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60) 남원읍 수망리 김창언 어르신 ②

내가 만난 테우리, 수망리 김창언 어르신(1946년생)께서 말씀해 주시길, 50여 년 전 당시 집집마다 테우리가 있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대규모로 목축해야 테우리를 고용했는데 적어도 소 열 마리, 말 30~40필 정도는 되어야 했다. 특히 제주의 동쪽 땅은 농사를 지으려 해도 바람에 흙이 잘 날렸고, 겨우내 흙이 올라와 뜬 땅을 봄에 파종 전 눌러줘야 농사가 된다고 설명해 주셨다. 소나 말을 데리고 와 그 땅을 밟아주는 사람이 테우리였고, 어르신은 그걸 “동네 와서 밭 볼린다”라고 표현하셨다. 육지 사람을 고용해서 테우리를 쓰는 집은 얼마 되지 않았고, 어르신처럼 보통 집안의 장남들이 대부분 테우리를 했다.

“집에 마소가 한 두 마리밖에 없는 사람들은 밭 볼리기가 여간 곤란해. 그래서 (마소) 많이 있는 사람들한테 부탁해서 테우리 빌려 밭을 볼려. 그럼 돈으로 그 삯을 줄 형편이 안 되니까 품앗이 형식으로 그 집 땅에 가서 김 매주든가 해.” 

제주학연구센터 소장, 저자명 강만보. 1985 말 테우리(말 돌보미)<br>
제주학연구센터 소장, 저자명 강만보. 1985 말 테우리(말 돌보미)

어르신 댁은 말을 30마리 정도 키웠단다. 그 당시 30마리면 남원에서도 상위권에 들어갈 정도로 많이 키우는 수준이었다고. 지금은 방엣불 놓는 것이 불법이지만 당시에는 겨울에 방엣불을 놓았는데, 진드기 박멸도 되고 그 잔해가 거름이 되기도 했다. 묵은 풀이 탄 후에 새로운 풀이 돋아나면 소도 묵은 풀보다 더 부드럽고 맛있는 목초를 좋아했다. 산에 다니는 사람들이 담배를 많이 피우면서 방엣불이 붙기도 했고 겨울철에 일부러 방엣불을 놓기도 했단다. 마을에서 불 끄러 나오라고 마을 방송을 하기도 한 때가 있었다. 지금은 법으로 방엣불을 놓는 것을 금지하는 시대라 더 이상 방엣불 놓기는 보기 어려워졌다고 하셨다. 

제주학연구센터 소장, 저자명 강만보. 1986년 방애잔불 끄기<br>
제주학연구센터 소장, 저자명 강만보. 1986년 방애잔불 끄기

수망리에 목축업이 한창 발달하던 때, 마을에 ‘목감’이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도 있었단다. 마을 차원에서 목장을 관리하는 사람인데, 따로 고용해 잣성도 보존하고 둘레도 관리하며 월급을 받는 사람이었다. 목감과 함께 수정사(소 임신을 관리하는 사람)도 있었단다. 지금에야 축협으로 전화하면 다 해 주는 일이지만 전화기도 없었던 그 시절, 목감이 마을 목장을 둘러보며 수정사에게 지시를 하면 수정사가 목장을 다니며 소들을 교배시켰다.

