덧붙이신 말도 생각났다. 보따리전이라고 불리는 고사리와 달걀물을 이용해 만든 제사음식도 조상님이 제물 음식을 싸서 간다는 의미가 있는 걸 보아하니 고사리는 제주 사람들에게 조상과 자손을 이어주는 매개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사리는 소나 말이 안 먹어요. 보통은 안 먹는데 사실 배고프면 먹기도 하지. 삶아서 말린 고사리는 소들이 먹어도 괜찮은데 생고사리는 많이 먹으면 소들이 질병에 걸리더라고. 우린 그걸 고사리중독이라고 하는데 고사리중독에는 약이 없어. 처음에는 고사리 좀 먹어도 별 티가 안 나는데 이게 쌓이면 나중에 한꺼번에 나타나더라고. 나도 여러 번 소들이 고사리중독 걸린 걸 봐 났어. 모든 채소가 그렇겠지만 처음에 나온 첫 싹이 가장 좋잖아. 부드럽고 영양분도 좋고 독성도 거의 없고. 그래서 가끔 우리 초지에 사람들이 고사리 꺾으러 오면 고맙기도 해. 말이나 소들이 먹으면 안 되는데 고맙게 꺾어가시니까.” 

그러고 보니 갓 나온 햇고사리의 쓴맛은 생각보다 빨리 빠진다. 쓴맛을 유발하는 성분이 수용성이라서 삶거나 물에 오랫동안 담그면 고사리의 쓴맛이 빠지는데 여러 번  꺾은 후 올라오는 고사리가 쓴맛을 제거하는데 좀 더 오래 걸렸던 경험이 있었다. 아하. 이런 이유로 고사리꾼 고수들은 가장 먼저 올라오는 고사리를 꺾으러 누구보다 더 일찍 움직이시는구나.

다시 어릴 적 이야기로 넘어와서 김창언 어르신이 말씀하시길 수망리 어린이들은 의귀리 분교를 다녔다. 수망리에 학교는 없었지만, 서당이 있어 옛 어르신들은 한자를 굉장히 많이 알고 계셨단다. 분교는 4학년까지만 운영하기 때문에 5학년이 되는 해 남원초등학교로 옮겨 학교에 다니다 의귀초가 초등학교로 승격되었다는 소식에 다시 의귀초로 돌아와 1회 졸업생이 되셨다. 당시 어르신 또래의 수망리 남자들은 중학교까지는 어느 정도 다 마쳤고 여자들은 초등학교 정도는 집집마다 다 보냈다 하셨다. 그래서 학교 안 다녔던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여러 마을을 다니며 만났던 어르신들의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상황이었다. 아들딸 가릴 것 없이 모두 초등학교에 보낼 정도면 잘 사는 마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 메밀이랑 쌀농사가 좀 되어서 마을 사람들이 잘살게 되신 거에요?”

“아니. 쌀을 팔아서 돈을 번 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고. 옛날에는 식구들도 굉장히 많았잖아요. 집에서 한 끼 먹는 양도 어마어마했지. 농사로 돈 벌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어. 농사지으면 일단 식구들이 먹는 것이 제일 먼저였으니까. 우리 수망리 마을에서 돈이 좀 나오는 것이 바로 축산. 소나 말을 하던지 돼지를 하든지 해야 형편을 좀 필 수 있었어. 아이들 학비 보태기도 하고. 그렇게 돈 벌어서 오히려 오일장에 가 먹을 쌀을 사 왔지. 농사로 돈을 번 마을이 아니야.”

학창 시절의 어르신의 장래 희망이 무엇이었는지 묻자, 어르신 하시는 말씀은 이렇다. 그땐 부모 말 거역하지 않고 잘 듣는 사람들이 제일 착한 사람이었다고. 놀러 안 다니고 일 도와드리고 다들 그렇게 살다 보니 도와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해 보인다고. 우리 집도 축산을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너는 테우리가 되어라.’라고 말씀하셔서 학창 시절 부모의 말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레 테우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셨단다.

“소나 말은 초지에 방목을 많이 해. 소는 집에서 키우기도 하지만 봄 나면 산에 올라가기도 해. 말은 원래 방목하니까. 그런 소나 말을 돌보는 사람들을 테우리라고 해. 몇백 마리 크게 하는 사람들은 육지 사람들을 따로 데리고 테우리를 전담하게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냥 가정에서 수십 마리 하는지라 우리 식구들이 직접 테우리를 했지. 내가 장남이라 테우리를 많이 했어. 다른 수망리 집들도 비슷해.”

책에서만, 그리고 다른 어르신의 이야기에서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던 테우리. 

내 앞에 앉아계신 어르신이 테우리였다는 사실에 나는 반가움을 감출 수 없었다. 평소 테우리에 대해 궁금했던 것도, 내가 책으로 알게 된 테우리가 일반적인 제주 테우리의 모습인 것도 맞는지 알고 싶었는데 이렇게 우연히 마주하게 되다니.

함께 고사리를 꺾고 돌아와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손목에 보이는 시계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혹시 손자들이 사 준 시계는 아닐까? / 사진=김진경
함께 고사리를 꺾고 돌아와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손목에 보이는 시계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혹시 손자들이 사 준 시계는 아닐까? / 사진=김진경

고사리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나는 김창언 테우리 어르신의 인생 이야기를 더 들어보기로 했다.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김윤영(이로이로)

육지것에게 들리는 제주의 진한 사투리는 화가 나신 것도 같고 꽤나 투박하기도 하여 인터뷰 때마다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갔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매번의 인터뷰가 제주어 듣기 평가이기에 삼촌들의 표정과 손짓에 더 집중하며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있다.

하도리에서 이로이로라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관련된 여러 클래스들도 운영 중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제주의 콘텐츠들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있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한지 10년 차,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