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73) 서양의학사, 윌리엄 바이넘 지음, 박승만 옮김, 교유서가, 2017

이 책은 다양한 주제의 입문서로 큰 명성을 얻고 있는 옥스퍼드대학 출판부의 Very Short Introductions(VSI) 시리즈 중 하나로 출간된 서양의학사 입문서이다. 국내에서도 여러 의과대학에서 의학의 역사를 가르치는 교과서로 활용되고 있을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책을 쓴 윌리엄 바이넘(William F. Bynum)은 예일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의학사를 전공한 원로 역사가로서, 특히 서양 근대 의학사에 조예가 깊은 분이다. 

이 책이 교과서로 널리 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딱딱하고 지루한 책은 아니다. 일단 시리즈 제목대로 분량이 짧아서 부담이 덜하면서도 고대부터 현대까지 서양의학의 흐름을 재미있고 밀도 있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서양의학의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이다. 저자는 보통의 통사적인 방식, 즉 시간 순서대로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을 따르면서도 고대, 중세, 근대, 현대라는 도식적인 틀을 버리고 의학의 ‘유형’과 의학이 실행되었던 ‘장소’를 중심으로 서양의학의 역사를 재편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는 19세기까지 서양의학의 유형을 각각 머리맡(침상) 의학, 도서관 의학, 병원 의학, 지역사회 의학, 실험실 의학으로 나누고, 이런 유형들이 어떻게 얽히고설켜서 현대 의학을 구성하고 있는지 소상히 알려준다. 그런 점에서 과거의 의학은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생명력이 다한 유물이 아니라 현대 의학 곳곳에서 여전히 찾아볼 수 있는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1. 
우선 머리맡(침상) 의학부터 살펴보자. 머리맡 의학은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서양의학의 가장 오래된 전통이다. 환자의 침상 곁에서 환자의 이야기를 잘 듣고, 호소하는 증상을 세심하게 관찰하며, 생활 습관이나 거주지의 환경까지 두루두루 살피는 것이 히포크라테스 학파 의사들의 진료 스타일이었다. 그들은 지금처럼 질병과 환자를 분리해서 인식하지 않았다. 증상으로 표현되는 질병은 개인마다 모두 다른 독특한 성질을 지니고 있었고, 질병은 자연환경은 물론이고 사회문화적인 환경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었다. 개별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전인적인 의학의 모습이 바로 머리맡 의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2.
도서관 의학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의학 유형이다. 도서관 의학은 책을 기반으로 행해지는 의학이다. 기독교가 발흥하면서 서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의학 전통이 쇠퇴했지만,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고전 의서들을 아랍어나 페르시아어, 시리아어 등으로 번역하여 보존하고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렇게 보존된 고전 의서들이 서유럽으로 다시 전해져서 라틴어나 근대 유럽의 언어로 옮겨짐으로써 르네상스 의학이 꽃피울 수 있었다. 특히 근대 해부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는 도서관 의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1543년에 『De humani corporis fabrica(인체의 구조에 대하여)』를 출간한다. 이 책은 관행을 깨고 직접 해부를 시행하여 얻은 지식을 아름다우면서도 정밀한 도판에 담고 있다. 또한 이 책은 활판 인쇄술을 통해 대량 생산되어 해부학 지식이 확산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베살리우스의 저서는 책을 중심으로 의학이 실행되는 도서관 의학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3.
병원 의학은 1789년과 1848년 사이의 의학을 일컫는 것으로 혁명 직후의 파리를 중심으로 행해졌다. 혁명 정부는 병원을 중심으로 새로운 보건의료체제를 구상하였는데, 내과뿐 아니라 외과적 사고를 적극 수용하였기 때문에 신체의 각 장기가 의사들의 주요 관심사로 등장하게 된다. 병동으로 밀려든 수많은 가난한 환자들을 통해 신체 진단 기술을 발전시킨 의사들은 환자가 사망하면 부검을 하여 각 장기에 생긴 질병의 정체를 관찰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부병리학과 신체 진단 기술이 결합한 프랑스의 병원 의학을 역사가들은 ‘임상의학’이라고 부른다. 또한 병원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사례들을 모아 통계적으로 분석하여 치료법의 효과를 확인하는 ‘수량적 방법’을 도입한 것 역시 병원 의학의 중요한 유산 중 하나이다.   

4. 
지역사회 의학은 전염병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의학의 유형이다. 우리가 코로나 팬데믹을 겪었듯이 각 시대에는 그 시대 고유의 유행병이 존재했다. 14세기에서 17세기 사이 서구에서는 페스트가 여러 번 반복되었으며, 특히 14세기에 대유행했던 페스트는 흑사병이라 불리면서 여전히 유행병의 대명사로 인식된다. 18세기에는 천연두, 19세기에는 콜레라, 20세기 초반에는 인플루엔자 등 여러 번의 대유행이 있었고 그때마다 지역사회 의학은 격리, 검역, 예방 접종, 위생 개혁 운동 등의 전략을 개발하면서 전염병과 싸워왔다. 코로나 팬데믹을 마주했을 때 인류는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온 지역사회 의학의 전통을 충실히 따랐고, 여기에 20세기 이후에 발전한 과학기술의 힘을 보태어 미지의 질병에 대항했던 것이다.