제주에는 도감만 있는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김창언 어르신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목감도, 그리고 1970년대 논농사했던 일부 지역에서는 저수지 물을 관리하는 수감이 있기도 했다. 지금 목감과 수감은 사라졌지만 그나마 도감은 아직도 명맥이 끊기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는 국영목장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그 경계선을 돌로 쌓는데 그걸 잣담(잣성)이라고 부르지. 고도에 따라 상잣담. 중잣담, 하잣담 이렇게 있는데 우리 마을은 잣담이 보존되어 있어. 소나 말들이 움직이면서 잣담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사람이 고사리 꺾으러 다니면서 무너뜨리기도 해. 그럼 허물어진 잣담 사이로 소들이 이리 가고 저리도 가고, 뭐 소만 가나. 말들도 그렇게 다니지. 그렇게 도망가면 어떡해야 하겠어? 주인이 찾으러 다녀야지. 저쪽 조천 사람들이 수망리까지 와서 찾아. 어떻게 오냐고? (웃음) 걸어서 오지. 어떻게 와. 그렇게 수망리까지 와서 찾다 밤이 되면 하룻밤 재워줘.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우리도 어느 마을을 가도 애들 찾으러 가면 모르는 사람이라도 다들 재워주니까 당연한 거였어. 말이나 소 잊어버리면 새벽조반 해 먹고 얘네가 갈 만한 곳을 걸으면서 그렇게 찾았어. 그 산길을. 그래도 엉덩이에 내긴(낙인) 찍어주니까 그 표시가 있어서 찾기가 좀 수월했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비료가 굉장히 귀했고 소거름은 매우 중요한 천연 비료였다. 소를 마련할 사정이 되지 않는 집에서는 반작소(半作소, 수익의 절반을 소의 소유주에게 바치며 먹이며 키우던 소)하며 소거름을 얻었다고 한다. 어르신은 반작소를 하고 2년 정도가 지나면 온전히 한 마리의 소를 소유할 수 있었다고 하셨다.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자면 다 옛날에는 말은 천 냥, 소는 백 냥이었다고 했다. 말은 진상 품목이라 소보다 훨씬 값이 많이 나갔었다고 하셨다.

김창언 어르신이 이어 말씀하셨다.

“집집마다 통시에 돼지 안 키우는 집이 없었어. 돼지 양돈장이 막 발달할 때가 아니라 잔치나 큰일이 나면 돼지를 잡아야 했기 때문에 인근 마을에서도 우리 수망리에 돼지 사러 많이 왔었어. 양돈장 없었을 때니까 통시에서 키우던 돼지들을 사러 왔어. 돼지도 사고 소도 사러 마을로 많이들 왔지. 잔치에 오는 손님의 규모에 따라 돼지를 몇 마리 잡을지 가늠해서 돼지를 사러 와. 수망리에서는 잔칫날 대부분 몸국 많이 했지. 큰 가마솥에 돼지 삶아서 몸국 해서 많이 했어. 그런데 그때 목살이랑 삼겹살이 제일 인기가 없었어.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은 껍질이 없는 부분이나 접짝뼈 이쪽을 비싸게 사 갔는데 지금은 완전 바뀌었지. 이 문화가 계속 바뀌더라고.”

어르신이 스물다섯 되던 해, 수망리를 벗어나 잠깐 일본에서 땡끼목(전기)공장도 다녔었다. 그 당시에는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는 제주 사람들이 무척 많아서 두렵다는 생각보다는 돈을 많이 벌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당시 일본은 가정집에 기계 몇 개 두고 생산하는 가내수공업 형식의 제조업이 많았었다고 전해주셨다. 오사카를 갔는데 제주 사람들이 워낙 많아 그렇게 두렵거나 외롭지는 않으셨다고. 

그렇게 젊은 시절 일본과 육지를 다니며 외지 생활을 하다 1983년도에 다시 제주로 들어와 혼인했다. 그때 어르신 나이 마흔한 살 이었다. 

수망리로 돌아와 일남 일녀를 낳고 표선에서 아내와 조그마한 스낵코너를 시작하셨단다. 다행히 아내가 만드는 분식은 인기가 많아 지역에서는 유명한 분식집으로 통했고 장사도 꽤 잘되었다. 아이들이 더 자라자 학교 진학을 고민하다 큰아들이 유치원에 들어갈 시기에 맞춰 제주시로 들어오셨다. 옛 영동병원 뒤쪽에 집을 얻고 장사를 이어갔다. 광양 쪽에서도 음식점 장사를 했고 일도지구, 동광초 근처에서도 했다. 일도지구 쪽에서 식당을 했을 때는 효창공업사 직원들 밥을 해 주면서 점심시간에는 한꺼번에 백 명씩 받을 정도로 점심 손님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때 번 돈으로 동광초 쪽에서 갈빗집을 차리기도 했고 신제주 문화칼라 사거리로 넘어와 ‘정의고을 향토음식점’이라는 간판을 걸고 메밀 음식도 팔았다. 

