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74) 야마센 홀로 지키다, 우지 야마센회-황자혜,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19

/ 사진=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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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센지

“야마모토 센지(山本宣治, 애칭 야마센, 1889~1929년)는 아시아태평양 전쟁 이전 천황이 입법, 사법, 행정, 그리고 군대의 지휘권까지 모두 권한을 쥐고 일본을 지배하던 시대에 전쟁반대와 주권재민을 주장하며 서민과 함께 싸웠습니다. 그 때문에 야마센은 1929년 3월 5일 우익의 테러로 살해됩니다. 올해(2009년)는 살해 당시 교토-우지 시(宇治市) 출신 노동당 국회의원이었던 야마센의 탄생 120주년, 서거 8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32쪽)

《야마센 홀로 지키다》 제1부 「야마센 홀로 보루堡壘를 지키다」의 제1장 「야마모토 센지를 아십니까」 첫대목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것만 보면 그가 노동당 국회의원이었다가 우익 테러로 살해된 비운의 정치가인 듯하다. 하지만 그는 일본인들 가운데 드물게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고 꽃 가꾸기를 좋아하던 어린 시절을 거쳐 대학(당시 도쿄 제국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도시샤(同志社)대학과 교토 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했던 학자였다. 태어날 때부터 워낙 병약한데다 결혼 후 장티푸스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지기도 하고, 왼쪽 폐에 문제가 생겨 각혈을 하는 등 평생 자신의 몸을 제대로 추슬러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오죽했으면, 장녀 하루코(治子)가 양쪽 손가락뼈가 결손되고 왼발에 선천성 장애를 입은 몸으로 태어나자 혹시 자신의 병 때문이 아닌지 고심했을까? 그런 그가 어찌하여 정략이 판치고 술수와 암투가 횡행하는 정치권에 들어가 국회의원이 되었는가? 

생각건대, 그 까닭은 여러 가지이나 근본은 하나인 듯하다. 여러 가지 중에 두 가지만 예로 들어보면 그 근본을 알 수 있다. 

우선 당시 일본사회가 그를 안경을 쓴 곱상한 학자로 남게 하지 않았다. 좀 더 가지치기를 하면 이러하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왕정복고를 주장한 이들과 역시 같은 이유로 막부幕府 타도를 주창한 이들이 명치일왕(明治天皇)을 내세워 근 300년에 걸친 에도(江戶) 막부幕府체제를 무너뜨리고, 일본의 근대화를 계획, 실천하던 때였다. 1868년에 즉위한 메이지 일왕은 일본의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1870년 신도神道를 국교로 정하면서 제정일치를 선포했다. 이는 곧 일왕의 신격화를 의미한다. 또한 이는 18세기 말 프랑스대혁명으로 절대왕조의 붕괴를 경험한 서구의 향방과 정반대의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야마센은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는 기회를 얻게 된다.

“야마센은 브리타니야 하이스쿨에서 남녀공학, 철저한 자유주의, 인종과 빈부에 의한 차별을 부정하는 민주 교육을 체험합니다.……야마센은 캐나다에서 체험한 노동과 교육 덕분에 이후 천황이나 국가라는 권위로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고, 사상을 부정하는 일과 싸워 나가는 사상 토대를 지니게 됩니다.”(63쪽)

둘째, 다른 나라로 유학하여 신문물을 보고 배우고, 돌아와 그대로 실천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게다가 실천의 내용 또는 품질도 고려해야 한다. 예컨대 미국유학파가 친미주의자가 되고, 일본유학파가 친일주의자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자신이 보고 배운 것을 자신의 나라에서 널리 알리고 덧붙이는 일은 당연한 책임이자 권리이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전달하고 확산시킬 것이냐이다. 특히 ‘무엇’이 중요한데,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바탕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무엇’을 택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 의지이자 본성의 요청이기 때문이다. 야마센이 어린 시절 그리던 꿈은 “꽃을 심어 세상을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하고 싶다.”(53쪽)는 것이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사람을 넘어 식물과 동물까지 관심과 애정을 가질 수 있었던 그의 본성이며, 그의 발전 방향이자, 이후 유학하고 돌아온 후에 널리 알리고자 했던 ‘무엇’이다. 

동물학자에서 마르크스주의자, 자유로운 사상가로 

야마센은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가 발행한 《사회주의연구》 창간호에 게재된 <공산당선언>을 읽고 사회주의에 처음 접하게 된다. 동시에 그는 다윈의 《종의 기원》을 통해 진화론을 공부하기도 했다. 한국인들에게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그 즉시 동족상잔의 6.25전쟁을 상기시켜 끔찍한 기억으로 인해 색안경부터 끼도록 만들지만 사실 그것은 국가주의, 전체주의, 민주주의, 독재주의, 자유주의나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상에서 시작된 사회이론일 따름이다. 게다가 현대에 들어와 말로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표방한다고 했으나 실질은 전혀 다른 일당 독재주의로 빠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공산주의는 실험은 해보았으되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그저 순수 이론에 가깝다. 그럼에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상당히 매력적인 이론임에 틀림없다. 특히 가진 것 없는 이들, 사회 약자들과 그들을 위해 헌신하려는 이에겐 더욱 그러하다. 야마센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얼마나 도취되었는지는 본서만으로 알 수 없지만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한 것만은 분명하다. 1922년 3월 미국에서 산아제한 운동을 추진하고 세계 최초로 여성 피임권을 주장한 여성 운동가 마가렛 싱어가 일본에 왔을 때 통역을 맡았던 야마센은 그녀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원래 그리스도 교인이었는데, 지금은 자유로운 사상가이자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74쪽) 

