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17) 민들레 필법으로 –십 원 줍다  

 

민들레 필법으로 –십 원 줍다  

카드 연체 막으려고 
은행으로 가는 도중

보도블록 뒤쪽에서 
반말 투로 부르는 소리

폭 늙은 민들레 송이가 
십 원 보태 쓰란다

/ 2012년 고정국 詩

/ 사진=한국은행
/ 사진=한국은행

#시작노트

카드 연체 막으려고 은행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농협을 30미터 쯤 못 미쳐 있을 때, 
십 원짜리 동전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돈 십 원…, 줍고 가봐야 쓸모가 거의 없고, 
그냥 두고 가려니 그 동전에게 미안하고 해서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하필 그때  폭삭 늙은 할머니 형상의 민들레송이가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민들레 할머니는 내가 카드 연채 막으려고 
농협은행으로 가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이미 검정색으로 변해버린 십 원 동전을 주워 “호-호” 분 다음, 
혹시 남들이 보고 있지 않나 주변을 살핀 후 재빨리 바지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민들레 할머니한테 인사도 하지 않고 바삐 농협 은행으로 들어섰습니다. 

우리 동네 농협 그 눈빛 고운 여직원이 카드조회를 해보더니, 
공교롭게도 그날 은행에 지불해야 할 이자는, 일 천 십 원이었습니다. 
1,010원! 할머니 옆에 있던 십 원짜리 동전 한 개가, 
제대로 그 가치를 발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바지 주머니에서 꺼낸 그 동전에는 어느새 나의 체온이 묻어서 따뜻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백발성성 그 민들레 할머니를 보고 고맙다고 인사했습니다. 
그러자, “게난 어떵, 농업에 빚은 다 물어져시냐?” 어?, 
어디서 많이 듣던 내 고향사투리의 어투! 거기에다, 
농협을 ‘농업’으로 발음하시던 어머니가 아니신가!?

아주 오래 전 여름날 오후, 
더위에 지친 상태에서 습관처럼 바다를 찾았습니다. 
해안도로가 끝나는 이호해수욕장 근처에 차를 세우고, 
방파제 계단으로 내려가 구두와 양말을 벗었습니다. 
그리고는 발밑에 조용히 다가온 바닷물에 발을 담갔습니다. 
그때 바닷물 속으로 다가와 나의 발을 어루만져주는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지금 내 발을 어루만지는 만조滿潮의 손! 해녀이셨던 어머니가 
물속으로 다가와 이 아들의 발가락을 하나하나 헤아리고 계십니다. 
아, 이 감촉은 어릴 때 나의 발을 씻겨주시던 어머니 손길임엔 틀림없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오늘 민들레 송이로 다가와 
그토록 가난에 불효했던 아들의 가슴을 쓸어주고 가셨습니다. 

<천자문 시조마라톤> 343번째 ‘어미 母(모)’에 민들레 필법으로 쓴 이 단시조 
<십 원 줍다>와 시작노트를 읽어보였더니, 
한참 말이 없이, 방 천정만을 바라보던 아내의 눈가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2),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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