5.
마지막으로 실험실 의학은 대개 19세기에서 20세기 전반기까지의 의학을 말한다. 병원 의학이 힘을 잃어가면서 의학의 중심지가 실험실로 옮겨 가게 되었다. 병원과 달리 실험실은 여러 변수를 통제하여 정제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장소였고, 이는 19세기 전반기의 세포 이론과 후반기의 세균 이론으로 결실을 보게 된다. 세포 이론을 통해 질병은 세포에서 발생한다는 환원적인 관점이 정당화되었고, 세균 이론을 통해서 각 질병에는 각각의 다른 원인이 존재한다는 질병 특이성 개념이 확립되었다. 또한 세균 이론은 소독법의 발전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소독법은 새로 개발된 흡입 마취와 함께 19세기 외과 수술이 혁신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실험실 의학이 발전하면서 의사들은 이제 청진기를 들고 환자를 진찰하는 임상의사보다는 실험실에서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과학자로서의 정체성을 부여받게 되었고, 이는 의과학의 발전이라는 긍정적인 결과와 더불어 의학의 비인간화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6. 
이 다섯 가지 유형의 의학은 현대 의학을 이루는 핵심적인 요소들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의사는 여전히 환자의 침상을 방문하며, 교과서뿐만 아니라 셀 수도 없이 많은 잡지와 자료들이 의학 정보를 가득 담은 채 도서관과 온라인 세상에 넘쳐난다. 병원은 진료와 교육, 연구를 포괄하는 장소로 현대 의학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고, 신종 감염병이 계속 등장하면서 지역사회 의학은 계속 고군분투 중이다. 현대 의과학은 대규모 실험실을 기반으로 거대과학이자 주요 산업으로 진화했다. 그리고 한정된 예산 속에서 다섯 가지 유형의 의학은 서로 경쟁하고 타협하면서 현대 의학을 구성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의 전통을 두루 살펴봄으로써 현대 의학의 모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하지만 저자가 휘그주의 즉, 서양의학의 역사를 오늘 혹은 내일을 향한 필연적인 진보의 과정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다. 의학의 역사를 진보의 역사로 보는 시각은 20세기 초반까지만 통용되던 낡은 방식이다. 대부분의 의학사가 들은 서양의학이 성공 못지않게 다양한 실패를 겪었으며, 의학은 당대의 사회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배경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망 속에서 실행되었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심지어 데이비드 우튼(David Wootton)이라는 영국의 역사가는 『나쁜 의학(Bad Medicine)』이라는 책을 통해 2,400여 년의 서양의학 역사 중에서 마지막 100년을 제외하고는 실제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학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의사들은 환자에게 이로움보다는 해를 더 많이 끼쳤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 책의 저자는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이다. 의과학의 발전만으로 인간이 직면한 건강과 질병의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다고 보지 않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의 의학이 어제의 의학보다 못하다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통해 드러나는 의학의 한계와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질병 예방과 치료를 위한 의학의 노력을 긍정하는 균형 잡힌 시각은 이 책이 교과서로 많이 선택되는 이유를 짐작게 한다.

이 책에는 아쉬운 점도 존재한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의학의 역사(The History of Medicine)』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서양의학의 전통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라고 슬쩍 언급은 하지만 저자에게 의학은 곧 서양의학을 뜻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구 이외의 다른 의학 전통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영미권 출신 저자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우리처럼 서구와는 다른 의학 전통을 발전시켜 온 입장에서는 서구 중심적인 시각이 아쉬울 수밖에 없다. 서구뿐 아니라 동아시아라는 맥락에서 변화해 온 한국의학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책이 필요한 이유이다.

서양의학에 한정해 보아도 책의 한계가 드러난다. 이 책은 특정 유형과 장소를 중심으로 의학을 설명하기 때문에 그런 유형에 딱 들어맞지 않는 다양한 이론과 실천들이 누락되어 있다. 이를테면 전쟁터에서 행해지는 군진 의학은 의학의 발전과 실패에 큰 영향을 끼친 유형의 의학이지만 이 책에는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의학 전통을 이루는 주요한 행위자이지만 기존의 역사 서술에서는 소외된 환자나 다양한 민간 의료인들의 역사가 생략된 점도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학사의 핵심을 파악하기에는 매우 좋지만, 그 전모를 파악하기엔 부족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짧은 분량에 서양의학의 역사를 이처럼 유려하게 담아낸 책은 그렇게 많지 않다. 꼭 의료인이나 의과대학생이 아니더라도 서양의학의 역사에 관심 있는 누구나 집어 들 수 있는 책으로 손색이 없다. 

최근에 의대 입시 열풍이 불면서 서울은 물론이고 지방에까지 ‘초등 의대반’이 생겨나고 있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다. 우수한 학생들이 의사가 되어 한국 의학의 수준을 높여준다면 기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의대를 목표로 하는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성적이나 스펙 쌓기 이외에 의학의 성공이나 실패, 의업의 도덕적, 사회적 책무 등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통해 의학의 역사적 깊이와 무게감을 미리 느껴보고 의사로서의 미래를 고민해 보시길 권해 드린다.


# 황임경

제주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인문학교실 교수. 한림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의학교실 박사. 의철학, 의료인문학, 서사의학 등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의료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의학과 인문학의 경계 넘기》, 《팬데믹, 모빌리티, 테크놀로지》(공저), 《Body Talk in the Medical Humanities: Whose Language?》(공저), 《21세기 청소년 인문학 2》(공저), 《의학의 전환과 근대병원의 탄생》(공저), 《내러티브 연구의 현황과 전망》(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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