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19) 들찔레 피는 뜻은

 

들찔레 피는 뜻은

마음이 가난한 꽃은 들녘으로 핀다더라
삼삼이 아려오는 보릿고개 그 둔덕 쯤
식솔들 시장한 눈빛만 타래타래 고여 있네

오월 그 들꽃 속엔 숨어 우는 여인이 있다
무겁던 하늘 한 끝 총성 있던 그날부터
무덤가 빛깔도 서러운 들찔레가 피더란다

뻐꾹새 울쯤이면 산도 물빛 글썽이고
이 나라 오뉴월엔 지는 꽃도 많더란다
피 묻은 시어만 남긴 채, 모로 묻힌 이름의 꽃

꽃인 듯 눈물인 듯 인가 멀리 떠나와서
오늘은 뉘 탄식이 산과 들을 적시는가
구름도 계곡에 들러 마음 반쯤은 두고 간다

지금쯤 어느 미망인 눈물 한참을 달래고
민통선 너머 땅 끝 연변에도 가 피었을 꽃
너와 나 노숙의 산하엔 흰 꽃 진창 피느니.

/ 1989년 고정국 詩

/ 사진=고정국
/ 사진=고정국

#시작노트

지평선도 아른아른 긴장을 푸는 오월에 들어서면, 
이 땅 들꽃들의 빛깔도 서서히 흰색 소복素服으로 갈아입습니다. 
이와 때를 같이 해서 간간이 뻐꾸기소리가 들려옵니다. 
“뻐꾹, 뻐꾹” 울음 섞인 그 소리에는 한반도 이곳저곳에 묻혀 있는
 갖가지 사연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늘은 1995년에 필자가 썼던 관찰일기 중에, 
5월 18일의 기록 일부를 여기에 옮기면서 <시작노트>에 대신하겠습니다.

“이때쯤이면 이 땅엔 수많은 꽃들이 피고 진다. 
그러나 그 꽃들은 모두가 열매나 씨앗에 이르지는 못한다, 
어쩌면, 이 땅 여기저기 형형색색 피어나는 꽃들 역시, 
일종의 낭비이며 혼돈스러움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 모르겠다.

집안에 둔 화분에서 허리 꺾인 채로 나의 관찰대상이 되고 있는 
별꽃 한 포기가 안간힘 쓰며 일어서고 있다. 
저 가녀린 떡잎과 본잎은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문 쪽을 향해 
혼신을 다해 가슴을 내밀고 있다. 
사경死境에서 벗어나자마자 빛을 향해 잎사귀를 펴는 
저 보잘것없는 잡초의 위대한 정신력!

진리는 윤리와 규범을 초월하는 곳에 존재한다. 
격식과 논리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은 
진리와 본능을 아주 먼 거리에 두고 생각하려든다. 
자유와 윤리가 도덕에 가깝다면, 진리는 오히려 본능에 가깝다. 

우리 마을 귤꽃만개기에 해당하는 5월 중순, 
주변 모든 귤나무들이 쏟아내는 귤꽃 향기가 매혹적이다. 
나는 허파가 터지도록 그 향기를 들이마셨다. 
귤나무 사이를 혼자 누비고 다녔던 
강아지 ‘삐삐’가 헐레벌떡 달려와 내 품에 안기려든다. 
녀석의 뒷덜미에는 아직 피어나지 못한 귤꽃 봉오리 하나가 슬프게 매달려 있다. 

오늘은 5·18…! 한국인이여, 한국인이 잠든 무덤 앞에 헌화하지 말라,  
그 가식의 꽃다발보다 천 갑절 만 갑절 더 아파했던 
이 땅 야생화들이 미리 와 피어 있나니!”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2),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