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61) 서귀포시 대정읍 김임자 어르신 ①

대정읍 모슬포시계탑 거리에 조그만 식당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평범해 보이는 작은 식당처럼 보이지만 외관에 유난히 내 눈길이 계속 갔다. 그 이유는 ‘Since 1954’ 때문이었다. 올해로 70년을 맞이한 이 조그마한 식당에 내가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2019년 9월 즈음이었던 것 같다.

무더운 여름의 끝이 무섭게 기승을 부리고 있을 때, 고기국수를 시키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동네 아저씨들이 식당에 우르르 들어오자마자 외쳤다.

“어머니, 냉우동 줍써.”

어라? 방금 본 메뉴판에 냉우동이라는 메뉴는 보이지 않았는데 동네 삼춘들은 익숙하듯 냉우동을 외쳤고, 곧 들어온 다음 손님도 자리에 앉자마자 냉우동을 시키는 것이 아닌가? 오래된 단골들에게만 주는 메뉴판에는 없는 특별한 메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즈음, 나와 같이 식당을 찾은 마을 분께서 나에게 살짝 귀띔해 주었다. 

“여기 사람들은 밀면을 냉우동이라고 해.”

그제야 메뉴판 제일 앞에 자리 잡은 ‘밀면’이라는 메뉴명이 눈에 보였고, 밀면을 밀면이라 부르지 않고 냉우동이라고 부르며 들어오는 손님들을 마치 가족 맞이하듯 반기는 이 식당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 사진=김진경
올해 70년을 맞이한 어르신의 식당. / 사진=김진경
/ 사진=김진경
냉우동이라는 메뉴는 없지만 마을삼춘들은 대부분 냉우동을 시키셨다. / 사진=김진경

제주에서는 육지부처럼 100년 가까이 영업을 이어가고 있는 오래된 식당이 거의 없다. 그래서 개업 후 50여 년만 되어도 제주에서는 매우 오래된 가게인 축에 든다. 하물며 30여 년 이상 된 가게도 쉽사리 만나기가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이 대정읍의 올해 70여 년째 성업 중인 이 식당은 오랜 세월의 마을 이야기를 켜켜이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 날짜를 잡고 어르신을 찾아뵈었던 날, 가게는 휴무일이었지만 어르신 주방의 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고 그 불 위에서는 육수를 우리는 탕기가 올려 있었다. 

“우리는 소 사골 종일 우려, 그 위에 거품 걷고 걷고 또 걷고 허여그네 계속 우려. 그럼 그게 꼭 간장같이 되거든. 달걀 하나 띄워보면 딱 500원짜리 크기만큼 올라오민 된 거라. 육수 염도를 그렇게 맞추고 그보다 적게 올라오민 싱겁고 등긋 올라오민 짠거. 일 년 내내 떨어져 가면 불 앞에 서서 계속 우리고 또 우려. 게난 저추룩 딸려야 변하지 않아. 이렇게 육수 잡는 것만 해도 10년 정도 걸려서. 그 육수를 항아리에 담고 보관하잖아. 어떻게 돼도 절대 상하지 않아. 우리 집 비법은 이거라.”

이 식당을 운영해 오신 어르신은 올해로 82살이 되셨다. 나는 이 식당에서 경상도식 소고기뭇국을 닮은 소고기 찌개를 가장 좋아하는지라 이 식당에 발을 들여놓았던 초반, 어르신이 어쩌면 경상도분이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웬걸, 이 식당의 주인 김임자 어르신의 고향은 한경면 조수리였다. 육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난 어르신은 유년기 4.3의 풍파를 겪고 한림으로 장가 간 오빠들을 따라 한림읍으로 갔단다. 오빠들은 농사보다는 주로 공장을 운영하거나 장사하셨는데 기차표고무신 대리점도 하셨고 모멘공장도 운영하셨다. 어르신은 남편과 함께 한림으로 가서 오빠들의 일을 돕기도 했다. 당시 제주에는 어르신 가족이 하는 모멘공장이 하나밖에 없었다고 했다. 공장에서는 주로 면장갑, 모기장, 타월 등을 만들고 스웨터를 짜기도 했다. 남편과 함께 오빠의 사업을 돕다 시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이 있는 대정읍으로 오셨다고 한다. 그때 어르신이 나이가 서른 즈음 되었을 때라고. 

