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20) 감잎 두 장 받아들고

 

감잎 두 장 받아들고

감잎 두 장 받아들고 책상 앞에 앉은 아침
내 가만 눈을 낮춰, 더 아래로 눈을 낮춰
일정한 눈금을 폈던 실핏줄을 보았네

열두 폭 샛강을 거느려 세로줄로 이어놓은 
그 등뼈 사이사이 가로줄로 이어 놓은 
또 하나 백두대간의 갈비뼈를 보았네

맨 먼저 피었던 잎이 맨 먼저 떨어지고
두 번째 솟았던 잎이 두 번째로 떨어지는 
참 착한 아기 손들이 손에 손을 포개며…

나무는 백년을 살아도 나뭇잎은 반년인 것
나무는 일 년 동안 일 년짜리 생이었지만
반년에 백년을 말하는 나뭇잎의 저 깊이

물끄러미 나를 보는 책상 위의 나뭇잎 두 장
나는 다시 몸을 낮춰 그 곁으로 다가가서 
하늘이 슬며시 내리신 시 한 점을 받았네.

/ 2012년 고정국 관찰일기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시작노트

아기감나무의 하루하루를 살피면서 관찰일기를 쓰는 시인의 모습은, 
육아일기를 쓰는 어머니의 자태를 연상케 한다. 
아기를 돌보면서 어머니는 그 칭얼거림과 미소를 필사한다. 
실핏줄, 착한 아기 손, 반년…, 이어지는 어휘들이 아기의 이미지를 구체화한다. 
관심과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아기의 모습으로 
어린 감나무는 시인의 눈길을 받는다. 
그리고 떨어져 내린 나뭇잎은 여전히 “물끄러미” 시인을 바라본다. 
못다 이른 사연을 속엣 말을 뇌듯 가만히 들려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시인이 “다시 몸을 낮춰” 다가가는 것이 또한 자연스러워진다. 
마침내 낙엽의 사연은 시인의 가슴에 닿아 새로이 한 편 시를 이룬다. 
마지막 수의 종장을 보라! 
한 편의 잘 꾸며진 피아노 협주곡처럼 들릴 그 노래를 들어보자. 
임이라 부르며 사랑의 눈길로 들여다본다면, 
꽃은 활짝 웃으며 마음을 열 것이다. 
그 개화에 하늘조차 환하게 밝아올 것이다. 
낙엽은 꽃보다 더 풍부한 주제를 담은 채 스스로 한 편의 시가 된다. 
조용히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내린 그 나뭇잎이 
“하늘이 슬며시 내리신 시”가 되는 것이다. 
‘슬며시’라는 시어야말로 
고정국 시인이 족집게로 집어내듯 골라낸 부사라고 볼 수 있다. 
낙엽이 지는 장면이 ‘슬며시’ 하늘이 시를 내린다고 바꾸어놓음으로써, 
낙엽 지는 풍경의 재현을 완벽하게 만든다. 
다시 의인화 기법이 동원되면서 그 효과를 드높인다.
(후략)

평소 감을 좋아하는 아내가 대봉감을 먹다가, 
그 씨앗 하나를 화분에 묻어두었습니다. 
그 후 3년째 되는 해, 단풍들어 떨어지는 모습을 시조로 담아냈던
<감잎 두 장 받아들고> 라는 이 작품이, 어느 시조 전문지
‘고정국 특집’에 발표했던 10편의 작품에 섞여 있었습니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미국 오리건주 주립대에서 비교문학전공을 한 박진임 현 평택대 교수가, 
아주 상세한 해설을 써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이 해설의 한 부분을 따서 <시작노트>로 대신하였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2),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