나는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말한 것보다 자유로운 사상가라고 말한 것에 방점을 찍고 싶다. ‘자유로운 사상가’란 무엇인가? 1920년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한 야마센은 생물학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교토 대학 대학원(의학부)에 적을 두고 ‘이모리(イモリ, 일본 고유의 도룡뇽)’ 정자 발달 연구를 하는 한편 도시샤 대학 예과 강사로 주 2회 ‘자연과학 개론’을 가르쳤다. 

“야마센은 도시샤 대학에서 하는 강의에 ‘인생 생물학’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강의를 통해 학생들에게 전하려는 것은 ‘인간이 신의 아들이라든지 천사라든지 하는 환상에서 눈을 뜨게 하는 것’이며, ‘저속한 성 지식이나 비과학적 생리학을 타파하고 과학적인 태도로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69~70쪽) 

“야마센의 ‘살아 있는 생물학’의 도달점은 전쟁이 없는 사회,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 건설이었습니다.”(71쪽)

이후 그가 산아제한 운동 강의 활동과 더불어 노동자 교육활동에 본격적으로 몰두하기 시작한 것도 자연스럽다. 그는 ‘성교육’이란 명분으로 노동자 교육에 전념했다. “값싼 노동력과 전쟁에 필요한 병사를 확보하기 위해 국민에게 ‘낳자, 늘리자’라는 슬로건으로 출산을 장려했던 정부의 입장에서는 산아제한과 피임 등을 언급하는 그의 강연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의 강연에는 당장이라도 강연을 중지시킬 수 있도록 언제나 경찰이 입회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당시 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보수 세력은 이른바 자경단自警團에 의한 조선인 대량학살과 사회주의자, 전투적 노동자 학살을 방조했다. 야마센의 활동에 대한 감시도 더욱 심해졌다. 급기야 그 이듬해인 1924년 산아제한 강연회에서 그는 ‘연설 중지’를 당하고, 이로 인해 교토 대학 강사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그는 ‘자유로운 사상’의 요청을 물리칠 수 없었다. 

보통선거를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야마센은 이 운동의 강사로 활동했으며, 1925년 제국의회가 보통선거법을 가결하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보수 집권 세력은 보통선거 실시에 의해 노동자 농민의 대표가 국회의원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고, 보통선거법을 가결하고 1개월 반이 흐른 3월 19일 ‘치안유지법’을 만들었다.”(83쪽) 치안유지법은 “국체(천황제)의 변혁과 사유재산제도(자본주의체제) 부정을 목적으로 한 결사와 행동을 처벌한다.”는 법률이자 “공산당을 비롯한 노동자, 가난한 농민들의 정치 활동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률이었다.”(84쪽)   

노동자 농민이 지지하는 국회의원

일본에서 노동자, 농민을 위한 정당인 노농당이 결성된 것은 1926년이다. 야마센은 노농당에 가입하여 교육출판 부장에 선출되었다. 1928년 노농당은 그에게 제1회 보통선거에서 후보로 출마하기를 요청했다. 그가 말했다. “나는 생물학자이지 정치 전문가가 아닙니다. 몇 만 대중의 대표로 의회 투쟁을 과감하게 해 나가는 적임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당의 요구에 따라 병든 몸으로 선거에 나갔고, 다나카 내각과 기존 정당인 정우회(입헌정우회, 1900년 이토 히로부미 등이 결성함) 등의 부패 선거 책동에도 불구하고, 보기 좋게 당선되었다. 선거 결과를 알리러 온 운동원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제군들에게 빌려 온 것, 제군들의 것입니다.……이제부터 나는 민중이 움켜쥔 한 자루의 창입니다. 나 개인은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91쪽)

하지만 일본 정부는 야마센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당선된 8명의 무산無産 정당(노농당) 출신 국회의원과 그들의 지지 세력인 일본 공산당원과 노농당원들을 도저히 그냥 놔둘 수 없었다. 제1회 보통 선거가 끝나고 1개월 후 경찰을 동원하여 공산당원과 노농당원, 노조 활동가 등 1,600명을 치안유지법에 따라 체포 구금했다. 이른바 3.15사건이다. 악착같은 일본 정부가 여기서 멈출 리 없었다. “1928년 4월 당국은 노농당에 해산 명령을 내렸고, 야마센의 집 주변에는 매일 우익 단체원이 서성거렸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자결 권고서’가 날라들었다.”(94쪽) 그들이 악착같다면 우리는 끈덕지면 된다. 

야마센은 “죽음을 각오하고, 치안유지법 개정(개악됨) 긴급칙령 사후 승낙 안에 반대하는 연설을 할 각오임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관철되지 못했다. 아니 비록 국회에서 발언할 기회는 영원히 사라졌지만 그의 불굴의 의지는 결국 관철되었다. 죽음으로...

