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18) 벽의 살갗

 

벽의 살갗

이순 넘긴 이 나이에 주자십회朱子十悔를 읽습니다
불효부모사후회를 감히 입에 담습니다
서늘한 아버님 살갗…, 다시 벽을 씁니다

부모의 내리사랑이 틀림없으시다면
자식의 오를 사랑도 틀림없을 겁니다
효도의 때와 장소가 어긋났을 뿐입니다

부모님 떠나시고 자식들은 다 웁니다
효자 불효자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 사랑의 전달이 어긋났을 뿐입니다

길이 막힐 때면 벽을 향해 눕습니다
상처 입은 손바닥으로 자꾸 벽을 씁니다
어머니 아버지 부르며 그 살갗을 만집니다.

/ 2013년 어버이날 고정국 詩

상처 입은 손바닥으로 자꾸 벽을 씁니다 ⓒ제주의소리
상처 입은 손바닥으로 자꾸 벽을 씁니다 ⓒ제주의소리

#시작노트

저의 졸저 체험적 글쓰기 강론講論 《조사에게 길을 묻다》 내용 중에
 <삼척을 멀리하라> 라는 목차 제목이 있습니다. 
아픈 척, 별난 척, 아는 척의 ‘척’의 삼총사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 다짐이 오늘 여기 이 <시작 노트>에서 무너지고 말았네요.

입원한지 사흘 째 되는 자정 넘긴 시각, 이 중환자 병실에 
노크 소리도 없이 슬며시 들어서는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침대 가까이 다가와 조심스레 살피는가 싶더니 갑자기 불을 켜며,
“간호원 비상!”을 외쳤습니다. 침대 옆에 어머니가 깨어나시고, 
간호사도 눈 비비며 병실로 달려왔습니다. 곧바로 한 뼘 정도의 심지 두 개를,
끝없이 피 쏟아지는 양쪽 코에다 집어넣으며, 
“아무리 힘들어도 이 심지를 뽑으면 절대 안 돼!”라고 소리 지르는 
원장의 어조에는 절박함과 단호함이 서려 있었습니다. 

며칠 후 원장은, 성인 체중 40kg의 이 환자를 
퇴원시킬 수밖에 없음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숨이 멈출 수도 있다는, 
사실상의 사망선고를 내가 직접 들었습니다. 
제주도에 한 대뿐이던 독일제 엠블란스에 실려 노을 지는 
516도로를 지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내가 치러야 했던 6가지의 합병증 병명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마취 없이 뼈 깎는 수술까지 받으면서, 
일 년 가까이 이승과 저승을 들락거렸습니다. 
왼쪽 다리에 깁스한 상태로 고통스러워 할 때, 
서울 병원까지 올라오신 아버지는, 
뼈만 남은 아들의 발등과 발목을 주물러 주셨고, 
그때마다 나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1년 후, 목발 짚고 고향집 마당에 들어서려는데, 
올레 밖까지 맨발로 달려 와서 이 아들의 목을 껴안고 
“아이고 내 새끼, 아이고 내 새끼 살아왔구나!”하며 어머니는 오래 우셨습니다. 

그로부터 사십년이 지난 2013년 어버이날, 
이미 하늘나라로 떠나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이 작품을 썼습니다. 그때, 아들 발등을 주물러주셨던 아버지의 손길과,
 지금 벽체의 촉감이 너무 닮았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2),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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