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뉴스] 이주민-선주민 넘어 제주생활 유쾌한 나침반 되다

제주도에서만 보는 이 시험의 정체는?

주말 오전 제주시 한 건물에 수험생들이 들어서고, 목에 수험번호가 적힌 명찰이 걸린다. 시험이 시작되니 40명의 펜 움직이는 소리 외에는 고요했다. 시험지를 들여다보니 문제가 특이하다.  

다음 중 한라산에 대한 설명 중 가장 사실과 거리가 먼 것은?
① 한라산은 높이 1947m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② 한라산에 일회용 도시락은 반입이 금지돼있다.
③ 백록담에서는 하얀 노루(백록)를 자주 볼 수 있다.
④ 한라산은 17도와 21도가 있다.

제주의 쓰레기 배출 시스템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음식물은 티머니 교통카드를 이용해 음식물 쓰레기 종량기에 배출한다.
② 종이쓰레기는 바람이 잘 부는 날 태운다.
③ 플라스틱류는 일주일에 4번 클린하우스에 배출한다.
④ 재활용 가능자원의 배출 시간은 오후 3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다.

이 시험은 ‘제주살이 능력고사’. 제주의 예비사회적기업 랄라고고가 제주를 더 재미있게 알아가기 위한 취지로 시작한 프로젝트다.

제주살이 능력고사 필기시험은 실제 자격증 시험처럼 진행된다. 위트와 재치가 섞여있는 문제를 대하는 응시자들의 태도는 진지하다. ⓒ제주의소리
제주살이 능력고사 필기시험은 실제 자격증 시험처럼 진행된다. 위트와 재치가 섞여있는 문제를 대하는 응시자들의 태도는 진지하다. ⓒ제주의소리

제주살이 능력고사는 아티스트에 대한 지식을 테스트하는 아이돌 팬클럽 문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조인래 랄라고고 대표는 “다른 지역과 달리 ‘제주앓이’, ‘제주살이’라는 단어가 있듯이 지역에 대해 마니아가 형성돼 있는 곳도 흔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작년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제주에 대한 상식을 문제집 형식으로 담아낸 ‘제주살이 능력고사 예상 문제집’이 발간됐다. △사회·생활·문화 △자연·환경·활동 △언어 △산업·경제 △역사·신화·지리 등 5개 영역에 총 150개의 문제와 해설을 실었다. 여행자였다가 생활자가 된 이주민들의 경험이 제주 이웃들의 도움과 감수를 만나면서 현실화됐다.

발간사에는 ‘아직은 제주가 낯설고 어려운 누군가가 잘 먹고 잘사는 데에 도움이나 희망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담았다’고 밝히고 있다.

이번 오프라인 시험은 이 예상문제집의 필기고사 버전이다. 70점 이상에게는 모바일 인증서가 발급된다. 이 인증서가 있으면 네트워크를 맺은 마을기업,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향토기업 등에 할인혜택을 받을 수 있다.

시험 뒤에는 제주살이에 대한 궁금증과 고민을 나누는 ‘제주살이 상담소’가 진행됐다. 입도 1개월이 된 20대 초반부터 제주에서 나고 자란 60대까지 자리를 채웠다. 제주살이를 택한 각자의 이유와 지금 겪는 고민들을 나눴다. 높은 가스비, 배달-배송 문제, 일자리와 임금 등의 이야기들이 나왔다. 

제주살이 능력고사 필기시험이 종료된 후 채점시간. 정답이 공개될 때마다 환호와 탄식이 엇갈렸다. ⓒ제주의소리
제주살이 능력고사 필기시험이 종료된 후 채점시간. 정답이 공개될 때마다 환호와 탄식이 엇갈렸다. ⓒ제주의소리

“텃세를 걱정했지만 주변에 좋은 분들이 많아서 감사하다”, “일상에서도 여행자 기분을 낼 수 있다”는 제주살이의 장점을 나누기도 했다. “이런 얘기를 맘껏 할 수 있다니 의미가 있다. 다른 이주민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어떤 분들이 참석하는지 궁금해서 왔다. 토박이로서 제주 정착에 대해 도움을 드리고 싶다”, “내 문제에 공감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반응도 나왔다. 

이 프로젝트에는 제주 초기 이주자들에게는 새로운 일상의 공간과 문화를 재밌게 이해하도록 돕고, 여행자들에게는 제주에 머무는 동안 제주를 ‘우리 동네, 내 동네’라고 생각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담겼다. 

“저도 이주민이지만 이주하신 분들이 대부분 3년이 고비라고 하시잖아요, 그 고비에서 제주도가 좀 답답하고 심심하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사실 의아했거든요. 제주도에 아직 즐길 게 많고 가볼 곳, 아름다운 곳이 많다는 점을 알려 드리고 싶었어요. 또 제주에 오셨다가 문화적 차이 때문에 적응하지 못하고 가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그래서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제주를 알아가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제주살이 능력고사를 기획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주를 더 잘 이해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려 잘 지낼 수 있을까’는 제주로 터전을 옮긴 이들에게는 중요한 문제다. 이 고민은 이제 유쾌한 방식으로 해법을 찾고 있다. 조만간 마을에서 살아가며 그 마을을 이해하고 미션을 수행하는 실기시험도 도입될 예정이다.

이 같은 움직임은 선주민들에게도 긍정적인 자극이 됐다. 구좌읍에 사는 오연숙(60)씨는 “제주에 오셨던 분들이 정서적, 문화적으로 맞지 않아서 돌아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마음이 아팠었다”며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충분히 잘 어울려서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인다”고 말했다.

제주살이 능력고사 필기시험과 제주살이 상담소에는 20대부터 60대, 제주살이 1개월차부터 제주토박이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참가했다. ⓒ제주의소리
제주살이 능력고사 필기시험과 제주살이 상담소에는 20대부터 60대, 제주살이 1개월차부터 제주토박이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참가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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