“우리 어렸을 때 시절은 먹을 것이 해결 못되었을 때였지. 다행히 우리 집은 고산에 논이 좀 있어서 먹는 것은 꼭 구애받지 않아서. 부모님이 공부는 못 시켜줘도 굶주리지는 않게 해 주신 건 지금 생각해도 막 고마워, 그때가 얼마나 먹을 게 없던 시절이었냐면 밀채와 감자똥(감자쭈시)도 먹던 시절이야. 그것도 막 고마웠던 시절이지. 지금 너네는 몰라.”

먹을 것이 풍족한 지금, 김임자 어르신의 말씀대로 우리는 진짜 모른다. 먹거리뿐 아니라 모든 것이 풍족하고 넘쳐나는 우리 생활 속 혜택과 안전한 삶의 소중함과 감사함은 김임자 어르신들의 유년 시절에는 없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과연 몇 명이나 알고나 있을까? 

“그런데 어르신, 왜 대정은 냉우동이 유명한 거에요?”

대정읍내를 다니다 보면 유독 밀면집이 많이 보인다. 제주에서 우리가 아는 유명한 밀면집의 본점들도 이 마을에 있다. 마을 분들께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로는 처음 밀면을 팔 때는 마을 사람들이 밀면이 아닌 냉우동이라는 이름으로 먹었다고, 그래서 읍내 사람들은 밀면을 자연스럽게 냉우동이라고 한다고 했다. 이곳 현지인 삼춘께서는 옛 피난 시절 이북에서 온 분이 아마 처음 냉우동 장사를 하셨을 거라고 알려주셨다. 부산의 밀면이 제주로 온 것이 아닌 6.25 이후 피난민들과 미국부대가 대정으로 들어오며 이 지역만의 독자적인 밀면 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유독 이 마을에 맛있는 밀면집이 많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김임자 어르신의 식당은 제주의 밀면 문화의 초석을 다진 곳이기도 했다.

“우리랑 우리 옆에 밀면으로 유명한 식당이랑 거의 비슷한 시기에 냉우동을 같이 시작해놔서. 그런데 우리는 시어머니네가 전부터 갈빗집을 해났으니까 갈비랑 냉우동이랑 같이 하다 지금은 다른 메뉴랑 같이 파는 거고, 옆이 식당은 지금은 오직 우동 하나만 해. 이 지역 사람들이 냉우동을 좋아하니까 냉우동 파는 집이 많지. 밀면이라고도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냉우동이랜 많이 해. 우리 가게 식탁 있지이. 저기 동그랗게 파진 것이 옛날엔 화로였다가 숯으로 바뀐 자리야. 우리 하르방이 저기 서광리에서 100년도 더 된 폭낭을 사그네 목수 빌어서 직접 만든 거라. 저 테이블 만들고 얼마 안 있어 돌아가 버리셨지만. 마흔일곱에 가셨어. 저런 식탁 지금은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가 없지. 갈비 팔았을 때부터 쓴 거니까 어떤 건 나무가 타기도 해서. 저 구멍 어서 시민 더 고울 거. 지금은 불 안하난 그냥 저렇게 쟁반으로 덮어 놓은 거라.”

어르신은 세월의 흔적이 있는 탁자가 조금 아쉽다고 하는 어투로 말씀하셨지만 내 눈에는 그래서 더 저 테이블이 값지게 느껴졌다. 대를 이어서 시어머니가 하던 식당을 받았고 본격적으로 인수하여 어르신께서 수십 년 동안 운영하며 연구하신 음식들이 저 식탁 위에 올려졌다. 

맛은 다듬어지고 농후한 세월의 맛이 응축되었을 것이다. 일찍 세상을 떠난 남편의 흔적이 있는 저 테이블이 그 음식들을 내어주는 훌륭한 손님맞이 테이블 역할을 오랫동안 해 왔다는 생각을 하며 어르신의 폭낭으로 만든 저 탁자를 보니, 어르신이 저 테이블을 얼마나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시는지 그 감정이 내게도 전해졌다.