우익단체 칠생의단(七生義團) 소속 서른일곱 먹은 사내 구로다는 동맹파업에 관해 상의하고 싶다며 야마센이 도쿄에서 묵고 있는 고에이칸(光榮館)에 찾아와 면담을 신청했다. 그리고 야마센을 만난 그는 자결 권고서를 들이대더니 곧 바로 야마센의 목과 가슴을 칼로 찔렀다. “향년 40세, 5명의 자녀와 아내, 어머니를 남기고 야마센은 짧고도 꿋꿋이 살아낸 생애를 마칩니다.”(102쪽) 

소환召喚의 이유 

언젠가 교토 도시샤 대학에 가서 시인 윤동주(1917~1945년) 시비에 헌화하고, 풍물을 울리며 그의 영령을 위로한 적이 있다. 당시 「시인 윤동주를 사모하는 교토 일본인의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혼타니 씨는 우리를 윤동주가 투옥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소풍 왔다던 우치가와(宇治川) 아마가세바시(天ヶ瀨橋)로 안내하고 한 송이 꽃을 손에 쥐어주고 함께 강물에 던지자고 말했다. 우리는 윤동주가 1943년 초여름 대학 동기생들과 함께 마지막 사진을 찍었던 아마가세 다리에서 엉성한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차를 타고 야마모토 센지의 고택이자 기념관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난 쿠라오카 씨는 야마모토 센지가 제국의회에서 치안유지법을 개악하는 데 반대했다는 이유로 극우조직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치안유지법 폐지를 위해 싸우다 죽었고, 이후 윤동주는 치안유지법이란 올가미에 걸려 옥사했다. 야마센과 윤동주의 묘한 인연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십여 년이 흘러 역자이자 편집자인 황자혜 씨에게 이 책을 받았을 때 다시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나는 갑자기 일본은 우리의 동맹이라고, 이제야말로 과거는 잊고 미래를 향해 손잡고 나아갈 때라고 외쳐대는 소리에 그를 다시 소환할 수밖에 없었다. 보다 결정적인 것은 역시 우리의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여 게이오慶應 대학에서 강연하면서 오카쿠라 텐신이 지껄였다는 말을 인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였다. 물론 게이오 대학은 한국 유학생들도 많이 다니는 사립명문이다. 그 학교의 설립자는 일본 근대화의 기수라 할 만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로 1만엔 권 지폐에 들어가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나는 진심으로 아시아의 악우惡友들을 사절한다.”고 말하면서 탈아론脫亞論을 주창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가 말한 악우는 조선과 중국인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서구 열강의 방식대로 조선과 중국을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말인 즉 열강의 군대처럼 침략하고 약탈하며, 죽이고 불태운다는 뜻인데, 일본은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강간.(남경대학살의 경우처럼) 왜 우리의 대통령은 굳이 그런 대학을 선택한 것일까?

게다가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이라니, 철저한 국수주의자로 일본을 중심으로 하나의 아시아가 되자고 주창한 인물, 우리의 단군이 일본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자손이라는 막말을 서슴치 않던 인물을 왜 굳이 입에 담았을까? 아마도 우리의 대통령이 일본에 왔다고 기뻐했을 재일 한국인들, 특히 후쿠자와 유키치와 오카쿠라 텐신이 어떤 인물인지 아는 이들은 맥이 많이 풀렸을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난 일 아니냐고, 우리를 식민지화한 것도 지난 일이고, 탄압하고 살해한 것도 지난 일이며, 징용하거나 납치하여 이국땅에서 고혼이 되게 만들거나 고통 속에서 죽어가도록 한 것도 지난 일이고, 모든 것이 다 지난 일인데, 자꾸만 지난 것에 억매이면 영원히 앞으로 나갈 수 없다고. 맞는 말이다. 과거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어찌 앞날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과거는 당연히 털고 가야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일본 정부 당국자들에게 정식으로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털고 가자고, 이젠 우리가 야마센과 윤동주처럼 고통 받은 영혼을 위해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갈 때다. 후쿠시마 오염수를 걱정하는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연대해야할 때이며, 우리 아이들이 더 이상 사과와 배상, 혐한嫌韓과 배일排日의 족쇄에 억매이지 않도록 진심으로 가슴을 열어야할 때이다. 그래서 먼저 독자 여러분에게 야마센이란 이름을 상기시켜드리고 싶었다.  


#심규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졸업, 동대학원 중문학 박사. 제주국제대 교수, 중국학연구회, 중국문학이론학회 회장 역임. 현 제주중국학회 회장, (사)제주문화포럼 이사장. 저서로 《육조삼가 창작론 연구》, 《도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사》, 《한자로 세상읽기》, 《부운재》(수필집) 등이 있으며, 역서로 《중국사상사》, 《중국문학비평소사》, 《마오쩌둥 평전》, 《덩샤오핑과 그의 시대》, 《개구리》, 《중국문화답사기》, 《중국사강요》, 《완적집》, 《낙타샹즈》 등 7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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