김창언 어르신의 고향에서 먹었던 메밀의 맛의 기억을 따라 신제주에서는 메밀칼국수와 빙떡을 팔았다고 한다. 금융기관도 몰려있고 직장인들이 많은 동네라 회사원들이 꽤 많이 시켜드셨단다. 신제주 문화칼라 사거리에서 했을 때만 빼고 여러 곳에서 했던 식당의 이름은 모두 같았다. 큰아들의 이름을 딴 ‘동진식당’이었다.

이렇게 잦은 이동을 하며 장사를 한 턱에 주민등록등본을 떼어 보면 주소 이전했던 기록들이 빼곡하게 남겨져 있는데, 어르신은 이런 주소이전 기록을 보면 기분이 좋다고 했다. 그래도 제주시로 나와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던 식당을 하며 열심히 살았다는 흔적의 기록이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았다. 사실 아내가 제주 사람이 아니라 제주 음식을 먹으며 커 온 어르신과는 다르게 시집와서야 제주 음식을 경험했다고. 처음 남편을 따라 제주로 왔을 때 수망리는 하루에 두세 번 버스가 다닐 때였고 집에는 아궁이에 불 때서 밥을 하던 때였다. 곤로도 아닌 처음 보는 광경에 나 이런 곳 와서 못 산다고 놀라던 아내를 잘 타이르고 서로 배려하며 잘살아 보자고 다독이셨다.

“같은 제주도라도 살아온 방식이나 음식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서 지역마다 그 뿌리는 제각각 있는 것이지요. 그 살던 뿌리에서 벗어나 다른 나라나 육지에서도 살아보며 느끼는 다르다는 경험은 상대방을 이해해 주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 같아요. 그리고 나중에 나이가 들수록 지혜가 생기게 해 줘. 아. 이런 일은 나중에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아내께서는 식당을 맡아 하셨고 김창언 어르신은 수망리를 왔다 갔다 하며 과수원과 축산, 양봉까지 하며 식당까지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에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중년을 사셨다고 한다. 그렇게 어르신 내외는 식당을 30여 년 가까이하셨는데 아들이 태어나고부터 시작해서 그 아들이 성인이 되어 취직하고 나서까지 이어졌다.

예부터 제주도는 말로 유명했는데 말을 돌보던 직업을 테우리라고 합니다. 테우리 시절 이야기를 해주시는 삼촌의 얼굴에서 단단하고 빛나는 미소가 엿보여 제주의 말과 함께 그려보았습니다.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예부터 제주도는 말로 유명했는데 말을 돌보던 직업을 테우리라고 합니다. 테우리 시절 이야기를 해주시는 삼촌의 얼굴에서 단단하고 빛나는 미소가 엿보여 제주의 말과 함께 그려보았습니다.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어르신에게 동진식당은 어떤 의미일까? 늦은 나이에 얻어 더욱 소중한 아이의 이름을 따 지은 식당. 김창언 어르신 부부의 중년 이후 모든 역사는 동진식당 자체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식당을 정리하고 부부 내외가 수망리로 들어온 것이 10여 년 정도 되었다고 하셨다. 