40여년이 넘은 폭낭으로 만든 세월의 흔적. / 사진=김진경
40여년이 넘은 폭낭으로 만든 세월의 흔적. / 사진=김진경
40여년이 넘은 폭낭으로 만든 세월의 흔적. / 사진=김진경
40여년이 넘은 폭낭으로 만든 세월의 흔적. / 사진=김진경

남편과의 사별 후 혼자 갈빗집을 운영하기에는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 업종을 바꿔 정식도 하고 곰탕을 해 보기도 했단다. 냉우동이야 그 전부터 조금씩 했지만 혼자 식당을 하면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메뉴를 생각하다가 소고기 찌개를 만들어서 판매했다. 다행히 사람들이 아직도 무척 좋아해 주어 마을 단골들은 냉우동을, 식당을 좋아해 주시는 사람들은 소고기 찌개를 꼭 시키신단다.

어르신이 말씀해주시길 처음에 선보였던 밀면 육수는 닭 육수였다. 국수도 직접 눌러 그 압력으로 뽑는 국수 기계를 이용해 제면했다. 몸에 체중을 실어 국수를 뽑아야 해서 국수를 많이 뽑으면 어깨가 다 나갈 정도라고 했다. 그 60년 된 제면기는 창고에 잘 보관해 두었다. 가끔 마을의 단골들도 예전 닭 육수 냉우동을 이야기하시는 분도 계신다고. 그러다 닭 육수 관리가 쉽지 않아 돼지등뼈로도 육수를 내 보았는데 능클한 맛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 지금은 소뼈를 이용해 사골육수를 내었다. 소뼈 하나로만 되지 않고 북어도 넣고 다른 부재료를 넣으면서 육수 맛을 여러 번 교정했다. 그 과정만 10년이 걸렸다. 그래서 그런지 이 육수로 만든 이 집 음식은 깊은 맛이 있으면서 시원하고 개운한 맛이 있는 것 난다고 생각해 해장음식으로도 냉우동을 많이 찾는다고 했다. 속풀이로 냉우동을 먹으며 내는 손님들의 무의식 탄식을 듣는 어르신의 기분은 어떠실까?

“나는 이상하게 어디 식당에 가서 음식을 딱 먹으면 뭐가 들어갔는지 거의 알아져. 그래서 돌아와서 내 식대로 해 보지. 그럼 거의 그 맛이 나오더라고. 이제까지 내가 만든 음식들은 한 번도 남의 손 빌어본 적 없어. 다 내가 레시피 개발한 거. 내 생각대로 한 거. 풋마늘 나오면 사람들은 줄기 부분만 마농지 담그지이. 잎은 질기고 맛없다고 안 써. 그럼 그걸로 겉절이를 해봐. 잘도 기가 막혀. 약간 매콤하게 겉절이 해서 수육에 올려서 먹어봐봐.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거든. 이번 봄에도 그렇게 했어. 사람들이 잘 먹으면 나도 막 기분 좋아. 그런데 나는 이런 걸 먹어보지도 않고 딱 느낌이 와. 아 여기에 이 음식 딱 해서 같이 먹으면 맛있겠구나. 이렇게. 그리고 누가 마농지 담글 때 사이다 놓으면 맛 좋댄 하니까 해 보지 않아서? 한 이틀은 괜찮아. 그런데 나중에는 깊은 맛이 없어지고 별로야. 그럼 음식에 거짓으로 맛 내지 말자고 다시 한번 생각게 돼. 집에서 간장 직접 만들어서 그걸로 마농지 해야 맛있지. 지금은 다 사서하잖아? 우리 집엔 그런 거 없어.”

/ 사진=김진경
가장 최근에 했다고 냉장고에서 꺼내주신 어르신의 마농지, 알싸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마농지의 식감과 너무 잘 어우러졌다. / 사진=김진경

어르신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음식은 그 맛이 변하면 안 된다고. 

