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21) 떡잎들이 곱구나

 

 

떡잎들이 곱구나

초록이 만나고 싶은 것, 그게 빛이었구나
여리디 여린 목을 창 쪽으로 기우린 것들
간절히 빛으로 향하는 떡잎들이 곱구나

고파야 밥을 찾고 목말라야 물을 찾는,
어둑한 내 방에서 초록초록 눈을 뜨고
추워도 끄덕도 않는 떡잎들이 곱구나

까만 토분 속으로 잔뿌리를 내리는 마음
뿌리 내린 만큼 끌어올리는 줄기의 마음
이 아침 내 옆에 있는 떡잎들이 곱구나

손이 가는 쪽을 유심히 살펴보라
눈이 가는 쪽을 유심히 살펴보라
진실을 대신 말하는 떡잎들이 곱구나 

작은 것일수록 진실에 기대어 산다
연한 것일수록 사랑에 기대어 산다
세상의 모든 줄기가 빛을 향해 뻗듯이.

/ 2013년 고정국 관찰일기

/ 사진=고정국
/ 사진=고정국

#시작노트

관찰일기를 쓰다보면, 차츰차츰 그 관찰자의 관점이 옮겨지게 됩니다. 
크고 강한 것에서 작고 약한 것으로, 평면적 사고에서 입체적 사로로, 
아픔과 슬픔에서 기쁨과 아름다움으로 삶의 그림판이 바뀌게 됩니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바라보는 세상은 또 다릅니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렌즈 속의 피사체가 고스란히 모니터화면에 옮겨지면서,
사람의 시력과 어휘력을 자극하게 됩니다. 
한참 오래 전 수목원을 산책하다가 그늘에 앉아 쉬고 있을 때, 
땅바닥을 기어가는 자벌레 한 마리를 접사렌즈를 통해 봤습니다.

“길이 1센티 정도의 자벌레가 접사렌즈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녀석의 몸통에는 여덟 마디의 주름이 잡혀있었습니다. 
그 연초록 살갗에는 띄엄띄엄 흰색 솜털이 휘어져있고, 
녀석도 허파가 있는지 몸 내부의 일정 간격으로 움직이는 기관들이
반투명 살갗을 통해 보였습니다. 
몸통 앞쪽에 세 쌍, 뒤쪽에 네 쌍의 다리는 짧고 야무지게 보였습니다. 
그 다리를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이 한여름 세상 너비를 몸통의 자로 재며 
나아가고 있는 자벌레의 길!
한참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더니, 지푸라기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 위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뒤꽁무니 네 쌍의 다리를 지푸라기 끝에 밀착시켜 꽉 조이더니, 
몸 전체를 수직으로 세우고, 왼편 맞은 편 오른편의 순서로 주변을 
신중하게 탐색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뭔가 결심한 듯, 열한시 방향으로 머리를 돌려 
전신을 열심히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후략)

벽돌 하나, 서까래 하나, 기둥 하나하나가 치밀하게 연결돼 있으면서 
거대한 궁전을 이루듯, 이처럼 한 마리의 자벌레가, 
그 곁에 찍혀 있는 미세한 티끌 하나하나가, 
지구상의 완벽한 구조를 위하여 사명을 다하고 있는 것도 사진 찍기, 
글쓰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2),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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