어르신은 아들에게 어르신이 살아온 방식대로 살기를 강요하지 않으신단다. 농사도 마찬가지다. 어르신의 옛 방식을 알려주기보다는 지금 시대에 맞는 농사법을 배워서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옛날에 했던 것을 그대로 하면 안 된다고 하셨단다. 목축도 이제는 정책상 허가받아야 하는 부분이 많아졌고 까다로운 규제도 생겨났다. 축사도 허가받고 지어야 하고 분뇨나 오수도 관리해야 해서 더 이상 옛 방식을 고수하면 안 된다. 나이가 들어가며 이제 과수원도 안 하고 목축도 하지 못해 삶이 적적해졌다. 그냥 취미로 소나 말 한두 마리 키우시며 운동 겸 산에 마소를 끌고 갈 수 있었음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노년으로 들어서며 일이 줄어드니 적적한 마음을 나누며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일이 생각나시는 것 같았다. 지금은 정책상 금지되어 어쩔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어르신의 아쉬움은 나에게도 전해졌다. 어린 청년 시절 수망리의 테우리였던 어르신. 50여년이 흐른 지금 어르신에게 말과 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나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1970년대를 기점으로 조 보리, 고구마 등의 밭작물들은 과수원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지금 수망리는 대부분 과수원을 하고 어르신 댁처럼 양봉하는 곳도 있다. 그런데 양봉은 최근 잘 안 된다고 하셨다. 기후 변화의 영향 때문인지 몰라도 양봉도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벌이 많고 양봉이 잘 되면 기본적으로 환경이 좋다고 안심했다. 모든 열매도 벌을 통해서 맺을 수 있는데 최근 들어 벌이 점점 없어진다는 것은 환경이 나빠진다는 의미나 마찬가지니 여간 걱정이 아니라고 했다. 옛날에는 자급자족했던 표고도 농사도 잘되고 향기도 무척 좋았었다고. 그런데 어느샌가 표고 농사도 잘되지 않기 시작했는데 양봉과 같은 이유인 것 같다고 하셨다.

이렇게 팔십 년 가까이 수망리의 역사를 몸으로 새겨오신 김창언 어르신은 마을지 편찬할 때도 많은 공을 이바지하셨다 들었다. 마을의 역사나 이야기해 주시는 마을의 어르신으로, 물영아리가 람사르습지에 지정될 때 기자 간담회에도 참여했고 한 매체의 방송촬영에서는 수망리 도슨트로 소개되었단다. 제주연구원에서도 어르신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러 오시기도 했다고. 

/ 사진=김진경
어르신도 참여하신 수망리 마을지, 이 귀한 마을지를 선물로 받았다. / 사진=김진경

“옛날에는 그래도 수망리가 바람막이도 잘 되고 물도 좋아 축산 하기는 진짜 좋다고 소문났었지. 고사리도 그렇고. 지금은 물영아리도 유명하기는 하지만 수망리도 그런 거 있잖아. 수망리를 대표하는 음식 하나 있으면 좋겠어. 우리가 여행 가면 눈으로 즐기는 건 금방 잊히지만 음식은 오래 기억이 남아요. 우리 마을에서 나는 고사리 잘 연구해서 마을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소개되었으면 해. 우린 메밀도 많이 했었고 먹었으니까. 그 마을의 음식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마을의 사람들도 사라진다는 것이니까.” 

수망리에서 만난 어르신이 나에게 던져 준 묵직하고 굵직한 이야기들은 우리가 현재 함께 살아가고 있는 다음 세대에게 전달해 줘야 하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수망리 사람 박물관이자 내가 만난 테우리 김창언 어르신. 제주 사람으로서 우리가 지켜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어르신 삶 속에서 알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김윤영(이로이로)

육지것에게 들리는 제주의 진한 사투리는 화가 나신 것도 같고 꽤나 투박하기도 하여 인터뷰 때마다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갔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매번의 인터뷰가 제주어 듣기 평가이기에 삼촌들의 표정과 손짓에 더 집중하며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있다.

하도리에서 이로이로라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관련된 여러 클래스들도 운영 중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제주의 콘텐츠들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있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한지 10년 차,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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