첫 번째 가서 너무 맛있게 먹은 음식점이 있다면 꼭 다시 가신다고 했다. 두 번 세 번 갔는데도 그 맛이 그대로면 어르신은 이 집은 제대로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신단다. 그런데 재차 찾은 음식점의 음식 맛이 변하면 더 이상 발길이 닿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 부분은 식당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이라 하셨다.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자식들을 먹여 키우기 위해서, 어르신은 닥치는 대로 일하지 않을 수 없으셨다. 물론 시어머니께 식당을 물려받아 정처 없이 돈 되는대로 여러 일을 하지 않고 식당만 쭉 하시게 되었지만, 지금처럼 하루에 몇 시간만 문을 여는 것은 생각도 못 하셨다 했다. 한창 젊을 때는 새벽 2시까지 식당을 했었고 식당이 끝나도 정리하고 간장 만들고 탈수기도 없던 시절 행주 빨래까지 다 하고 나면 쪽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야 했다. 그 시절 인근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의 밥까지 해 주며 손님까지 받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렇게 죽어라 일했는지 지금은 그때 살았던 게 상상도 가지 않는다고 했다. 

내 아이들을 먹여 키우기 위해 식당을 하셨던 김임자 어르신은 동네의 총각 선생님들의 밥까지 해 주면서 동네에서 “어머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정도로 많은 아들들이 생겨났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들은 어르신을 ‘사장님’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어머님’으로 부르는 분들이 꽤 많다고. 한 며칠 아들에게 식당을 맡기고 일을 보면 손님들이 와서 어머님 어디 가셨냐고 다들 찾으신단다. 그래서 어디 마음 푹 놓고 갈 수도 없다고 하셨다.

그때의 인연으로 다른 지역으로 전근 가셨지만 아직 수십 년 동안 식당을 찾아오는 선생님들도 있다고 하셨다. 단골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자식들을 데려오기도 하고 손자들을 데려오기도 하는 어르신의 식당은 식당 그 이상의 공간이었다.

“그때 선생들한테 아침이랑 점심 해주면 밤에는 선생들이 우리 집 부엌에 와서 자기네들끼리 밥도 해 먹고 간단한 요리도 해 먹었지. 그때 우리 아들도 비슷한 또래니까 같이 먹으면서 막 친하게도 지내서. 그럼 내가 그 선생들한테 말하지. ‘여기가 이녁 집이라?’ 그렇게 지낸 선생들이 아직도 찾아와서 어머님이라고 하면 막 반가워.”

나는 어르신이 말씀하신 ‘이녁 집(너희 집)’이라는 표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어르신이 아직도 계신 이 식당의 음식은 당연하겠거니와 오래도록 변함없이 식당에 자리 잡은 오래된 식탁들과 테이블. 꼭 손님들한테 커피 마시고 가라고 말씀하시고 정수기 한쪽에 마련해 둔 커피믹스, 오래된 흔적이 보이는 타일이지만 깨끗하고 청결하게 유지된 바닥과 벽. 빠르게 만들지 않고 오랜 시간 정성으로 만들어 낸 이 집만의 육수는 어르신이 만든 음식이 패스트푸드가 아닌 슬로우푸드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70년을 맞은 이 식당 역사에는 50여 년 이상 된 어르신의 삶과 철학이 묻어 있었고, 어르신의 음식을 먹으며 지내 온 사람들의 흔적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오래된 이 집의 단골들에게는 어르신의 말 그대로 ‘이녁 집’ 즉 어르신의 식당이 아닌 손님들의 내 집처럼 편안하고 정겨운 공간이었다.

어르신의 공간과 음식에는 또 어떤 철학과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음식을 대하는 어르신의 태도와 손님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다음 편에서 김임자 어르신의 이야기를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또 여전히 지금도 집에서 된장을 만드시고 계신다는 어르신의 맛깔 나는 손맛 팁도 알려드릴 예정이다.

유명인부터 동네삼춘들까지 골고루 찾는다는 맛집, 그곳의 &nbsp;손맛을 보지 못하고 와서 너무 아쉬웠던 인터뷰였습니다.&nbsp;/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nbsp;<br>
유명인부터 동네삼춘들까지 골고루 찾는다는 맛집, 그곳의  손맛을 보지 못하고 와서 너무 아쉬웠던 인터뷰였습니다.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김윤영(이로이로)

육지것에게 들리는 제주의 진한 사투리는 화가 나신 것도 같고 꽤나 투박하기도 하여 인터뷰 때마다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갔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매번의 인터뷰가 제주어 듣기 평가이기에 삼촌들의 표정과 손짓에 더 집중하며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있다.

하도리에서 이로이로라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관련된 여러 클래스들도 운영 중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제주의 콘텐츠들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있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한지 10년 차,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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