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작가 현택훈이 새 시집 《마음에 드는 글씨》(한그루)를 펴냈다. 이번 시집은 저자의 네 번째 시집이다. 4부에 걸쳐 시 80편을 실었다. 

출판사는 책 소개에서 “특유의 다정한 감성으로 시와 산문을 써온 저자는 이번에도 제주의 서정을 그만의 따뜻한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고 소개한다.

이어 “숙대낭과 머쿠슬낭 그늘을 따라 걸으며 돌담 아래 수선화에 몸을 기울이고, 새소리를 따라 숲을 거닐다가 잃어버린 약속이 묻혀 있는 옛 서점 자리를 더듬기도 한다”면서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뜬 어머니를 ‘나의 작은 여동생’으로 그리워하고, 얼마 전 세상을 뜬 아버지는 고단한 육신을 벗고 빙글빙글 춤을 춘다. 귤 저글링을 하는 아내는 나의 꿈 얘기를 어둠처럼 가만히 들어주고, 시를 쓰게 하는 아이들이 있다”고 시집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를 전했다.

저자는 책 말미에 해설 대신 마흔두 꼭지의 창작노트를 실었다. 창작노트에 대해서는 “시의 원천이 된 기록도 있고, 그 자체로 시가 되는 일상의 장면들이 생생하면서도 아름답다. 전작들에서처럼 시집 전반에 음악이 흐르고, 그 노래는 시인의 말처럼 ‘봄바다에게서 빌린’ 것들이기에 때론 흐릿하고 때론 끝이 나지 않아도 누군가의 마음에 선명한 글씨로 새겨질 듯하다”라고 강조한다.

수로의 마음
현택훈

화순 수로 따라 흘러가네 물길이 바뀌면서 아이가 생겼네 이끼의 마음과 같다고 몇 년 전 구름이 흘러가네 저녁에 밥을 짓기 위해 이 숲을 지나 흐를 것이네 그 물의 마음이 연기를 피우네 이 물길 따라 흐르는 게 어디 한둘인가 사랑은 푹 젖은 채 물기가 마르지 않네 물길을 내는 건 숲의 밤길을 내는 것 서걱거리는 사람들에게 저녁이 흘러가네 저녁밥을 짓는 사람에겐 수로를 내듯 밤길을 낼 것이네 어젯밤 비바람이 흘러가네 화순 수로 고운 이불을 펼치네 물에도 이름이 붙는데 처음 호명된 물이 다시 흘러도 그 이름이네 그 투명한 마음으로 물 한 사발 들이켤 것이네 훗날이 여기에 있어 녹아 흐르는 그릇들 오늘밤에 다 닦을 지경이네 우듬지 젖은 나무들이 달로 흐르는 밤이 오면


아무도 낫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현택훈

한 사람이 병나고
또 한 사람이 병수발을 든다

골골대는 저녁 파도 소리에
샛별이 뜬다

오늘의 처방전은
수평선을 바라보는 일

휴양지에서 요양하는 사람들은
여행객과 구별하기 쉽지 않다
어깨에 힘을 빼고
숨 들이마시고

바닷게가 문병객처럼 
왔다가 간다

아무도 낫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눈동자가
약병 뚜껑을 닮아간다
빙그르르 돌다 툭 열린다

그곳에 스며드는 글자가 있었다
햇살이었다

병수발을 들었던 사람이 
병나고 

수평선 너머로 갔던 
배가 돌아온다

저자는 창작노트에서 “매미 울음을 사진 찍을 수 있을까. 어떤 사진에서는 소리가 정말 들리는 것 같다. 시도 그럴 것이다. 시에서 소리도 나고, 안개도 피어오른다. 매미 울음을 따라 숲에 들어간 적 있다. 매미 울음이 나뭇잎과 햇빛에도 묻어 있었다. 숲 속으로 들어갈수록 나뭇잎이 더 짙었다. 할 일을 미뤄두고 걸은 숲길. 매미 날개 같은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집에 돌아갈 걱정이 되지 않을 즈음 시가 온다. 그러면 지난 봄에 산 화분에 물을 줘야 하는 일이 중요한 일이라 여기게 된다”고 밝힌다.

현택훈은 제주 출신으로 시집 《지구 레코드》, 《남방큰돌고래》,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등을 펴냈다. 동시집 《두점박이사슴벌레 집에 가면》, 인문지리서 《제주 북쪽》, 에세이집 《제주어 마음사전》, 청소년 역사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제주4.3은 왜?》(공저)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제주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제1회 제주4.3평화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했다.

172쪽, 한그루,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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