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16) 빨간 민들레 – 민들레야 섬에 피지 마라

 

빨간 민들레 – 민들레야 섬에 피지 마라

수녀님 손가방처럼 너의 행보는 가벼웠다
영토를 섬기지 않는 풀꽃들의 쓸쓸한 자유
인연을 다 떨군 홀씨가 하늘이 낸 길을 간다

민들레야 섬에 피지 마라, 민들레야 섬에 피지 마라
입양 절차도 없이 혈육 한 점 날려 보낸 
미혼모 홰를 켠 눈빛이 하얀 밤을 설친다

폭풍에, 풍문에 떠돌다 어둠 속에 뿌리를 내려
밤이면 백만 송이 피워 밝힌 민들레 바다
빨갛게 아빠도 모르는 염색머리 소녀가 웃네.

/ 1999년 고정국 詩

사진=고정국
사진=고정국

#시작노트

꽃샘추위가 한창인 밤늦은 시각, 바닷가 산책하고 돌아와 거울을 보니 머리칼에 민들레 꽃씨하나가 앉아있었습니다. 이튿날 마당 한 편에 그 씨앗을 묻었습니다. 그 씨앗이 며칠 만에 떡잎을 피우고 톱니 잎을 열더니, 한참 만에 발그레 대궁을 세워 꽃을 피웠습니다. 

민들레와 나와의 인연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만약 내가 산책 나가지 않았더라면, 그 꽃씨는 바람에 날려 바다에 빠져 죽었을 것입니다. 그 후 민들레는 전국 어디를 가도 따라와 꽃을 피우고는, 적재적소의 영감과, 때로는 우울한 나의 얼굴에 미소를 머금게 해주고 있습니다.

시조(時調)가 곧바로 ‘시대의 노래’라고 한다면, 시조를 쓴다는 나로서는 시대상황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민들레가 나의 곁으로 다가와 갖가지 영감을 제공하고 있을 때, 노랗게 수평선 민들레 바다에 유난히 빨갛게 빛을 발하는 불빛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해외입양 소녀의 한 면모로 다가와, <빨간 민들레>라는 제목까지 제공해주었습니다.

강물은 굽이쳐 흐르지만, 바다는 어떤 장애물이 닥쳐도 정면으로 부딪히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바다 문법이 거칠면서 직설적이라면, 강(江)의 문법이 유순하고 은유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쩌다 형편이 허락해준다면, 무궁화, 새마을호 완행열차가 다니는 내륙 깊이 들어가서, 강처럼 유유히 흐르는 그 온유한 필법과 문장을 익히고 싶습니다. 

2023년 3월, 이곳 <시와 시작노트> 작품선정에 끙끙대고 있을 때, 외장하드 깊숙이 저장돼 있던 <빨간 민들레>가 살며시 다가와, “민들레야 섬에 피지 마라, 민들레야 섬에 피지 마라!” 나직한 은유법의 시 한 편을 노래해 주고 있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2),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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